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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허드슨과 따스한 이야기
2022. 2. 2.

인계의 거리는 한적했다. 이안은 스마트폰을 연신 들여다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낮게 쌓인 벽돌담은 아담했고 이안의 목적지까지의 길을 안내했다. 담 위에 쌓인 눈이 조금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겨울이었지만 날은 조금 포근했다. 이 부근은 어제 눈이 와서일지도 몰랐다. 이안은 영국의 날씨를 생각하고는 한국의 화창한 하늘을 즐기기로 했다.

 

몇 번 코너를 돌자 금세 목적지가 보였다. 모퉁이에 위치한 제과점은 안에서부터 분주해 보였다. 문에 닫혀있다는 팻말이 걸려져 있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문을 밀어 열었다. 딸랑, 하고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왔니? 네가 이안이구나.”

 

푸근한 인상의 중년 아주머니가 이안을 나와 반겼다. 그는 앞치마에 급히 손을 닦고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안은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민정 씨 맞으시죠?”

“딱 맞춰 왔네요. 오는 길은 헤메지 않았나요?”

“전혀요. 도서관에서 가까워서 금방 왔어요.”

“서후가 데리고 오는 사람들은 다 똑같이 그 말을 하더라고요. 서후도 도서관을 좋아하는데 다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나 봐요.”

 

민정의 너스레에 이안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이안이 긴장해서라고 생각한 민정은 잠시 일을 보러 가겠다며 가게를 편히 둘러보라고 했고, 방금 나온 것인데 맛 좀 보라며 과자 몇 조각을 담아 주었다. 하나를 입에 넣으려던 이안은 서후도 금방 내려온다는 민정의 덧붙임을 듣고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레 가게를 살피기 시작했다.

 

민정이 운영하는 제과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카페를 겸한 것도 아니었기에 손님이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없었고, 대신 한쪽 벽면의 유리 케이스 안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디저트들이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본래 빵이 있었을 것 같은 판매대 위에는 갓 구워진 쿠키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나열되어 있었고, 옆으로 각종 구움 과자들이 식혀지고 있었다.

 

주택가의 작고 아담한, 지나치기는 쉽지만 한번 들르면 몇 번이고 다시 오게 되는 류의 제과점이었다. 이안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제과점이 집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행운일 것이다. 그리고… 이안은 과자를 입에 넣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런 과자를 판다면 반드시 다시 들리게 될 것이다. 설령 지구 반대편에 살더라도.

 

이안이 입안에 사르르 녹아드는 버터의 풍미를 감상하는 동안 서후는 계단을 반쯤 내려와 있었다. 그는 이안의 표정을 보고는 미소를 입에 올렸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민정 선생님 과자가 맛있죠?”

“앗, 네! 너무 맛있어서 내려오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네요.”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오늘은 엽귀의 서경이 아니라 심부름센터의 의뢰인으로 만나는 거니까요.”

 

서후는 살짝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긴장한 것이 티가 났나. 사실 이안은 서후와 귀문 내에서도 몇 번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의뢰인으로 연락해 왔을 때 조금 놀랐다.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친해질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던 터라 내심 기쁘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막상 연락해온 의뢰인들은 이안의 예상에서 거리가 있었다. 첫 번째 의뢰인은 이안이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긍이 갔다. 대법전 내 연애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다이스 쪽에서 충분히 이안을 알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흥미가 가서 발을 뻗어왔겠지. 

 

두 번째 의뢰인은 조금 묘했다. 엽귀의 누가 전해준 걸까? 순전히 일손이 필요해서 의뢰를 했다기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타케시는 명백히 이안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나온 사람 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겸사겸사 벌초를 시켜먹긴 했지만. 엽귀의 선배 중 한 명이 이안을 걱정해서 이제는 외부인이 된 타케시에게 연락을 한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세 번째 의뢰인은… 이안은 솔직히 그 일화가 웃기긴 했다. 그 뒤로 하린과 몇 번 마주쳤고, 설원에서 시원한 욕설을 하던 방문자는 온데간데없고 고상하고 우아한 원탁뿐이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인사를 해주는 것이 이안을 썩 나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쩌다 이 심부름센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인데, 이안은 하린이 말한 ‘리콰이드의 애인이기 때문에 눈여겨봤다’는 말을 믿기는 했다. 반만 믿는 것뿐이지. 그런 것 치고는 묘하게 우호적이었는데…

 

네 번째 의뢰인인 서후는 타케시와는 조금 다른 결로 긴장이 되었다. 이번이야말로 이안의 소문을 들은 서후가 그에게 한 마디를 해 주기 위해 불렀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그의 의뢰 내용을 생각하면 타케시처럼 일손이 필요해서는 아니…겠지? 이안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머릿속이 재빨리 가지런히 나열된 수십개의 아이싱 쿠키를 상영했다. 오늘의 이안은 예초기가 아니라 쿠키 틀이 될지도 몰랐다.

 

그 동안 서후는 이안이 쓸 앞치마와 모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몇 가지 물품을 건네고는 이안에게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전했다. 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너른 작업대와 오븐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 제가 청소하는 걸 좀 좋아해서요. 취미거든요.”

 

청소가 취미인 사람. 이안 내에서 서후에 대한 평가가 더 무시무시한 쪽으로 재빨리 바뀌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서후는 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부끄러운 건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청소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잖아요. 그냥 더러운 걸 지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리고 노력한 만큼 성과가 보이니까 성취감이 들죠. 그래서 제과제빵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빵 구울 때는 그것밖에 생각을 안 하니까.”

“정말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매번 청소할 시간 내는 것도 일일 텐데.”

“일과가 그다지 차 있지 않아서요. 지인도 별로 없고, 아…”

 

서후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아마도 이 서경 엽귀는 사람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노심초사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이안은 더욱 친근하게 말을 붙이려 노력했다.

 

“그럼 다른 일 할 시간이 많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아시잖아요, 임무가 시도때도 없이 내려오는 거.”

 

이안이 웃으며 말을 받자 서후는 또 살았다는 듯이 얼굴이 환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문에서 언제나 서후의 사무적인 얼굴만 보아 왔기에 이안은 내심 놀랐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안 안의 반듯한 엽귀이자 처형인인 서후의 이미지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두 사람은 손을 깨끗히 씻고는 베이킹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막상 본방에 들어가자 서후는 임무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한결 부드럽고 편안한 톤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안은 한참 생각하다가 그 목소리가 민정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민정의 제자답게 서후는 설명을 상세히 했으므로, 초심자인 이안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미리 준비한 상온의 버터와 슈가파우더. 핸드 믹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계란을 풀고 조금씩 넣으면서 섞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이안은 서후가 시범을 보이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음은 박력분. 체를 친 다음 반죽이 될 때까지 자르듯이 섞는다. 여기까지 마친 두 사람은 냉장고에 반죽을 휴지시키는 동안 잠시 쉬기로 했다. 서후는 2층에서 차를 내오겠다고 제안했고, 이안은 그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끝, 창가에서 햇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고요한 실내에서 빛먼지가 떠다녔다. 본래 가정집이었던 것 같은 2층에서 서후는 제법 그 공간이 익숙한 듯이 돌아다녔다. 금세 차와 흠집이 가 상품으로 내지 못한 것 같은 과자들이 준비되었다. 이안은 티세트를 차리는 것을 도우며 실례가 되지 않을 만큼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향긋한 차가 과자와 잘 어울렸다. 솔직히 과자가 압도적으로 맛있었지만. 따뜻한 차를 앞에 두자 서후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가 차를 한 입에 대고 입을 열었다.

 

“2층은 원래 민정 선생님 집이에요. 주택을 개조해서 1층을 가게로 쓰고 있는 거거든요.”

“아아… 저, 여기 올라와도 되는 건가요?”

