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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은막
2024. 6. 4.

04

 

세월은 무심하게도 흘러, 어느덧 이안이 하렘에 발을 들인지도 반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하렘은 초창기의 북적한 분위기에서 차차 질서가 잡히는 모양새였다. 새로 들어온 하툰들도 자신의 자리를 잡아 갔다. 이안으로 말하자면 지위도 예법도 전부 주먹구구식이었던 예전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한평생 황실 내에 몸담고 있던 사람으로써 조금이나마 질서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큰 불만 없이 수긍했다.

 

다만 신경쓰이는 것이라면 어머니가 보내시는 편지의 내용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타국에서 고생하고 있을 자신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행간 곳곳에 피로의 흔적이 보였다. 다 쓰려져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지탱하려는 지도자의 고뇌. 이안의 입안이 씁쓸했다. 만일 이교도들의 말대로 제국이 정말로 세계를 멸망시킨다면, 적어도 제국의 중심에 선 수도까지 도외시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하렘은 안전하지 않을까. 어머니가 남몰래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안 또한 이 사태를 막을 해답은 제국의 수도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래서 이안은 최대한 밝은 내용으로 편지에 답했다. 다른 하툰들이 다들 잘 해준다던가, 음식이 입에 잘 맞는다던가.

 

그러나 이안의 본질은 첩자였다. 그리고 첩자가 교환하는 편지는 본질적으로 정보통이었다. 눈에 띄어도 책 잡힐 일 없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 그러니 이안도 어머니께서 보내시는 편지의 행간을 읽을 줄 알았다. 이안은 편지의 한 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발리데 술탄께서 나라의 정사를 돌봐주시니 걱정할 것이 없겠구나. 이것 또한 어딘가 숨어 있는 공국의 첩자가 어머니를 통해 자신에게 전하는 내용이리라. 발리데 술탄이라... 파디샤와 사이가 나빠 뵈지는 않았지만, 그가 정사에 관여한다면 정치적으로 두 사람은 부딪칠 수밖에 없다. 발리데 술탄의 목적이 무엇일까. 자신으로써는 그에게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 만일 제국이 이교도와 관여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발리데 술탄은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알고 있는 것이 되고, 알고도 관여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자연스레 제국의 계획에 핵심적인 인물로 추려낼 수 있다. 더불어 발리데 술탄은 선대 파디샤와 함께 공국의 침략을 명령한 이다. 이안에게는 개인적인 원한 또한 있다. 그런 자신이 살갑게 붙어 봤자 의심만 사겠지.

 

주변인을 캐 보는 방법에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주변인 관리도 철저할 것 같은데. 이안이 그나마 친분을 쌓은 발리데 술탄의 지인이라면 파디샤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이안은 파디샤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 그 쪽으로 접근하는 것은 보류.

 

결국 이안이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나. 마침 더 이상 하렘에만 붙어 있는 것이 찌뿌둥하던 차다. 애초에 자신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는 성미도 아니고 말이다. 구궁전의 미로같은 지하 수로를 이용한다면 구궁전의 어디든 물론이고 잘하면 궁전 밖까지 나갈 수 있을 터다. 앞으로 몇 년을 여기서 머물게 될지 모른다. 이안은 그 전초지를 미리 마련해 놓고 싶었다. 마침 하렘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니, 자신이 슬쩍 사라져도 눈치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애초에 하렘에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탐험하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니 또 어딘가에서 수련을 하거나 구경을 하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겠지. 문제라면 파디샤가 찾아와서 정말로 자신을 찾아내야 할 때인데, 퍄다샤는 상냥하게도 방문하기 전 미리 예고를 하는 편이니 그 방면에서도 걱정을 덜었다.

 

이안은 아침 일찍 홀로 나설 채비를 마치고 얼굴을 가릴 천이 든 바구니를 들었다. 그 위는 소풍을 나갈 것처럼 과일과 먹을 것으로 얹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서는 길에는 누군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일직선으로 구궁전으로 가지 않고,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돌아서 자신의 목적지를 모르게 했다. 아니, 얼핏 보면 목적지가 없는 것도 같았다. 누군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안은 경계를 풀었다. 이미 구궁전에 다다르고 난 뒤였다.

 

수백 년부터 조금씩 증축된 궁전은 보안을 위해 건물을 쌓아올릴 때마다 그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된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 탓에 설계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도망칠 길을 몰래 만들어두곤 한다. 수백명이 만들어낸 복잡한 퇴로들이 얽혀 구궁전의 길은 마치 미로와 같았다.

