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57
이안 허드슨과,
2024. 11. 5.

https://youtu.be/pKNEx-9OqRM?si=3Vc0vYCZNM4m4y_q

 

이안 허드슨은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도 그는 익숙한 곳에 있었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현관. 리콰이드의 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리콰이드와 그의 집이었지. 리콰이드가 이곳에 살았다는 사실은 곧 지워질 테지만 말이다.

 

심부름센터를 떠올린 것은 사라져가는 리콰이드에 대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떠올려보려는 발버둥에서부터였다. 다락방의 옛 짐 속에서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이 빛바랜 전단지를 발견했다. 이곳에는 리콰이드가 없다. 더 이상 리콰이드를 떠올려보려고 해도, 세계에게 미움받는 마법사는 그 자리를 좀먹힐 뿐이다. 그렇다면 마법사가 아닌 리콰이드를 찾으러 가자. 그들에게 리콰이드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물어보자. 그렇게 하면 무엇이라도 알 수 있겠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겠지.

 

오래 전, 나는 당신에게 구애하고자 이 심부름센터를 열었다. 아, 젊은 열망이여. 열병 같은 사랑이여. 그때의 나는 지독히도 순수했고 지독하리만치 집요했다. 그 때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지금의 이안 허드슨은 알고 있다. 그 길의 끝에는 페허밖에 없었다는 것을.

 

무엇이 잘못된 걸까.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다. 우마무스메의 이안이 가지고 있었던 신선한 투지. 빛의 전사였던 이안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불굴의 정신. 하툰의 이안이 가지고 있었던 이해와 양보의 자세.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그럼에도 삶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오토즈레 이노리의 강인함.

 

나에게는 그 어느 것도 없구나, 그는 깨닫는다. 과거를 받아들일 포용력도, 현재를 살아갈 정신력도, 미래로 나아갈 희망도.

 

현관 문을 연다. 이 현관에서 수없이 당신을 반겼고, 당신 또한 나를 수없이 반겼다. 그러나 오늘 그럴 일은 없다. 이안은 현관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서기 직전 걸려 있는 거울 앞에 멈춰 선다. 그러고는 무엇에 홀린 듯이 안대를 푸른다.

 

ⓒ벌금

 

거울 속의 남자는 지쳐 보인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안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싶었어. 그래서 당신에게 구애하던 나의 행동을 스스로 모방했어. 다른 평행세계의 내가 당신을 어떻게 여겼는지라도 들으면 알 것 같았어. 당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불사하고 내가 깨달은 진실은 말이야, 리콰이드.

 

그는 거울에서 몸을 돌려 환한 빛이 들어오는 창 쪽으로 나아간다. 거울에 손자국이 길게 늘어진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빛 속에서 빛먼지가 춤을 춘다. 현대적으로 꾸며진 인테리어. 자신의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은 이미 다른 누군가의 취향으로 덧씌워지고 있었다. 그래, 나는 아직도 당신이 내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빛이 유리창에 부딪쳐 만들어내는 광채가 눈부셨다. 그것이 리콰이드 던을 기억하는 검은 바다의 인도자의 마지막 고백이었다.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안 허드슨과 하구레모노  (0) 2024.11.04
이안 허드슨과 베일을 두른 하툰  (0) 2024.11.03
이안 허드슨과 커피쿠키  (0) 2024.11.02
이안 허드슨과 우마머스마  (0) 2024.10.30
기회주의자  (0) 2024.10.07
이안 허드슨과 하구레모노
2024. 11. 4.

시노비가미 시나리오 <돌아갈 길은 좁고 세워진 벽은 높으니>의 간접적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번 의뢰를 위해서는 크게 시공을 건너뛸 필요가 없었다. 말 꼬리가 달린 여자아이들도, 초월하는 힘도, 외계에서 온 기이한 신도 없는, 이안에게도 아주 익숙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아, 마지막 말은 취소. 도래인이라고 하는 초월자들이 있었지. 좌표는 21세기의 일본, 어느 시골 한 구석. 그 세계의 이안이 처음 마법사 이안을 마주치고 짚어낸 것은 상대가 “이안” 임이 아니었다.

 

“마법사잖아.”

“닌자였어?”

 

닌자, 혹은 Non Identified Nightmarish Japanese Agent. 고속기동을 쓰며 무서운 속도로 공격을 해오는 이들은 대법전에 속한 이안으로써도 처음 들어 본 것도, 처음 마주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별별 이안 허드슨을 다 마주했다고(고작 3명이었다) 자부한 마법사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건 상대인 이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의뢰가 분명… 요마 토벌이었지?”