 

이안의 농담을 받지 못한 서후는 진지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맨날 올라오고,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하니 선생님도 윗층을 써도 된다고 허락하셨거든요. 1층은 이야기 나눌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 말에 이안은 궁금증이 돋았다.

 

“정확히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아, 그… 후, 배…가 와서 베이킹을 도와준다고요.”

 

후배라는 말에 서후는 대단한 결례라도 저지르는 양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이안에게 서후는 존경하는 인물이자 까마득한 5계제 선배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었다. 이안은 얼굴을 밝혔다.

 

“저도 존경하는 선배가 의뢰해주셔서 기뻐요. 이렇게 대화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거든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에요?”

 

그 말에 서후는 얼굴을 확 붉혔다. 쑥스러운 듯이 그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아, 그건 연락을 받아서…”

 

핫, 이번에도 실수했다는 표정. 낭패감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이안은 서후에게 미안함을 느낌에 동시에 역시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죄를 지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후를 들들 볶을 수도 없었기에 이안은 그 말을 흘려들은 척을 했다.

 

“의뢰는 아이싱 쿠키 만드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이었죠? 일손이 부족한 건가요?”

“으음,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서후는 자신이 하는 말이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거짓말은 못 하는 엽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안 씨와 대화해보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었거든요.”

 

이안의 머릿속에서 다이스의 소문이 파다한 연애담 과 하린의 둘이 사귄다고 공지사항 때렸잖아? 발언이 스쳐 지나갔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 맥락인가. 그것 외에는 딱히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운명을 지웠다고 들었어요. 좋아하는 사람과의 운명점을, 엽귀에 남기 위해서요.”

 

그쪽이었구나. 이안은 서후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깨닫고 몸을 곧추 세웠다. 서후는 찻잔을 내려다본 채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그랬거든요. 아니, 아직도 그러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전에는 바로 지워도 좋으니까 한순간이라도 이어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먼저 운명을 이으려는 시도도 했고요.”

“... 그렇다면 지금은요?”

 

서후는 시선을 찻잔에 둔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붉은색을 띄는 찻물이 맑았다.

 

“중간에 크게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서, 모든 시도를 포기한 적이 있었어요. 친구랑도 싸웠고… 그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요.”

“네. 엽귀는 대법전의 감찰기관이잖아요.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죠. 아무리 아끼던 사람이어도, 가까운 사람이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면 처벌해야 해요. 그런 책무를 지고 있는 자가 감히 다른 누군가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꼼지락대는 손길에 찻잔의 찻물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한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줘 버리는 자신을 비관했어요. 잃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해버리고, 찢어야 할 걸 알면서도 매듭을 엮으니까요. 그 매듭이 나를 옥죄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죠.”

 

서후는 찻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듯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엽귀이기 전에 마법사에요. 그리고 우리를 인계에 묶어 간섭, 그러니까 교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인연 그 자체이죠.”

 

그 말을 마치고 서후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한쪽 눈이 깊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아마 의안일 것이다.

 

“이안 씨는 연인과 앵커를 맞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까 한참을 우물쭈물거렸던 인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임무가 관련되어 있을 때만큼 진중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단호함이 배어 있는 것은 어김 없는 귀문의 마법사였다. 이안은 드물게 잠시 말을 골랐다.

 

“앵커를 맺는 것은 그와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하지만 분명 운명이 없다고 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에요. 저는 그것 또한 사랑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엽귀의 마법사들은 대법전을 미워하기 때문에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시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이들을 처단하죠. 분명 개개인도 그럴 겁니다. 저는 연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운명을 맺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운명을 지웠던 거에요.”

 

서후는 확신에 찬 그 말에 잠시 놀란 듯 보였다. 성정이 섬세한 엽귀는 이안의 말을 한참 고려하다가 대답했다.

 

“이안 씨는 강하시네요. 그 관점 또한,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칼날의 방향의 차이라고 할까요. 저는 양날의 검이기에 검을 쥐면 손에 피가 배어들어옵니다. 이안 씨는 외날검이에요. 안정적이고 내구력이 좋지요. 그 검을 잘만 다룬다면 분명 당신의 앞길을 인도해 줄 겁니다.”

 

서후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기에, 이안은 따라 웃음을 걸었다. 이안은 서후가 사람을 칼날에 비유하는 것에서 그의 성정이 드러난다고 생각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양날검은 다루기 까다롭지만 알맞은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무엇보다 강력하잖아요. 저는 서후 씨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양날검을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조금 상처를 입었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알아요. 저 또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서후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듯 보였다. 그의 말에는 의심 한 치 없었고, 흐느낌도, 흩뿌려진 피도 없었다. 오직 따스한 생명과 약속의 노래만이 가득했다. 이안은 잠시 그것이 서후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약속이 깨어지고 노래가 끊기기 전의 그.



두 사람은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내고 아이싱을 준비했다. 밀대와 하트 모양의 쿠키커터가 서랍에서 나왔다. 오븐을 예열하고 서후를 열심히 따라해 반죽을 찍어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쿠키의 고소한 냄새가 주방 가득히 퍼졌다.

 

다음은 아이싱을 올릴 차례였다. 서후는 이안을 위해 초심자도 따라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쑤시개로 찍은 붉은색 식용색소는 흰색 아이싱에 나선을 그리며 섞였다. 이안은 그 문양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조심스레 쿠키 단면에 아이싱을 찍었다. 아기자기한 하트들이 금세 붉고 흰 곡선의 설탕옷을 입었고, 그 곡선은 사방으로 부딪치는 이안의 사랑과 조금 비슷하기도 했다.

 

그리 많은 분량을 많든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설탕이 굳은 쿠키를 이안은 신기하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있는 이안에게 서후가 말을 걸었다.

 

“몇 개 상자에 담아드릴까요?”

“네?”

 

이안은 두 사람이 만든 쿠키를 내려다보았다. 몇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말인 걸까?

 

“보수 말이에요. 이것보다 적당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서후의 말대로였다. 분명 이 이상의 보수는 없을 것이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서후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이싱 쿠키를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은 역시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던 걸까.

 

“저희 손님들도 많이들 그러시죠. 마음을 과자로 전달하는 거요. 달콤하고, 섬세한 것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닮았잖아요?”

“... 네, 꼭 그렇네요.”

 

이안은 서후를 마주 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존경하는 선배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그리고 이안 씨에게는, 제가 더 많이 깨달았어요.”

 

서후는 그렇게 말하며 과자를 한 상자에 담았다. 이안 역시 같은 것을 부탁할 참이었기에 서후가 능숙한 손길로 과자를 예쁜 종이 상자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포장을 마친 서후는 상자를 종이봉투에 담아 이안에게 건네며 그의 눈을 마주쳤다. 의안과 의안이 만났다.

 

“당신은 엽귀의 방문자입니다, 이안 허드슨. 그리고 엽귀는 당신과 같은 인재를 가져서 행운이에요.”

 

이안은 대답할까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한낮의 제과점은 조용했다.

 

“그리고 당신은, 훌륭한 제과점의 설탕공예가이자 좋은 사람이에요, 자서후 씨.”

 

서후는 평생 그 말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덴의 숲 속, 어느 날 누군가에게 보여 주었던 미소가 인계의 작은 제과점에서 다시 꽃피웠다.

 

 




네 번째 의뢰인: 엽귀의 서경, 〈흐느끼는 생명과 피의 노래〉 자서후

보수: 이안이 직접 만든 쿠키

한 줄 후기: 쑥스러웠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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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 이안인가 하는 애구나?”

 

시린 바람이 부는 겨울, 이안은 쇼핑몰 정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 방문자와 마주했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혹은 마음에 든 건지 너 딱 잘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둘의 나이는 비슷했으나 일단은 까마득한 대법전 상사였기에 이안은 존대를 택했다.

