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허드슨과 하구레모노
2024. 11. 4.

시노비가미 시나리오 <돌아갈 길은 좁고 세워진 벽은 높으니>의 간접적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 의뢰를 위해서는 크게 시공을 건너뛸 필요가 없었다. 말 꼬리가 달린 여자아이들도, 초월하는 힘도, 외계에서 온 기이한 신도 없는, 이안에게도 아주 익숙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 마지막 말은 취소. 도래인이라고 하는 초월자들이 있었지. 좌표는 21세기의 일본, 어느 시골 한 구석. 그 세계의 이안이 처음 마법사 이안을 마주치고 짚어낸 것은 상대가 “이안” 임이 아니었다.

 

“마법사잖아.”

“닌자였어?”

 

닌자, 혹은 Non Identified Nightmarish Japanese Agent. 고속기동을 쓰며 무서운 속도로 공격을 해오는 이들은 대법전에 속한 이안으로써도 처음 들어 본 것도, 처음 마주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별별 이안 허드슨을 다 마주했다고(고작 3명이었다) 자부한 마법사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건 상대인 이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의뢰가 분명… 요마 토벌이었지?”

“응. 버려진 마을이었는데 그새 하급 요마들이 자리를 잡았거든.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혼자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리퍼 이안처럼 말상대가 필요했던 걸까?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 위로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능숙하게 앞장서서 걸으며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상대쪽이었다.

 

“네 이름은 이안 허드슨이지? 내 이름은 조금 달라.”

“이안 허드슨이 아니야?”

“네가 ‘이안 허드슨이나 그 등가’라고 부르는 존재는 맞을 거야. 전단지가 제대로 도착한 걸 보면. 그치만 내 이름은 오토즈레 이노리거든.”

“그런 시공도 있구나.”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건 확실히 그렇다.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안 허드슨’들만 만나왔다는 쪽이 더 신기할 정도다. 오토즈레 이노리라는 이름 또한 듣고 보니 이안의 또 다른 이름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감이 있었다.

 

“유파는?”

“시노비의 세계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잖아. 하구레모노야.”

“어울리네.”

“예전에는 마와리가라스였는데, 사정이 좀 있어서. 나온지 몇 년은 되었어.”

“어쩌다 나온 건지 물어 봐도 돼?”

“시노비가 원래 유파에서 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잖아, 탈주지.”

 

그 말을 하며 이노리는 장난스럽게도 씩 웃었다. 그래서 이안은 이노리의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걷고 나서야 마을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버려진 지 오래라는 말이 사실인지 흙먼지와 초목으로 뒤덮였고, 오래된 건물들이 다 무너져가고 있었다. 분명 한낮일 텐데, 건물 사이로 스산한 공기가 감돌았다. 저 멀리 언덕 위에 신사가 보였다. 요기는 그쪽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채 신이 되지 못한 불길한 존재라도 자리잡아 버렸나 보지. 본래 신사란 그런 것을 봉인하기 위한 건물이니 말이다.

 

사령 몇이 두 사람을 둘러싸는 것을 느끼며 이노리가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준비 됐지?”

 

여기서는 실력을 아낄 필요 없겠지. 이안은 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요마 토벌은 힘 빠질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아마 이노리 정도의 실력자라면 혼자서도 퇴치할 수 있었을 테고, 이안의 협력은 그저 그 시간을 단축시켰을 뿐이다. 텅 비어버린 사당에서 이안은 그 옆에서 서서히 경계를 거두었다. 그 옆에서 이노리는 굴러다니는 판자 조각을 툭, 툭, 발로 치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걸로 의뢰는 끝일까? 그러나 이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어울려줄래?”

 

지금까지 막무가내로 나갔던 다른 이안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다른 이안들보다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아 보이니 그 영향일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노리가 이안을 이끌고 온 곳은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언덕이었다. 요기가 깨끗하게 씻겨 나간 푸른 하늘 아래로 햇볕이 폐허가 된 마을을 내리쬐고 있었다. 현대라기보다는 어느 아포칼립스 세계의 한 장면을 떼어다 온 것만 같았다. 이안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자 이노리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내 고향이거든, 여기.”

“응?”

 

갑작스러운 고백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노리는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었다.

 

“여기서 히사 형이랑 같이 살았었어. 아, 히사 형, 알지? 교세츠 키요히사. 긴 흰색 머리에다가 성격 나쁜.”

“리콰이드 말하는 거야?”

“거기선 또 이름이 다른가 보네. 아무튼 어렸을 때는 형이랑 같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놀곤 했지. 여기서는 멀리까지 잘 보이잖아. 그래서 마을을 나가는 상상을 했어.”

 

이노리는 그렇게 말하곤 잠시 자신만의 시간에 빠져 있는 듯 했다. 이안은 잠자코 그가 추억을 헤아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게 끝났지. 나 때문이었어. 내가 그 기구에 홀려서 모두를 죽여버린 거야. 그 책임은 모두 히사 형에게 돌아갔고. 나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있었어. 모든 걸 기억해낼 때까지.”

“......”

“너, 히사 형 없지.”

“뭐?”

“네 쪽 세계에서는 리콰이드라고 한댔나? 아무튼, 리콰이드 없지.”

“갑자기 무슨…”

“나도 없어. 나를 감싸느라 죽었거든.”

 

이안은 자신을 두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이 대화의 흐름을 어찌 따라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노리는 자신의 핵심을 찾아 꿰뚫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 있거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태도를. 다른 사람은 잘 속여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날 속이기는 힘들걸.”

“...지금까지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어린 나였다면 모르고 넘어갔겠지.”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싼다. 암묵적인 동의의 침묵이다. 이안도, 이노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안은 잠시 마른 세수를 한 끝에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난다면,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

“글쎄… 미안하다고 하고도 싶고, 고마웠다고도 말하고 싶지만, 역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좋아한다는 말을 못 했거든. 그렇지만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내게도 염치가 있는데. 어떻게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로 나의 욕심을 우선할 수 있겠어.”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 걸 후회해?”

“...아니. 그랬다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걸.”

 

그 말을 하는 이노리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려져 있었다. 이안은 갑자기 절박한 마음이 들어 그를 채근했다.

 

“후회해?”

“그래.”

“무엇을?”

“그 무엇에 확신 하나가 없었던 것을.”

 

그 대답은 이안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노리의 대답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신이 드는 것 두 가지는 있어.”

“뭔데?”

“히사 형은 나를 용서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

“네 리콰이드는 너를 용서했을까?”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이노리의 목소리는 거의 부드러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안은 분명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야겠어.”

 

스스로 중얼거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답이었다. 도피다. 자신이 직면할 수 없는, 직면해서는 안 되는 질문에 마주한 자의 행동. 이안은 이노리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더 이상 읽혀버릴 것만 같아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이 낯설고도 친숙한 다른 세계의 자신 앞에서 기어코 조각 조각 나버릴 것만 같아서.

 

이노리는 미소짓는다. 이해하는 자의 미소다. 포용하고 통달해 이안이 지금 어떤 과정을 겪고 있는지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그리하여 자신의 여정을 마친 자의 미소다.

 

“잘 가, 또 다른 나. 언젠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기를.”

 

그 말이 허공에 닿은 것은, 이미 이안이 세계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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