“응. 버려진 마을이었는데 그새 하급 요마들이 자리를 잡았거든.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혼자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리퍼 이안처럼 말상대가 필요했던 걸까?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 위로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능숙하게 앞장서서 걸으며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상대쪽이었다.

 

“네 이름은 이안 허드슨이지? 내 이름은 조금 달라.”

“이안 허드슨이 아니야?”

“네가 ‘이안 허드슨이나 그 등가’라고 부르는 존재는 맞을 거야. 전단지가 제대로 도착한 걸 보면. 그치만 내 이름은 오토즈레 이노리거든.”

“그런 시공도 있구나.”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건 확실히 그렇다.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안 허드슨’들만 만나왔다는 쪽이 더 신기할 정도다. 오토즈레 이노리라는 이름 또한 듣고 보니 이안의 또 다른 이름처럼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감이 있었다.

 

“유파는?”

“시노비의 세계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잖아. 하구레모노야.”

“어울리네.”

“예전에는 마와리가라스였는데, 사정이 좀 있어서. 나온지 몇 년은 되었어.”

“어쩌다 나온 건지 물어 봐도 돼?”

“시노비가 원래 유파에서 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잖아, 탈주지.”

 

그 말을 하며 이노리는 장난스럽게도 씩 웃었다. 그래서 이안은 이노리의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걷고 나서야 마을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버려진 지 오래라는 말이 사실인지 흙먼지와 초목으로 뒤덮였고, 오래된 건물들이 다 무너져가고 있었다. 분명 한낮일 텐데, 건물 사이로 스산한 공기가 감돌았다. 저 멀리 언덕 위에 신사가 보였다. 요기는 그쪽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채 신이 되지 못한 불길한 존재라도 자리잡아 버렸나 보지. 본래 신사란 그런 것을 봉인하기 위한 건물이니 말이다.

 

사령 몇이 두 사람을 둘러싸는 것을 느끼며 이노리가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준비 됐지?”

 

여기서는 실력을 아낄 필요 없겠지. 이안은 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요마 토벌은 힘 빠질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아마 이노리 정도의 실력자라면 혼자서도 퇴치할 수 있었을 테고, 이안의 협력은 그저 그 시간을 단축시켰을 뿐이다. 텅 비어버린 사당에서 이안은 그 옆에서 서서히 경계를 거두었다. 그 옆에서 이노리는 굴러다니는 판자 조각을 툭, 툭, 발로 치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걸로 의뢰는 끝일까? 그러나 이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어울려줄래?”

 

지금까지 막무가내로 나갔던 다른 이안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다른 이안들보다 더 나이를 먹은 것 같아 보이니 그 영향일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노리가 이안을 이끌고 온 곳은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언덕이었다. 요기가 깨끗하게 씻겨 나간 푸른 하늘 아래로 햇볕이 폐허가 된 마을을 내리쬐고 있었다. 현대라기보다는 어느 아포칼립스 세계의 한 장면을 떼어다 온 것만 같았다. 이안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자 이노리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내 고향이거든, 여기.”

“응?”

 

갑작스러운 고백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노리는 이야기를 이어갈 뿐이었다.

 

“여기서 히사 형이랑 같이 살았었어. 아, 히사 형, 알지? 교세츠 키요히사. 긴 흰색 머리에다가 성격 나쁜.”

“리콰이드 말하는 거야?”

“거기선 또 이름이 다른가 보네. 아무튼 어렸을 때는 형이랑 같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놀곤 했지. 여기서는 멀리까지 잘 보이잖아. 그래서 마을을 나가는 상상을 했어.”

 

이노리는 그렇게 말하곤 잠시 자신만의 시간에 빠져 있는 듯 했다. 이안은 잠자코 그가 추억을 헤아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게 끝났지. 나 때문이었어. 내가 그 기구에 홀려서 모두를 죽여버린 거야. 그 책임은 모두 히사 형에게 돌아갔고. 나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있었어. 모든 걸 기억해낼 때까지.”

“......”

“너, 히사 형 없지.”

“뭐?”

“네 쪽 세계에서는 리콰이드라고 한댔나? 아무튼, 리콰이드 없지.”

“갑자기 무슨…”

“나도 없어. 나를 감싸느라 죽었거든.”

 

이안은 자신을 두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이 대화의 흐름을 어찌 따라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노리는 자신의 핵심을 찾아 꿰뚫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 있거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태도를. 다른 사람은 잘 속여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날 속이기는 힘들걸.”

“...지금까지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어린 나였다면 모르고 넘어갔겠지.”