 

“네, 맞는데요?”

 

그러나 존대한다고 해서 말이 곱게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안은 이것이 의뢰라는 걸 되새기고는 심호흡을 했다. 상대방은 고객이었고, 자신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을이었다. 기억하자, 이안 허드슨. 상대는 5 계제 원탁이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나 봐, 보통 네가 먼저 나와 있어야 하거든.”

“예정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나왔는데, 더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이안은 애초에 이 방문자가 자신에게 뭘 원하고, 왜 그리 고까워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염화로 연락받았을 때는 평범한 것을 넘어서 되려 지나치게 수수한 의뢰 같았는데… 이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뢰는 기억하지? 우리 주연이한테 줄 선물을 고를 거야.”

“애인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아, 외전 출신인데 서경이거든? 곧 설날이니까.”

 

…한국에서는 설에 연인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보편적인가? 이안은 솔직히 그 분야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잠자코 수긍했다.

 

“청.탁.을 드려보자는 거지.”

“네에?”

 

안대를 안 차고 있어서 자신이 엽귀인 걸 잊은 건가? 아니면 5 계제쯤 되면 이렇게 선전포고도 하고 그러는 걸까? 아니다, 딱 봐도 자신을 놀리는 거였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런 마법사에게 걸려서. 질이 안 좋았다.

 

“설에는 보통 어떤 선물을 교환합니까?”

“으음, 스팸 세트, 홍삼, 샤워용품, 과일…이려나.”

 

전혀 연인과 교환할 만한 품목들이 아니었다. 이 중 특정 품목을 교환하는 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면 위의 목록은 전혀 참고가 되지 않았다. 이안이 내적 한숨을 쉬는 동안 두 사람은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연휴를 맞은 한국의 쇼핑몰은 휴일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설 특선이니, 새해맞이 세일이니 하는 매대들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소꿉친구인 에이미를 따라서 쇼핑 간 적이 몇 번 있었고, 이안은 그에게서 쇼핑 파트너로 제법 유능하다는 농담 섞인 평도 들었다. 하린은 에이미 또래니까 보는 물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안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전혀 아니었다. 이안은… 이게 몇 번째야, 일곱 번째 쇼핑백을 매장 내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쇼핑백은 각양각색의 매장의 것이라, 제각각 크고 작은 사이즈를 뽐내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무거웠다. 틀렸다. 하린은 애초에 주연의 선물을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냥 구실이고 자신을 쇼핑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을 작정이었다. 이젠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지 하린은 여덟 번째 쇼핑백을 이안에게 떠넘겼다.

 

“정말로 이런 게 주연 씨의 선물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됩니까?”

“그럼 내가 놀고만 있다는 소리야? 우리 주연이는 내가 제일 잘 알거든?”

 

아니다. 저건 백 퍼센트 즐기고 있는 거다. 이안은 소파에 널브러져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하린과 눈을 맞부딪쳤다. 하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잠자코 내 뜻에 휘둘리기만 하면 된다는 눈빛이었다. 원탁들을 다 저런가? 하지만 이안은 그 뜻에 따라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먼저 주연 씨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뭘 좋아하십니까?”

“음… 나?”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옷은 어떤 스타일로 입으십니까? 좋아하는 음식은 있으시고요?”

“캐주얼하게 운동화나, 사탕이나 과자 세트도 좋을 것 같아.”

“운동화 좋네요, 그걸로 합시다.”

 

이안은 이제 여덟 개가 된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일어나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린이 잰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뒤에서 뭔가 불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하린이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단은 따라 준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은 신발 브랜드가 모여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하린은 먼저 앞서 나가서 이 운동화가 신상이니, 이건 디자인이 별로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안은 그것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매장을 둘러보았다. 점원은 다른 일을 보느라 바빴는지 매장 안에 보이지 않았다. 재고를 쌓아두는 듯한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찬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을 기묘하게 생각한 이안은 하린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척 살금살금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자명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거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마법재액. 이안은 주위의 눈길을 크게 끌지 않으면서 하린을 이쪽으로 데려올 궁리를 했다.

 

[매장 뒤 창고에서 마법재액을 감지했어요. 눈치챈 사람은 없어요.]

 

숱한 현장 임무를 겪어 온 5계제 마법사답게 하린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염화를 보냈다.

 

[둘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그쪽으로 갈게. 운이 좋으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단장까지 회수할 수 있을 거야.]

 

벽에 전시된 운동화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하린이 이쪽으로 태연하게 걸어왔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창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매서운 서릿발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단장일까요.”

“습격이야, 조심해.”

 

하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펠바운드가 펼쳐졌다. 노을의 도시가 끝없이 펼쳐나가고, 인과를 묶는 리본이 세상에 축복을 내렸다. 스스로를 마법소녀라고 부르는 마법사들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직접 전투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독특한 아크로바틱과 눈앞에서 빠르게 곡선을 그리는 리본에 이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전의 시작이었다.






마법전은 눈 깜짝할 새에 끝난다. 하린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만한 단장을 홀로 처리했다는 것에 이안은 내심 놀랐지만 구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린도 그만큼 익숙해 보였고, 칭찬하는 것이 오히려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이안은 비슷하게 자존심 센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무사히 회수했다고 생각한 단장에서 시린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두 사람을 빨아들일 기세로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갔다.

 

“어, 하린-!”

 

말을 채 끝 마지치도 전에 이안은 마력의 급류에 끌려 들어갔다. 마도서를 점검하느라 한 발 뒤늦게 하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급류는 두 사람의 비명을 삼킨 채로 어딘가로 데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워터슬라이드가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엇이든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닿는 곳마다 손끝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먹먹한 채로 지르던 비명이 어느 새에 귀에 들리고, 두 사람은 폭신한 눈밭에 내팽겨졌다.

 

“이런 미친!”

 

이안이 가장 먼저 들은 것은 하린의 시원한 욕설이었다. 세상 온갖 고상한 척을 다 하던 것도 마법재액 앞에서는 별 수가 없나 보다. 

 

“주연이가 준 사탕이 깨졌잖아!”

 

욕을 하게 만든 건 마법재액이 아니라 작은 사탕이 겪은 불의의 사고였다. 하린이 뽀갈난 사탕을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고 애쓰는 동안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 끝부터 끝까지 온통 설원이었다. 눈은 무릎까지 푹푹 빠져 이동하는 데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마법으로 몸을 데울 수 있다는 정도일까. 당장 얼어 죽는 건 면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느냐였으니…

 

이안은 잠시 리콰이드에게 염화를 시도했다. 그리고는 대법전의 몇 마법사들에게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이 묵음이었다. 아무래도 특수한 이경인 것 같았다.

 

“염화가 안 돼요.”

“알아..! 어떡하지, 이다음에 주연이랑 데이트가 있는데, 걱정할 텐데…”

 

이안은 마력을 뻗어 주위를 조금 더 살펴보았다. 저 멀리 나무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이안이 그렇게 전하자, 하린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 보는 것을 제안했다.

 

“이 얼어 죽을 이경에도 출구는 있겠지.”

 

이안도 속으로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나 신발이 눈에 얼어붙기 전에 그보다 큰 문제가 발생했다. 땅이 우르릉,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동시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기도 힘든 언덕에서 눈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

 

이안은 하린의 손을 낚아채고 무작정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린은 이안이 앞서서 이끈 덕에 간신히 따라올 수 있었다.

 

“웬 산사태야!”

“몰라, 이경의 법칙을 어떻게 알아!”

“시아라면 금방 알아냈단 말이야!”