 

이안은 바구니를 들고 별실을 지나쳐 감금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감금실은 구궁전 안에서도 안쪽으로 깊어, 사람이 잘 오지 않았다. 이곳의 창문들은 창문이라기보다는 숨구멍에 가깝겠지. 몇몇 문에는 석회를 발라 왕위에 방해가 되는 술탄들을 가두어둔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칼파는 술탄들의 유령이 나온다며 이곳을 꺼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안은 바로 이곳에 볼일이 있었다. 지난 번에 이곳에 왔을 때 이상한 것을 발견했던 탓이다. 그 때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였고, 감금실이 무섭다며 돌아가자고 성화여서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안은 안쪽 복도의 벽 위를 만졌다. 그러자 벽처럼 보였던 벽돌들이 옆으로 우르르 밀려나고, 낡은 복도가 입구를 드러냈다.

 

“……!”

 

이안이 눈앞의 복도를 응시했다. 이 앞으로 걸어나가면 어디로 가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결심을 하고 한 발을 떼려고 했을 때―

 

“음, 그건 몰랐다만.”

 

가장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파디사, 그러니까, 리콰이드가 여기 왜? 설마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그래.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 이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다시 나아가려고 발을 떼었다.

 

“그러니까, 거의 곤충 급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통로 아닌가 싶은데.”

“……”

 

이안이 천천히 돌아봤다. 자신의 관절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그래도 뭐라도 대답해야 해,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해, 이안 허드슨. 힘내라, 이안 허드슨!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우연이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여기 온다는 걸 몰랐을 테니.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리콰이드도 어이없어 보였다. 이안은 눈을 두 번 정도 굴리고는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길…을 잃었어요!”

“아. 하지만 길은 지금… 보다시피 낡은 비밀 통로를 개방할 정도로 잘 알고 있어 보이네만?”

“우연이에요.”

 

이안은 최선을 다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제발넘어가라제발넘어가라제발넘어가라………

 

“거기 공국은 우연이나 의도가 아니라는 말을 혹시 반대로 쓰나?”

“그렇지만 보세요, 저 벽돌, 다른 것들보다 먼지가 없잖아요. 저런 게 있으니까, 궁금해서…”

 

리콰이드의 시선이 흘끗 벽으로 향했다. 이안도 억울했다. 방금 발견한 비밀통로를 가지고 어디 간 것도 아니고, 그냥 딱 눌러봤을 뿐인데! 물론 어디 가려고 하긴 했지만! 눌러본 것 가지고 죄가 되지는 않을 거다.

 

“…음, 구궁전 모두에게 잊힌 비밀통로도 많은데, 이건 누군가가 최근까지 사용하고 있었던 통로였나.”

 

리콰이드도 손을 뻗어 벽돌을 한 번 만져보다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냥 넘어가주나 보다.

 

“그렇다면 하렘에서 여기까지 온 건 이런…것 때문에 궁금해져서?”

“그건…”

 

이안은 잠시 뭐라고 변명했는지 떠올리는 데 시간을 사용했다.

 

“아 맞다, 길을 잃었었죠.”

“그건 말고, 궁금해서?”

“그것도 있고…”

“또 뭐를.”

“아, 꽃!”

 

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소풍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는 것을 자각했다. 원래는 밖으로 나갈 것까지 생각했는데, 발목이 잡혀서는!

 

“누가 이 쪽 꽃이 예쁘다고 했어요. 보세요, 요깃거리도 들고 나왔잖아요.”

“그랬군…… 그러니까 꽃을, 감금실에서.”

“감금실은 아니고, 구궁전이요. 몇몇 하툰들의 솜씨가 칼파보다 더 뛰어나댔어요.”

 

이안은 최대한 그럴듯한 구실을 자신이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과 조합했다. 평소보다 눈을 더 많이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말이다.

 

“아, 여기도 꽃… 향기가 좋네요!”

 

이안은 리콰이드의 눈치를 열심히 봤다. 안타깝게도 리콰이드는 이미 이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에 회의적인 것 같았다.

 

“아. 감금실에서.”

“…향불인가?”

“……”

 

다시 한 번 말하자, 이안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거지. 그 꽃은 진짜 찾아갈 생각인 건가?”

“음…다음 번에요.”

“아, 다음 번에도 오겠다고.”

 

오는 것 자체는 규칙 위반이 아니니 말이다. 애초에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디서 튀어나온 인간이 갑자기 나와서 말을 걸었으니, 오늘은 텄다.

 

“기왕 만났으니 같이 돌아갈래요? 근데 파댜샤는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저는… 맞다, 꽃, 네. 꽃 때문이고요.”

“발리데 술탄을 만나러 왔다만. 길을 잃었다며.”

“맞다, 음…”

 

이안은 또 자각하지 못한 채로 눈을 굴렸다.