 

잠깐의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싼다. 암묵적인 동의의 침묵이다. 이안도, 이노리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안은 잠시 마른 세수를 한 끝에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난다면, 뭐라고 말해주고 싶어?”

“글쎄… 미안하다고 하고도 싶고, 고마웠다고도 말하고 싶지만, 역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좋아한다는 말을 못 했거든. 그렇지만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내게도 염치가 있는데. 어떻게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로 나의 욕심을 우선할 수 있겠어.”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 걸 후회해?”

“...아니. 그랬다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걸.”

 

그 말을 하는 이노리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려져 있었다. 이안은 갑자기 절박한 마음이 들어 그를 채근했다.

 

“후회해?”

“그래.”

“무엇을?”

“그 무엇에 확신 하나가 없었던 것을.”

 

그 대답은 이안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노리의 대답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신이 드는 것 두 가지는 있어.”

“뭔데?”

“히사 형은 나를 용서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

“네 리콰이드는 너를 용서했을까?”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이노리의 목소리는 거의 부드러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안은 분명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돌아가야겠어.”

 

스스로 중얼거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답이었다. 도피다. 자신이 직면할 수 없는, 직면해서는 안 되는 질문에 마주한 자의 행동. 이안은 이노리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더 이상 읽혀버릴 것만 같아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이 낯설고도 친숙한 다른 세계의 자신 앞에서 기어코 조각 조각 나버릴 것만 같아서.

 

이노리는 미소짓는다. 이해하는 자의 미소다. 포용하고 통달해 이안이 지금 어떤 과정을 겪고 있는지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그리하여 자신의 여정을 마친 자의 미소다.

 

“잘 가, 또 다른 나. 언젠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기를.”

 

그 말이 허공에 닿은 것은, 이미 이안이 세계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안 허드슨과,  (0) 2024.11.05
이안 허드슨과 베일을 두른 하툰  (0) 2024.11.03
이안 허드슨과 커피쿠키  (0) 2024.11.02
이안 허드슨과 우마머스마  (0) 2024.10.30
기회주의자  (0) 2024.10.07
이안 허드슨과 베일을 두른 하툰
2024. 11. 3.

CoC 시나리오 <하렘의 탈출구는 죽음 뿐>의 간접적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독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 이안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직후에 그는 무명 천으로 입이 막혔다. 그늘 속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며 서로를 쳐다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검은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린 이안 허드슨이었다.

“평행세계의 나라더니, 정말 똑같이 생겼잖아…”

그 말과 함께 이안의 입을 가렸던 천이 스르르 떨어졌다. 꽤 거친 환영이었지만 이안의 마음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절박한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수단이 따르는 법이지. 이안은 그 대신 웃어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테니까.”
“흐음.”

그 말에 검은 천의 이안은 오히려 자신을 수상하게 쳐다봤다. 이안은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일단 그 옷부터 갈아입자. 아니면 적어도 가리기라도 해야지. 자, 이걸 둘러.”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이안은 완벽하게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21세기 기준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곳은 21세기는 아닌 듯 해 보였다. 역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중세의…중동이려나. 이런 평행세계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하긴, 그렇게 치면 우마머스마 때부터 태클을 걸어야 했다. 이안은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거리면서 어두운 색의 천을 둘렀다.

길고 어두운 천으로 몸을 감싸고 나니 조금은 이 시대에 녹아들은 모습이 되었다. 적어도 이안은 그러기를 바랐다. 중세의 도시 한가운데서 외부인으로써 위협받는 것은 아무리 이안이라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귓가에서 화려한 금 장신구를 떼어놓고 있는 이곳의 이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널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안… 이라고 부르면 이름이 겹치겠지.”
“직업이 뭐야? 호칭으로써 부를 수도 있잖아.”
“직업?”

이안으로써는 직전의 올드 샬레이안에 살던, 그러니까 리퍼인 이안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이곳의 이안은 희안한 얼굴을 했다. 이안은 좀 더 추측을 덧붙이기로 했다.

“딱히 직업이 없는 귀족이라던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다 기밀이라서.”
“비밀 임무라도 나가는 길인가 보지?”
“그렇게 떠 봤자 나오는 건 없어.”

앗차, 직업병. 이안은 자신의 입을 때렸다. 그 모습에 이 세계의 이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됐어, 어차피 이 세계에 계속 남을 것도 아니니까. 우리 둘뿐이라면 하툰 이안이라고 불러.”

하툰. 그건 파디샤의 신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술탄의 하렘에 있어야 할 자가 어찌 저잣거리에? 이안의 머릿속에서 던진 질문을 읽은 것 마냥 하툰 이안이 대꾸했다.