 

시아라는 사람이 누구인진 몰라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인 것 같다는, 지금 상황에서 대단히 쓸데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둔 이안은 눈의 파도가 멈출 때까지 달렸다. 다행히 땅의 울림은 점차 잦아들었고, 두 사람도 온몸이 눈밭에서 굴렀다는 점만 빼면 멀쩡했다. 그러니까, 한 다리가 파묻히거나 한 사람이 여섯 피트 아래 있거나, 하는 문제는 면했다는 뜻이었다.

 

“환영식이 한번 성대하네!”

 

하린은 금방 제 페이스를 되찾고는 눈을 털어내는 데 열중했다. 이안도 같은 행동을 하면서 말을 얹었다.

 

“단장이 독로였던 것 같지.”

“그래… 정식 분과회를 파견할만한 임무인데, 이건. 일단 우리는 탈출을 목표로 하자.”

“그게 좋겠다.”

 

둘은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다. 다행히도 이안이 보았던 나무에서 그렇게 멀리 달려오지는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하린이었다.

 

“.... 그런데 너 왜 반말해?”

“아… 정신없다 보니까 무심코. 존대로 돌아갈까?”

“아냐, 됐어. 다시 존대하기도 좀 그렇고, 어차피 나이도 비슷하잖아?”

 

이안이 처음부터 생각하던 것을 하린은 입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는 다리에 박차를 가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은 푹푹 들어갔다.

 

“나도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 리콰이드 던의 애인이 엽귀의 방문자라길래. 사실 그쪽에 좀 더 집중했으면 그래도 비슷한 이미지라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친구 중에 엽귀의 방문자가 있거든, 세진이라고.”

 

이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하린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너네 애인하고 내가 사이가 진짜 안 좋거든? 허구한 날 서궁에서 의견이 갈리고… 이젠 아마 베일 없어도 서로 알아볼걸? 하도 싸워서.”

 

이건 조금 신선한 이야기다. 다른 원탁에게서 원탁인 리콰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기에 이안은 귀를 쫑긋했다.

 

“근데 어느 날 그 양반이 바뀌었다는 거야. 애인도 생기고, 세상에 애인이 방문자. 오래 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는 거의 공지사항 때렸잖아? 둘이 사귄다고.”

 

이안은 목부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그래 봤자 말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좀 곯려 주고 싶었나 봐. 근데 보니까 너도 고생을 여간 할 상은 아닌 것 같다. 엽귀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휘어지느니 부러질 거 보면 걔도 좀 생각나고. 넌 또 어쩌다가 엽귀냐.”

 

주절거림과 넋두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이안은 잠자코 듣다가 하린의 말이 끝났다 여겨졌을 때 입을 떼었다.

 

“그럼 넌 또 어쩌다가 원탁의 방문자인데?”

“한 마디를 안 지네.”

 

하린이 픽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설원을 걸었다.

 

“너도 지금 방문자잖아. 그냥 그게 쭉 이어진 것뿐이야. 그리고… 난 내가 방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사람의 마음이란 거 말이지.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미인지 이안도 알 수 있었다. 분노와 충동, 온갖 날뛰는 감정들은 다스린다고 해서 쉽게 다스려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버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파도가 치듯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그리고 원탁은… 솔직히 말하는 건데, 네 애인처럼 고결한 이유로 들어간 건 아니야. 모두를 지킨다던가, 책임을 짊어진다던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 없었지. 들어가고 나서 달라지긴 했어도.”

 

하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듯 말을 쉬었다.

 

“세계 자체를 원망했던 것 같아, 나는. 일그러진 인과라고, 거기에서 발버둥 쳐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가장 효과적으로 발버둥 칠 수 있는 기관에 들어갔어. 영향력이 있는 기관.

 

“그런데 일그러진 건 세계가 아니었어. 나였지. 그걸 깨닫고 나서야 세계가 제대로 보이더라고. 그리고 원탁으로써 해야 할 일도.”

 

하린은 잠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너도 세상을 고통으로 보고 있니? 그렇다면, 그건 네가 고통에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안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이해했다는 것을 부드러운 미소로 대신 전달했다. 

 

“더 이상 고통에 있지 않게 된다면 세상을 고통으로 보지 않게 될까?”

“글쎄, 그다음은 모르지. 여전히 세상을 똑같이 볼 수도 있고, 조금 달리 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잖아? 너지.”

 

그 말에는 이안도 동의했다. 하린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동의했을지는 몰라도, 감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탁의 방문자인 거야?”

“그래. 그리고 서경 애인을 뒀다는 것도 잊지 마라? 내 업적 중에는 주연이랑 사귀는 것도 있거든?”

 

이번의 자랑에는 이안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공통점이네. 서경 애인을 둔 방문자.”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도중 어느새 나무는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사과나무였다. 그것을 본 하린은 잠시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보아하니 이 나무가 인계로 돌아가는 독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하린은 팔을 뻗어 사과 하나를 땄다.

 

“자, 보수야.”

“응? 보수는…”

“보수의 조건은 알고 있어. 이게 보수야. 보수 맞아.”

“....”

 

그렇다면야. 솔직히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을 파고들 수는 없는 법이고, 그렇다고 하린이 빈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안은 사과를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먹으라고 주는 것 아니야. 땅에 심어서 키워,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

“십 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도 오래 못 가겠다는 거야? 설마.”

 

장난스러운 도발에 이안이 씩 웃었다. 

 

“그래, 심어서 키울게. 싹이 트고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독로를 타고 인계로 돌아왔다. 도착한 곳은 바로 단장을 처음 수집한 창고였다. 서둘러 대법전에 연락을 한 뒤 급격히 지친 두 사람은 미적거리며 운동화를 골랐다. 하린은 이안의 센스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조언을 참고했고, 후속 분과회가 수습을 위해 달려오기 전까지 둘은 주연을 위한 운동화를 구입할 수 있었다.

 

“어? 세진아?”

 

분과회원 중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는지 하린이 앞으로 나섰다. 긴 민트색 머리를 하고 노란 의안을 낀, 이안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이안은 옆에서 목례를 했다.

 

“휘말렸다는 마법사가 너였어?”

“주연이 선물 사러 나왔다가 이경에 처박혔다니까. 살아 나와서 다행이지.”

 

세진은 그 뒤에 있는 이안을 눈여겨보듯 짧게 시선을 줬다.

 

“옆에 있는 분은 전에 얘기한?”

“응, 심부름 어쩌고 그거.”

“혼자가 아니었어서 다행이다.”

“햇병아리 마법사긴 했어도 도움은 됐지”

 

두 마법사는 잠시 이안에게 시선을 주다가 또 둘만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전 부치느니, 전부치느니, 시아에게 전을 가져다주느니, 상견례를 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안이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안은 예의 바른 에스코트처럼 리콰이드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있었다.

 

둘은 짧게 작별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아마 세진이 속한 분과회가 이경에 대해 간단한 조사를 맡은 것 같았다. 하린은 뭘 확인하듯이 이안을 보았다.

 

“바로 대법전으로 돌아갈 거야? 갈 거면 같이 가게.”

“아, 봐 둔 게 있어서 그것 좀 사고.”

“그래. 보수 잘 챙기고, 솔직히 의문투성이인 보수일 테니까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한번 도와줄게. 애인이랑 행복해라.”

“너도.”

 

씩 웃어주는 이안을 보며 하린은 제 갈길로 떠났다.  이안도 잠시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리콰이드의 집무실로 가는 길은 익숙하다 못해 편안했다. 창 밖에 군데군데 눈이 긴, 맑은 날이었다. 미리 들르겠다고 연락을 했으니 리콰이드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들어와’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문을 열면서 이안은 앞머리를 털었다.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전에 얘기했던 DVD, 구했어! 예전 영화라 시간이 좀 걸렸지.”

 

리콰이드는 집무실에 앉은 채로 허리를 펴 이안 쪽으로 시선을 줬다.

 

“잘도 그런 걸 구해 오는군. 주변에 골동품점이라도 있나?”