 

“음, 그것도 맞을 거에요. 아마도요.”

 

수상하겠지, 수상할 거야. 수상하겠지! 이안은 찔리는 양심을 주체할 수 없는 나머지 입을 뗐다.

 

“…내쫓으실 건가요?”

“하렘의 일원이 구하렘에 있는 것이? 글쎄, 사적으로 수상할 순 있어도 규칙 위반은 아닌지라. 내쫓기까지는 할 수 없겠지.”

“맞다, 그렇죠, 다행이다. 규칙 위반한 건 없고, 수상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렇죠?”

 

그렇네, 그 말이 맞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 아직 바깥으로 나간 것도 아니고, 그저 구궁전을 떠돌다가 지하 미로를 발견했을 뿐. 그 정도는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 이안 허드슨은 갑자기 자신감이 차올라 어깨를 폈다.

 

“수상한데.”

 

그러나 기껏 부풀어오른 자신감은 리콰이드의 지적 한 번에 무너졌다. 이안이 으으윽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쥐자, 아침에 나들이를 간다고 열심히 칼파들이 관리해주었던 머리가 다 망가졌다.

 

“어려워요……”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가…”

“그러게요…”

 

리콰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안은 그에 맞춰 한숨을 폭 쉬었다. 수상했겠지, 수상하겠지! 당분간은 좀 사리고 있어야겠다. 그나저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 리콰이드라는 것을 행운이라고 봐야 할까, 불운이라고 봐야 할까. 리콰이드가 자신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주고 있다는 것은 이안도 자각할 수 있었다. 이안은 자신을 향한 시선에 민감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과연 자신 또한 리콰이드에게, 제국의 파디샤에게 호의를 가져도 되는지에 대한 것은 분간할 수 없었다.

 

리콰이드의 너그러운 웃음. 그것은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을 자의 웃음인 걸까. 이미 모든 비밀통로를 꿰뚫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조소일까,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짓는 웃음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파디샤 정도의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이안이 발리데 술탄을 중요 위험 인물로 낙점지은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이안은 근래 정보를 모으며 무언가 이상한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아직은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기 어려웠지만…

 

이안이 직접 움직이는 것 외에 또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파디샤를 파헤쳐야 했다.

 

리콰이드와 함께 나란히 하렘으로 돌아오며, 이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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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이안 허드슨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하나의 조그만 인형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알았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마라. 이안 허드슨은 꽤 심각했다. 연인의 옆에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한 뼘 가량의 조그만한 봉제인형이 되는 일을 겪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된다는 말이냐?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이안 허드슨은 마법사였다. 그리고 마법사로써 이런 저런 일을 겪다 보면 이 정도의 일에도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안 허드슨은 침착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는 주위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것으로 보아 시간은 오전의 어드메였다. 몸에 비해 거대해진 머리를 돌려 보니 시계가 오전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도 생체리듬은 기어코 유지되는구나. 이안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가슴을 쓸어내리기에는 팔이 너무 짧았을 뿐만 아니라 빵빵한 솜 때문에 빠듯했지만 말이다.

 

그는 다시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자고 있는 연인을 살펴보았다. 휴, 다행이다. 그는 인형으로 변하지 않았다. 어딘가의 마법재액인지는 모르지만 이안 허드슨만을 노린 모양이다. 이것은 이안 허드슨은 물론 마법재액에게도 무척 다행인 처사였다. 이안은 고열사로 된 머리카락을 넘기며 깨어난 그가 자신의 팔다리를 보았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또 그에 대한 연인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어찌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서운 표정을 한 그는 -침실에서의 즐거운 장난 도중일 때를 제외하고- 연인인 이안 허드슨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상태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자고 일어났는데 옆에 말하는 인형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연인과 닮았다고 해도 상당히 사특하게 느껴질 것이 당연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불에 타는 쓰레기로 버려지거나 마법 재액 취급당하는 것일까. 아니, 마법 재액은 맞는 것 같았지만.

 

생각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기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기서 고민하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지도 않을 것이 뻔하고. 아, 뭔가 꿈 속에서 하와이안 셔츠와 하트 선글라스를 쓴 인형에게 쫓기던 것도 같은데, 차라리 다시 눈을 감고 꿈이 이어지기를 바라면 그에게 해결책을...

 

...그럴 리가 없었다. 이안 허드슨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뒤뚱뒤뚱 일어섰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적어도 잠옷까지 함께 인형옷으로 변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인형 옷의 조그만 똑딱이 단추를 푸르며 생각했다. 이 근방이라도 달리고 오자. 일단 달리는 거다. 인형이 땀을 흘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달리고 오면 무언가 생각이 나겠지. 결국 이안 허드슨은 잠시간의 외면이라는 도피를 선택했다.