“기밀이라고 했잖아.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하툰이고, 여기 나와 있는 게 들킨다면 분명 사형감이겠지. 그러니까 들키지 않아야 해. 알겠지?”
“알겠어.”

지금도 두 사람이 있는 다리 위로는 행인들과 마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다리 아래는 마치 어떤 장막이 드리워진 듯이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작은 시내가 그들이 선 곳 옆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의뢰는 뭐야? 의뢰가 있었으니 나를 불렀겠지.”
“아, 의뢰.”

그렇게 말하며 하툰 이안은 이안 쪽으로 검게 도색된 검 하나를 던졌다. 날의 무게 때문에 이안은 거의 휘청일 뻔 했다. 거의.

“검 다룰 줄은 알지?”

그야 마검 정도는… 하고 답하려던 이안은 하툰 이안이 또 다른 검을 꺼내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너, 하툰이라며.”
“왜, 하툰은 검은 다루면 안 돼? 이거 파디샤보다 고지식하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보통 하툰이 검을 다룰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하툰도 별별 배경이 다 있어.”
“그리고 네 배경은 검을 다루는 걸 요구했고.”
“응. 황자였거든.”

황자. 이안 허드슨은 더 이상 이 배경 설정에 태클을 달지 않기로 했다. 하긴 이안, 너는 마법사란다, 하는 세계가 있는 마당에 황자였다가 하툰이 된 자신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음은 뭐지? 리콰이드에게 차인 자신?

잠깐, 그러고 보니 리콰이드의 문제가 있었다. 이안은 두른 천을 퉤 뱉어내고 질문을 했다.

“그럼 리콰이드는 뭔데?”
“리콰이드? 리콰이드에 대해 알고 있어?”

검을 살펴보던 하툰 이안의 태도가 스산해졌다. 이안은 이 세계에 와서 두 번째로 결백을 증명해듯이 두 손을 들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 특히 이 세계의 리콰이드에 관해서는. 그래서 물어보는 거잖아.”
“흐으음…”

하툰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긴장은 오래 가지 않았고, 하툰 이안은 다시 돌아섰다.

“정말로 평행 세계의 내가 맞나 보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걸 보면.”
“모른다니까 그러네.”

하툰 이안은 그가 작게 투덜거리는 것을 듣는 체도 않고 나갈 채비를 마쳤는지 바구니 속에 무언가를 쑤셔넣었다.

“자, 가자.”
“뭘 할 건데?”
“하다 보면 알게 돼.”
“그러니까 뭘 할 거냐니까?!”

역시 들은 체도 안 하는 게 맞다. 하툰 이안은 곱게 자랐을 황자, 그것도 아마 타국의 황자였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익숙하게 활기찬 저잣거리를 걸어나갔다. 이안은 그 뒤에서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다짐했다.




하툰 이안이 하는 행동은 언뜻 보기에 거리의 여타 다른 사람이나 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과일 가격을 물어 본다던가, 약간의 흥정을 하고, 사소한 잡담. 또는 안부 인사. 때로는 최근 이 부근에 일어난 일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안은 때때로 그가 뒤를 돌아 다른 사람들의 머리 너머를 확인하는 것을 눈치챘다. 미행이 붙었나 확인하는 것이겠지. 물건을 사거나 잡담을 하는 것도 물가를 확인하고 탐문을 하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안은 어느 동전 밑으로 작은 쪽지가 오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툰 이안은 그것을 곧장 확인하고는 입으로 삼켰다. 이안 본능적으로 눈치채는 것은 직업병이나 마찬가지다. 엽귀는 감찰 기관이니까. 하툰 이안이 하는 것은 명백한 첩자의 작업이었다. 황자가 궁에서 나와서까지 해야 하는 첩자 활동이라니, 정말로 인재가 궁색한 모양이지. 그러나 이안은 굳이 이를 지적하지 않고 잠자코 하툰 이안의 행동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여 북적거리는 도시를 가로질렀다.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하늘을 물들일 즈음 두 사람은 하렘으로 숨어들었다. 이쯤 되자 이안도 하툰 이안이 하려는 행동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못 해.”

하툰 이안은 비단 스카프를 들고서 이안을 빤히 바라봤다.