“아, 그러고 보니…”

 

하린과 쇼핑을 하는 도중에 눈에 걸렸던 물건이 있다. 이안은 주섬주섬 백팩을 풀어서 그것을 꺼냈다. 한 세트에 만 얼마짜리 하던 실링 왁스 세트였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런 게 있더라고. 당신도 해 본 적이 있어?”

 

리콰이드는 잠시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미간을 지푸리다가 인장이 눈에 들어오자 펜을 내려놓으며 후, 하고 웃었다. 

 

“취미인가? 꽤 고상한데.”

“... 그런 거야? 뭔가, 앤틱 한 걸 구경하고 있으니까 추천받아서…”

“앤틱 한 거긴 하지. 요즘 취미로 맞춰서 개량된 모양이긴 하지만. 흠…”

 

리콰이드는 어느새 이안 근처까지 걸어와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소파에 앉아 성냥을 그었다. 실링 왁스가 데워지면서 녹아 뚝, 뚝 떨어졌다. 그 조금 옆에는 봉투에 고이 담긴 편지까지도.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제가 봐도 어설픈 손동작이었다. 리콰이드는 편지 한 번 보고, 녹아든 왁스를 한 번 보고, 인장까지 한 번 보고,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한 손을 까딱이더니 손때가 묻은 금속의 낡은 인장을 하나 불러왔다. 그것은 책상에서 손으로 슥 날아와 스치더니 곧 이안 옆에 내려앉았다.

 

“...?”

“다 녹였으면, 편지봉투 입구 쪽으로 떨어트려야지.”

 

어리둥절한 이안의 옆에서 리콰이드가 편지봉투 중앙 쪽을 마른 손으로 톡 톡 가리켰다. 

 

“아, 응.”

 

이안이 입구에 왁스를 녹인다고 열중하는 동안 리콰이드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걸 써라.”

 

자신 옆에 있는 금속의 인장을 본 이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당신이 쓰던 것 아니야?”

“내가 썼던 거지. 실링을 할 거라면, 이제 그걸 써라.”

 

이안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도 도장을 공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심조심 물었다.

 

“내가… 써도 되는 거야?”

“그래.”

 

끝이 떨린 이안의 목소리에 리콰이드가 답했다. 그는 옆에 앉아서 소파에 팔을 올리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부드러웠다. 이안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 조심스레 인장을 찍었다.

 

꾸욱, 누르고 난 뒤 입김을 몇 번 불어 식힌 다음, 이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편지를 리콰이드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는 최대한 진중한 눈빛을 쥐어짰다.

 

“나 없을 때 읽어.”

 

리콰이드는 먼 옛날 옛적, 자신의 가문 인장이 찍힌, 러브레터일 게 분명한 편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안 되고?”

“안 돼.”

 

이안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목 부근이 아직 홧홧했다.

 

“집에 돌아가서 읽어.”

“단호한데.”

 

리콰이드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마른 손으로 편지를 받았다. 이안은 품 속에 넣어둔, 하린이 건네준 사과를 생각했다. 사과가 싹을 틔워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는 아마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 파도가 바위를 부술 때까지의 시간 또한.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되겠지.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이안은 하린에게 들은 그의 서경 애인과, 원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이안은 자신의 연인에게 부끄러울 만큼 마음이 담긴 러브레터를 전하고 있었다.

 


세 번째 의뢰인: 원탁의 방문자, 〈침잠하는 우리의 비상〉 이하린

보수: 설원의 사과 한 알.

한 줄 후기: 생각보다 괜찮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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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자망자(好者亡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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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qDBtn-1VqY

 

“하아아아….”

“넌 내 사무실 바닥 꺼트리려고 들어왔냐?”

 

츠요시가 삼백십육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은 옆에서 혀를 쯧쯧 차면서도 츠요시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츠요시는 드러누워 있던 사무실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하다가 다시 철푸덕 엎어졌다.

 

“흐어어어….”

“계속 방해하면 애들 불러서 내쫓는다.”

“너무해요! 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몇 시간째 내 소파에 앉아서는 세상이 끝난 마냥 음침하게 앉아 있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거냐? 하루이틀도 아니고.”

“저 원래 이런 거 아시잖아요. 알고 팀에 데려온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쇼파 좀 빌릴게요오…”

“에휴, 내 팔자야.”

 

다시 대장이 타자를 치는 속도가 빨라졌다. 츠요시는 볼을 누르는 싸구려 가죽의 감촉에 얼굴을 꾹 꾹 문대다가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왜, 육개장 해 준다고 말했잖아.”

“육개장이 문제가 아니라고요…”

“얼씨구, 그럼 또 뭐가 문제야.”

 

어느새 대장이 자판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껸 채로 츠요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판이 깔리자 츠요시는 되려 쿠션 뒤로 머리를 숨기며 한숨을 쉬었다.

 

“저 아시잖아요, 맨날 하는 그거…”

“....”

“또…”

“... 죽었냐?”

“네에에….”

“너도 참 기구하다.”

 

대장의 한숨이 쿠션을 비집고 들렸다. 츠요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요! 제가 웃기시죠 지금! 전 진심이었단 말이에요!”

“그래, 그래. 내가 너 진심인 거 모르겠냐. 넌 지난 연인들한테 다 진심이라고 하잖아.”

“그게 아니라, 진짜 좋아했다고요…”

“얼굴을?”

“그 사람을요!”

 

대장은 등받이에 쭉 기대서 츠요시를 멀찍이 가늠했다.

 

“너 그때 좀 이상한데 싶긴 했다. 같이 술 마셔줘?”

“안 마셔요…”

 

그 말에 대장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평소의 츠요시라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하는 비명을 질렀겠지만 지금은 등을 보이고 있는 데다가 추레하게 소파에 엎어져 있었다.

 

“술 안 마실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건데…”

“....”

“괜찮냐?”

“몰라요… 시체라도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츠요시는 소파와 쿠션 사이 급조된 어둠 속에서 그날의 충격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화살이 심장을 꿰뚫을 때 그는 화살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살해한 토요코를 원망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충격만이 눈앞을 덮었고 다리에 힘을 풀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했다. 리더 자리 간의 분쟁. 죽지 않더라도 험한 꼴을 보았을 것이며, H.E.A. 에게 체포되었더라도 사형에 처해질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한 번쯤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투가 끝나고 부축한 다음에 번호를 주면서 밥 한 번 먹자던가, 영화 한 번 보자던가… 그런 볼품없는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그가 그 진심에 응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몇십 번이고 되풀이한 장면.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보았으면서도 츠요시는 자신을 의심했고, 또 의심하고 싶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신을 좋아하는 나에게 기대해보고 싶다고 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이미 전했을지도 몰라. 얼이 빠져 있는 나머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를 잊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잠시 만난 사람에게 누가 관심을 두겠는가? 그리고 리베리온즈의 내부 알력 다툼에 죽은 그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미련한 자신이나 여기서 이러고 앉았지.

 

…한 달? 두 달이면 잊을까? 츠요시는 멍하니 생각했다. 대장의 말대로 술을 마시면 잊기 조금 더 쉬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제정신의 츠요시는 제정신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랑의 후폭풍을 맞고 있었다.

 

아무렴 어때.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다. 마지막도 아닐 것 같고… 입안이 씁쓸했다. 다음 동창회 전까지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겠지. 그는 온 세상의 고난을 다 끌어모아 삼백이십 번째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아……”

“시체 찾는 거 도와줘?”

“아니에요….”