 

다행히 옷장 안에 있는 옷 또한 자신의 몸 크기에 맞춰 작아진 듯 했다. 몸의 몇 배나 되는 옷장 문을 끙끙대며 연 보람이 있구나. 이안 허드슨은 솜으로 손 짧은 팔로 집히는 아무 트레이닝 바지와 후드를 꿰어찼다. 입는다-는 단어보다는 꿰어넣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살, 아니 솜을 빼야 할까? 너무 뚱뚱해서 안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런 순간에 절망이 눈앞에 드리워질 때도 있었지만 이안 허드슨이 누구인가. 머니먼 바다의 개척자가 아니었던가? 기적마저 손에 잡고 만다는 그가 아니었다면 분명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안 허드슨은 뿌듯한 마음으로 헤드밴드를 고쳐쓴 뒤 물병을 챙기려 했으나 아차, 물병은 저 높은 싱크대 위에 있었다. 나중에 주방을 어떻게 쓸 지도 고민해야겠지. 일단은 시간이 아까우니 나가자.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는 이안을 맞는 것은 상쾌한 아침 공기였다.

 

리콰이드의 집 부근은 대개 부유한 개인주택으로, 마당이 넓고 집과 집 사이가 멀어 사람을 자주 마주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말이지. 덕분에 이안 허드슨은 누군가 달리는 봉제인형을 마주치고 실신할 걱정 없이 안심하고 조깅을 시작했다.

 

바람은 솜으로 된 피부에도 어김없이 기분좋게 닿았다. 몇 블록을 달리다 보니 솜으로 된 이마가 조금 축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재질로 이루어진 건지, 저주받을 이안의 머리카락은 솜인형이 되더라도 어김없이 사정없이 날려서, 머리에 둘러쓴 헤어벤드를 가져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 동네도 이제 어지간히 익숙해졌지. 몇 달간 리콰이드의 집에 들락날락거렸으니 말이다. 자고 가는 것도 드물지 않았고...

 

그런 평화로운 생각을 하며 천천히 달리던 이안 허드슨에게 예상치 못하던 복병이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안 허드슨이 그에게 찾아갔다.

 

아차, 이 집에서 고양이를 풀어 키우던 것을 까먹었다. 평소라면 멀찍이서 반갑게 인사하고 지나갈 것을, 지금의 이안 허드슨은 솜인형이었다. 그것도 말하는, 달리는 솜인형이었다.

 

눈치 빠른 동물이 자신보다 작은 존재의 두려움을 맡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왜옹, 하고 날 선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라, 나를 볼 때는 저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분명 저것 보다 상냥하고, 부드럽고...

 

이안 허드슨은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달리고 있었지만 정말로 혼신을 다한 달리기를 시작했다. 뒤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며 쫓아오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흘끗 돌아본 이안은 그것이 곧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채만한, 아니, 그것은 인형이 된 이안 허드슨의 기준이었지만, 집채보단 큰 고양이가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의 등에 솜털이 쭈뼛 섰다.

 

다행히 이쪽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몸으로는 달리기가 더할 수 없이 느리지만, 빨리 달리면 큰 머리 때문에 상체가 기우뚱하고 딸려가지만-! 어떻게든 죽기살기로 달리면 더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거다. 잘못해서 저것에게 잡히면 생사를 보장할 수 없다. 리콰이드에게 소각당하기 이전에 해체되어 여기저기 솜이 터져나와 버릴 거다.

 

이안 허드슨은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젖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코너를 돌자 리콰이드의 집이 보였다. 이안은 온 힘을 다해서 울타리 밑으로 슬라이딩 해 반쯤 열려있을 뒷문으로 달려나갔다.

 

휴, 더 이상 쫓아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원치는 않은 방향이었지만 잡생각을 없앤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이제 기진맥진해진 이안 허드슨은 집 안으로 들어오며 축축해진 헤드밴드를 벗었다.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전력으로 달렸더니 몸이 되려 무거워졌다. 솜이 물을 먹어서 그런 걸까? 이젠 다 모르겠고, 누워서 쉬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이안 허드슨은 운동복도 갈아입지 않고 무작정 침대로 들어가 이불 속에 꾸역꾸역 파묻혔다. 아직 리콰이드는 깨어나지 않은 듯 했다. 다행이야, 이대로 잠시 누웠다 일어나면...

 

어라,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완전히 지쳐버린 탓에 이안은 더 이상 수마를 몰아낼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아직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연인 옆에 찰싹 붙어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이안 허드슨이 편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연인이 침대 속에서 하나의 조그만 인형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불과 몇 십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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