 

제법 호의가 담긴 대장의 제안에도 츠요시는 머리를 쿠션에 쿵 쿵하고 두드렸다. 대장은 혀를 쯧 하고 찬 다음 다시 컴퓨터로 돌아갔다. 자판 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잔잔히 울렸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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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인정해야 했다. 고작 한 번의 의뢰로 베테랑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 내에서도 상상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켜놓은 모양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예초기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수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허리를 펴서 아래를 바라보니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은 섬이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울릉도에서 이안은 벌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상황에 처했느냐 하면, 이안은 자신밖에 탓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이안 허드슨의 심부름센터.  분명히 그 글자를 쓴 사람은 자신이었고 동시에 어떤 궂은 의뢰가 들어와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다짐이 필요한 날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파악한 상황에 어이없어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목 뒤에서는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안은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다시 한 번 닦았다. 챙겨준 벌초용 밀짚모자가 아니었더라면 이안은 이미 머리에서 달걀 프라이라도 굽고 있었을지 몰랐다. 다시 허리를 숙여 몇 번 더 예초기를 돌리자 금세 정적이 시끄러운 모터 소리에 묻혔다.

 

“어이!”

 

아래서 이안을 부르는 소리에 이안은 예초기를 끄고 허리를 폈다.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곧 열여덟이 되지만, 허리가 안쪽으로 굽어 있는 느낌에 이안은 밑의 사람이 언덕을 올라올 때까지 허리를 곧추 펴는 데 열중했다. 올라온 남자는 이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했는데? 어때, 할만 해?”

“할 만 한, 것 같아요.”

 

단어와 단어 사이 공백은 웃음 섞인 한숨이었다. 타케시는 알만하다는 듯이 이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랫쪽도 거의 다 정리했어. 고생 많았다. 이제 마무리만 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네!”

 

이안은 낫을 들고 벌초 모자를 쓴 전 엽귀, 노가와 타케시를 바라보았다. 엽귀 시절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던 터라 이안은 타케시가 심부름센터로 의뢰를 해 왔을 때 그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보호장비를 차고 벌초하는 모습을 본 결과, 그 이미지는 거의 못 쓰게 된 지경이었다.

 

이안은 낫이 아니라 창을, 편한 옷과 보호장비가 아니라 제복을 입은 타케시를 상상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도무지 불가능했다. 이미 자신 안에서 타케시는 엽귀가 아닌 벌초 선배였다.

 

“그런데 처음 치고는 꽤 잘 하는데? 해 본 적 있나?”

“용돈벌이로 잔디깎이를 좀 했거든요.”

 

정말로 가지런히 자란 잔디를 깎는 일이었지 밀림을 초원으로 만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경력으로 인정된다는 건지, 타케시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적임자를 골랐구만.”

“하하, 감사해요.”

 

정말? 정말 이 인선이 최선인가? 이안은 아방궁 셋과 임무에 배정되었을 때 원탁에게 보냈던 시선을 애꿎은 예초기에게 보냈다. 하지만 타케시의 말대로 완전히 헤매거나, 적어도 다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타케시의 말에 조금은 신뢰를 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이 적당히 수풀과의 싸움을 끝내고 마을로 내려왔을 때, 마을은 이미 점심상을 차리는 데 한창이었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쌀밥과 수육에는 이안도 자신이 얼마나 허기져 있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곧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기를 들었다. 몇몇 인물이 시큼한 흰색 음료를 권했으나 타케시에 의해 적당히 제지되었고, 이안은 궁금했지만 예의에 어긋날까 걱정하여 더 묻지는 않았다.

 

점심상을 깨끗하게 비우자 타케시는 이안에게 소화를 시킬 겸 섬 외곽을 걷자고 제안했다. 그제야 이안은 노가와 타케시, 전 서경엽귀이자 현 서경학원의 정확한 의뢰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사시는 울릉도의 벌초를 도와달라고 하셨지?’

 

그러고 보니 타케시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상당히 의외인 의뢰였고, 잔디 깎기 정도로 생각한 자신은 타케시가 온갖 보호장비와 모자를 들어 올렸을 때 무언가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리도, 팔도, 다리도 내일 무시무시한 근육통을 예고하는 지금은 웃어넘길 일이지만.

 

두 사람은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마을길을 걸었다. 거세다고 할 정도의 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은 큰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내가 전 엽귀였다는 건 들은 적이 있지?”

 

이안은 엽귀 내부에서 들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십여 년 전 엽귀에 들어와서 착실하게 임무를 하다, 돌연 한 임무 이후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학원으로 이직했다는 마법사. 그와 같이 엽귀는 성실하게 임무를 하다가도 갑자기 떠나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고 들었다.

 

“〈대의멸친의 눈먼 창〉이셨다고.”

“컥! 콜록! 콜록!”

 

마침 물을 들이켜던 타케시가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이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지 되짚었다.

 

“그래, 전에는 그 이름으로 불렸지. 아버지를 모시면서도 참 불효자였어.”

 

마법명의 뜻은 알고 있었기에 이안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엽귀를 나온 건 내 신념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마법을 악용하는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내 의지가 꺾인 것도 아니고.”

 

타케시는 한 곳에 멈춰 서서 시야 아래애 펼쳐진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은 파도가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쳐 희게 부서졌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고 나서야 타케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하나뿐인 아버지를 더 늦기 전에 모시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용종이신 아버지는 친아들도 아니었던 우리 형제를 거두어 주셨어. 그리고 동생이 죽고, 그 일이 있고 나서도…”

 

타케시는 바다의 끝을 가늠하듯이 눈가를 좁혔다.

 

“언제나 나를 한결같이 대해 주셨지. 철이 들 때가 된 거야, 나도. 그래서 엽귀를 떠난 거다.”

 

그 말을 마치고 난 다음 타케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다른 소중한 것이 생겨서 엽귀를 나오는 것은 절대 비겁한 행동이 아니야. 나는 내가 엽귀로 도망쳤음을 깨닫고 내 눈을 돌려받았다. 그러니 잘 들어둬라, 이안. 너는 아직 가능성이 많아. 내 이야기를 기억해 두도록 해.”

 

이안은 타케시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케시가 한 말은 자신을 향한 것임에 동시에 스스로에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안은 수긍했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한 말을 수용했다. 이안의 눈빛을 읽은 타케시가 가볍게 씩 웃었다.

 

“어린 방문자가 엽귀에 들어왔다고 해서 걱정했더니, 걱정할 게 하나 없었구만. 그러니 너무 남의 이야기를 담아 듣지 말거라. 내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일 뿐이니까.”

 

타케시는 손을 뻗어 이안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머리를 흩트려놓았다. 이안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곧 그가 품 안에서 안대 하나를 꺼내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안대를 쓰지 않는구나. 하지만 나는 아니었지. 이 안대는 내가 엽귀였을 적 사용하던 것이다.”

“... 소중한 물건이겠습니다.”

“응, 그렇지.”

 

이안은 조심스레 타케시에게서 안대를 받아 들었다. 부드러운 검은 천은 좋은 재질이었고, 피부에 까슬하지 않았다. 이안은 조심스레 안대로 의안을 감쌌다. 타케시는 끈의 위치를 두어 번 조정해 주고는 물러나서 모습을 관찰했다.

 

“감사합니다. 보관해 두고 싶으실 물건일 텐데…”

“괜찮아. 이제는 과거가 된 일이기도 하고, 그것보다 소중한 건 충분히 많이 있어. 게다가 네 보수에 대해 듣자마자 딱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타케시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씩 웃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건 생각보다 어색했다. 그래서 리키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손길도 평소처럼 확신에 찬, 혹은 성급한 것이 아니라 여백에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언제나처럼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이안은 쭈뼛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책상 앞에서 리콰이드가 서류의 산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안은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하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리콰이드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생각한 순간, 이안은 고개를 든 리콰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른쪽 안경알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에 안대를 차고 있었다. 이안은 입 안에 미처 사라지지 못한 남은 단어들을 우물거렸다.

 

"아… 아직 일 많이 남았어?"

"거의 다 끝냈다. 오겠다고 한 시간보다 조금 이른데."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이안은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릴 궁리를 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입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안대를 했군."

 

그러나 리콰이드가 조금 더 빨랐다. 이안은 지나치게 가까운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리콰이드는 팔을 들어 이안의 한쪽 볼을 손에 담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검은 안대의 끝자락을 매만졌다.

 

"무슨 일이 있나?"

"그냥, 선물 받아서… 별로야?"

“선물?”

 

어색한 건지… 설레는 건지. 속이 울렁거릴 듯 천천히 식었다. 감추기 위해 이안은 평소 자신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눈알을 도로록 굴려 아직 닿아있던 리콰이드의 손길을 보았다.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삐죽이는 투로 나왔다. 이래서는 칭찬을 듣고 싶어 안달 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안은 감정에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리콰이드는 조금 우습다는 듯이 눈을 휘었다. 픽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하며 내리는 리콰이드의 손을 이안이 잡아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두 손이 맞닿아 온기가 느껴졌다. 이안은 리콰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번째 손가락의 금속이 체온으로 미지근했다. 그 복잡한 음각을 이안의 손가락이 한번 훑었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리콰이드가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하며, 이안은 그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반지는 차갑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두려우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불안은 용기의 색을 띄었고, 이안은 신중하게 보라색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안대를 쓴 눈이 답답하지 않았다.

 

 

느슨한 햇살이 들어오던 날, 엽귀는 원탁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번째 의뢰인: 학원의 서경, 〈송양지인의 곧은 창〉 노가와 타케시.

보수: 타케시가 엽귀일 적 사용하던 안대.

한 줄 후기: 다음번에도 부탁하고 싶을 정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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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이안은 자신이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크레도의 탑 입구에서 열세 살쯤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칼에 노란 눈을 한 소녀가 튀어나왔을 때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소녀는 탐색하듯 이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샛노란 눈이 마주치자 이안은 그 눈의 동공이 세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연락하신 분 맞으시죠?”

 

기묘한 탐색을 끝내기 위해 이안은 먼저 입을 열었다. 때마침 이안의 바로 앞에 서 있던 소녀는 입꼬리를 올려 히죽, 하고 웃었다. 눈가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번뜩였다.

 

“네, 제가 맞아요. 다이스라고 말했었죠?”

 

이제 정상인처럼 굴기로 마음먹었는지 다이스는 무릎 위까지 오는 붉은 원피스를 툭툭 털었다. 이안은 그 몸눌림이 몸에 밴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본래의 움직임은 그것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깨어 놓는 것은 다이스의 다음 말이었다.

 

“그럼 저 이제 돌아가도 돼요?”

“네? 그럼 의뢰는…”

 

이안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펑! 소리와 함께 작은 연기가 일었다. 몇 번 기침하는 사이 시야가 돌아왔고, 눈앞에는 노란 눈을 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만이 서 있었다.

 

“역시 이게 편하다니까요! 초면부터 이 모습이면 못 알아볼 게 뻔하니까 신경써준 거라구요.”

“원래 고양이셨군요. 이제 한눈에 알아보겠어요.”

 

다이스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검은 꼬리로 이안의 다리를 가볍게 스쳤다.

 

“저도 멀리서부터 누가 그 유명한 이안 허드슨인지 알아보겠던데요?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길 줄이야!”

 

이안이 머쓱한 기분에 뒷목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다이스는 재빨리 명함을 꺼냈다.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이안 허드슨 심부름센터. 단, 마법을 악용한다고 판단한 것은 거절할 수… 아무튼. 시키는 건 다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쩐지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이죠! 그건 걱정 말라구요. 그럼 첫 번째 의뢰!”

“죄송하지만 한 분당 한 의뢰만 받고 있습니다.”

“떼잉쯧… 그럼 이건 그냥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쳐요. 천애로써, 저도 소문이 파다한 당신의 연애담을 듣고 싶은데요?”

 

이안은 목부터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떠 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이는 그다지 없었을뿐더러 자주 겪는다고 해서 덜 부끄러워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길고 상세한 버전을 듣고 싶으세요, 아니면 짧은 버전을 듣고 싶으세요?”

“꺄아아!”

 

고민이 무색하게 다이스에게는 그 대답만으로 충분한 건지 작고 귀여운 앞발로 이안의 다리를 마구 응징했다. 장난스럽게 때리는 것을 알면서도 슬슬 아프기 시작한 이안은 다이스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다이스는 얌전히 안기다가 이안이 안정감 있게 몸을 받치자 어깨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왜 때리시는 건가요?”

“이건 엄청 좋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 대가예요! 세상에, 대법전은 아직 살아있었군요!”

 

라투나 님께서 들으셨다면 주무시다가도 깨어났을 발언이기에 이안은 그가 환몽전 깊은 곳에 잠들어 계심에 짧게 감사했다.

 

“연애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물론이죠! 저는 사랑을 사랑하는 천애, 〈단잠을 지키는 나이트워커〉니까요.”

 

남의 사랑에 푹 빠져 사는 천애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하여간 천애들은 별난 사람이 많다는 이안의 선입견을 한 번 더 강화해주는 계기만 되었다. 품에 안긴 다이스를 내려다보자 다이스는 뭔가 궁금한 게 있어요? 란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까만 밤이 팔 안에 들려서 동그란 별 두 개만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물렁물렁하고 뜨뜻한 밤이었지만.

 

“그래서 의뢰하고 싶으신 건 뭔가요?”

 

두 사람은 다이스의 지시에 따라 크레도의 탑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한산했고, 이따금 천애를 안은 엽귀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곧 자신의 바쁜 일로 돌아갔다. 이안의 구두 소리만 넓은 홀에 울렸다. 다이스가 꼬리나 앞발, 말, 혹은 정말 귀찮을 때는 앩, 앵. 하는 방향으로 도착한 곳은 한 천애가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다이스는 여기서 멈추라는 듯 꼬리를 한번 살랑이고는 이안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온기에 이안은 조금 허전해졌다.

 

“바로 여기에요, 여기.” 

 

다이스가 사납게 속삭였지만 이안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이스가 목소리를 낮추기 원하는 것 같았기에 자신도 속삭였다. 이런 것은 그냥 염화로 하면 안 되는 걸까?

 

“여기에서 뭘 하면 될까요?”

“여기에서 일하시는 천애분, 최근 예언 적중률이 어마어마하게 떨어지고 있거든요!”

 

그 말에 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예언을 업으로 삼는 천애의 예언 적중률이 떨어진다면 큰일 아닌가.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다이스는 엄청나게 즐거운 남의 비밀을 이야기하듯 히죽히죽 댔다.

 

“그럼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요? 예언 적중률이 떨어진다면 천애로써 일하기 힘들 텐데요.”

 

이 작은 고양이는 뭘 의뢰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 내려다보던 이안에게 다이스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오늘의 의뢰는, 두 사람을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작은 몸에서 나온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이안은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가 말인가요? 그런 문제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요.”

“대법전을 휩쓴 연애담의 주인공답군요! 정론이에요! 하지만 이래로 두다가는 천애에서 잘리고 말 뿐이에요. 그러기 전에 ‘나, 당신을 사랑해서라면 백수라도 될 수 있어!’ 하고 아름답게 맺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대단히 극화된 시나리오였지만 이안도 다이스가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짐작하건대 이번 연애담의 두 주인공은 각자의 위치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았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의뢰를 수긍하기로 했다. 대법전에서도 예언 적중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질 마법사가 천애에 눌러 붙어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 전문가 천애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추천하시나요?”

 

다이스는 그 말에 기분 좋아진 것인지 이안 발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고전 중의 고전, 러브레터죠!”.

 

이안은 잠시 후에 입을 떼었다.

 

“그건 본인이 적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대필한다면 금방 들킬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천애분, 사랑하는 상대분한테 너무너무 보내고 싶었지만 보내지 못했던 연애편지를 몇 통이나 써 두셨거든요! 우리는 그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거예요!”

 

다이스의 목소리가 신이 나 새된 소리가 들어갔다. 이제 두 발로 폴짝폴짝 뛰며 이안의 바지를 긁는 고양이를 이안은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럼… 그 편지를 훔쳐서, 상대분께 전달하는 것이 의뢰인 가요?”

“빙고!”

 

아쉽게도 다이스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도리어 이안의 바지를 손톱으로 틑어 그를 끌고 가려고 애썼으나, 얼마 전에 깎은 것인지 손톱은 뭉툭했다. 성이 난 다이스는 애꿎은 이안을 앞발로 한 대 치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안에 아무도 없으신 것 맞죠?”

“스케줄 다 확인했어요. 마침 다들 임무에 나가 있거든요! 예언은 맞을지 몰라, 후후후!”

 

한숨을 쉬며 이안이 문을 열자 다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안이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건가.

 

이안이 이국적인 양식으로 꾸며진 실내를 둘러보는 동안 다이스는 예상 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는 듯이 재빨리 몇 곳을 뒤졌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찾은 곳에 잠금이 걸려 있자 이안에게 재촉했다.

 

“...”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이안의 등에 잠시 식은땀이 흘렀다. 이안은 철사를 몇 번 움직여 쉽게 잠금을 땄다. 안에는 다이스의 예상대로 편지 몇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편지통이 온통 분홍색이며 하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내용은 그렇게 의심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느 분께 전달드려야 하는지 아시나요?”

“물론이죠! 저는 준비된 사랑꾼이랍니다?”

 

그 단어의 조합, 그렇게 쓰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은 이 천애에게 익숙해지기로 했다. 아직 반나절이 남았다. 아주 긴 반나절이 될 것 같았지만 말이다. 

 

우선 두 사람은 다이스가 알아온 주소를 편지에 쓰기로 했다. 다이스가 소녀의 외형으로 변해 펜으로 휘갈긴 글씨체는 답지 않게 고풍스러워 이안도 놀랄 정도였다. 펜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봉투 전체에 글씨를 덮었다.

 

“자, 이제 이걸 우체통에 넣으면 돼요! 그럼 시간이 전달해 줄 거예요.”

“인계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물론이죠! 본래 모습이 고양이긴 해도, 방문자라구요.”

 

두 사람은 한 도서관을 통해 인계로 나갔다. 도서관 옆 우체국으로 가는 길이 금방이었다. 걷던 도중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떼었다.

 

“연애담에 대해 물어보셨으니 저도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하세요, 하세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이안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 본모습이 고양이신데 어째서 방문자로 각성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다이스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이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 무례한 질문이었죠? 죄송해요. 아무래도 방문자 분들은 대개 사람의 모습을 하고 계셔서 저도 모르게 궁금해졌네요. 그래도 여쭙는 게 아니었는데.. ”

 

이안은 몸체가 살짝 차도 쪽으로 밀려나는 것으로 다이스가 자신을 홱 밀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 돌아간 몸이 다이스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안은 눈을 껌뻑거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다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저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요!”

 

차도 뒤에서 자동차 몇 대가 쌩하니 지나갈 때까지 이안은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곧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다이스는 우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네요, 제가 당연한 걸 잊었어요. 다이스 씨가 방문자가 아니라면, 누가 방문자겠어요?”

“그렇죠? 한번 더 말해봐요! 제가 뭘 가지고 있다고요?”

 

두 사람은 제법 화기애애해진 채로 편지들에 우표를 붙이고는 우체통에 넣었다. 다이스는 이안의 반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 이야기를 하느라 둘은 한참을 보냈다. 어느 정도 의뢰가 마무리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보수로 생각해두신 건 있으신가요?”

“아, 상당히 독특한 요구였죠? 그게…”

 

다이스는 곰곰 떠올리듯이 검지를 턱 끝에 짚었다 노란 눈의 동공이 낮보다 풀어져 있었다.

 

“음, 그거라면 보수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는 제 손에서 떠나보내고 싶은 물건이기도 하고요.”

 

고양이의 모습으로 방향을 지시한 아까와는 다르게 다이스는 앞장서 걸었다. 이안은 그를 따르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림자가 짙게 깔렸고, 붉은 햇빛이 모든 것을 물들일 때 그들이 멈춰 선 장소는 공동묘지였다. 다이스는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꽃다발을 들고 어느 묘 앞에 멈춰 섰다. 이안은 반 발짜국 뒤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여기거든요, 마리아의 묘가.”

 

딱히 이안에게 말을 거는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이안은 잠자코 뒤에서 서 있었다. 누가 보았더라면 기묘한 풍경이라고 했을 것이다. 묘 앞에 선 붉은 원피스의 소녀, 그리고 그 뒤에 선 청소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잠시 흘렀다.

 

“제가 각성할 때 같이 있어준 사람이에요. 각성하기 전에도, 길고양이였던 저를 주워서 키워줬구요.”

 

다이스는 여전히 묘지만을 바라본 채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제게 사람의 마음을 알려줬어요. 손해를 봐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손을 탄 것은 전부 사랑해버리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전 일부러 집에 많이 안 있었어요. 언젠가 이 사람이 날 버리면 난 정말로 갈 곳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잠시 이야기를 멈춘 다이스는 몸을 숙여 쭈그려 앉으면서 묘 옆에 흰 꽃다발을 두었다.

 

“조금 더 같이 있을 걸 그랬어요. 언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을 텐데…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해줄 걸 그랬어요.”

 

다이스는 잠시 그를 상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게 너무 다행이에요. 그래서 마리아가 잊혀지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렇게 기억되어서 다행이에요. 지금도 그 집에는 마리아의 사진이 있어요. 난롯가 옆에 잘 보이는 곳에요. 늙어서 쭈글쭈글한 사진이지만.”

 

다이스는 폴짝 뛰듯 일어나서 마침내 이안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 지금은 죽었거든요.”

 

이안은 잠시 다이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이안이 겪어본 적 없는 슬픔이었고,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야 알게 될 슬픔이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눈길로 다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분도 당신을 만나 다행이라고 여기셨을 거에요.”

 

“... 그랬을까요?”

 

다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레도의 탑에서 본 근질근질한 미소도 아니었고, 우체통 앞의 후련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이의 미소였다.

 

“자, 여기요. 이걸 가져가요. 보수예요.”

 

다이스는 품에서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집중하고 나서야 이안은 그것이 마도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는 이 마도서 때문에 각성했어요. 마리아의 다락방에 있었거든요. 이제는 보내줄래요. 이제는 내 손에 들고 있지 않을래요.”

 

이안은 말과 말 사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다이스가 건네는 수첩은 그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의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돌려받기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다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 물건이 또 어딘가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에게는 이미 마리아를 추억할 물건이 많이 있으니까요.”

 

잠시 다이스를 바라보던 이안은 그 말에 수긍했다. 그도 그 나름의 장고가 있었을 것이다. 위로의 말을 고민하던 이안에게 다이스가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죽상을 하지 마요. 사랑을 하고 있다면서요! 전력으로 달려요, 이안!”

 

내려다본 다이스는 씩 웃고 있었다. 그 말에는 이안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리아라는 사람이 다이스에게 져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면서 이안도 환하게 웃었다.

 

“네!”

 

 

 




첫 번째 의뢰인: 천애의 방문자, 〈단잠을 지키는 나이트워커~야간경비원~〉 다이스.

보수: 다이스를 각성시킨 마도서.

한 줄 후기: 직접 발로 걷지 않아도 안아서 옮겨준다는 점이 편안했어요!

 

이안 허드슨과 수상한 우체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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