“안 돼, 못 해. 성공할 리가 없어.”
“생각해 봐, 딱히 속이는 것도 아니야. 오늘 밤에는 여기 이안 허드슨이 있어야 하지. 그리고 있을 거잖아?”
“속이는 게 아니라니!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넌 전 황자인 데다 파디샤의 하툰이고, 나는 21세기의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란 일반인 이안 허드슨이거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너밖에 없어. 어쨌든 동일인물이잖아? 게다가 누가 알겠어, 어차피 자는 척을 할 테니 다른 사람과 대화할 일도 없을 거야. 감쪽같지.”
“아니거든! 들키면 처형이라고, 처형.”

하툰 이안이 그 말에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

“심부름센터.”
“윽,”
“뭐든지 도와줄 수 있다며. 특별한 수단까지 있다며. 어쨌건 평행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마술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거 아니야? 게다가 난 어떻게 해서든 오늘 밤 가야 하는 곳이 있어. 이쪽도 나름 목숨 걸고 있다고. 싫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올 때 돌아갈 수단 정도는 생각했을 것 아니야.”
“......”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정말로 연관되기 싫었으면 내 일이 아니라며 한참 전에 내뺐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이안 허드슨 아닌가. 평행세계의 자신이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리콰이드 던도 있을 것이다. 리콰이드가 이안과 이미 얽혀 있다는 것은 하툰 이안의 반응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결국 이안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당연히 계획의 일부겠지만, 오늘은 파디샤도 다른 하툰들도 방문할 예정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일찍 잠이 들 거니까 방해하지 말아주겠어?"

 

문 너머에서 하툰 이안이 시중 드는 이들에게 일러 두는 것을 들으며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파디샤라도 오면 어떻게 하지? 몸에 손을 대려고 하기라도 하면? 리콰이드를 두고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져야 할 상황에라도 처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나갈 채비를 마친 하툰 이안이 창문을 넘으며 일렀다.

“아, 파디샤가 오면…”
“...”
“...”
“...”
“...어쨌든 자는 척 해. 그거라면 넘어가 줄 테니까. 아, 혹시라도 말하게 된다면 존대 쓰는 것 잊지 말고!”
“그럼 반말을 하겠냐. 아니, 그것보다 그거라면 넘어가 주는 거냐고!”
“아무튼 그럼 다녀올게!”

그리고 순식간에 하툰 이안은 사라졌다. 이안은 다시 한숨을 쉬며 화려하고 푹신하게 꾸며진 침대에 뒤로 엎어졌다. 하여튼 이안들이란. 리퍼 이안도 어지간히 막무가내라고 생각했지만 이 이안은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안의 걱정과 다르게 오는 사람은 없었고, 시간은 지루하게도 흘러갔다. 이안은 조금씩 졸음이 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 자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언뜻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두른 리콰이드 던을 보고 웃는 꿈을 꾼 것도 같았다. 꿈 속에서 리콰이드는 이안을 보고 마주 웃었다.

 


 


“정말 잘 줄은 몰랐는데. 너도 진짜 이안 허드슨이구나.”
“그거 욕이지.”
“따지자면 셀프 디스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셀프 디스는 무슨, 그거 나한테도 해당되는 거잖아. 이안은 푹 자서 분할 정도로 개운한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들키지 않고 잘 다녀온 것 맞지?”
“응. 이쪽도 문제 없었던 것 같고.”

시간은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하툰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둘둘 둘렀던 천을 벗어 어딘가에 쑤셔넣었다. 그가 널찍한 침대에 풀썩 앉자 침대 위에는 영락없이 똑같은 하툰이 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단 잠옷이 이불에 아무렇게나 펼쳐졌다. 이안은 이 틈을 타서 턱을 괴고 하툰 이안을 바라봤다.

“그럼 의뢰도 끝났으니 보수 받아도 되지?”
“그래. 그래서 그 보수란 뭔데.”
“대체 리콰이드랑 무슨 사이야?”
“엑, 또 리콰이드 이야기야?”

잠옷을 입고 이안 둘이서 나누는 리콰이드 이야기. 분명 말로만 들었을 때는 간질간질한 연애담이라도 나와야 할 타이밍이다. 이안이 지금까지 만나왔던 두 이안도 분명 그런 태도였고. 그러나 지금 하툰 이안이 보이는 태도는 아까의 날카로운 태도보다는 누그러졌을지언정 질색에 가깝다.

“리콰이드와 내가 무슨 사이인지는 내가 더 알고 싶을 정도야. 애초에 그 사람의 의중을 모르겠어. 경계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믿어도 되는지.”
“흐음… 생각보다 더 복잡한가 보네. 그래도 형식적인 관계란 있을 것 아니야. 어떻게 알게 됐는데?”
“전쟁터에서?”
“적으로, 아군으로?”
“당연히 적이지.”

당연히 적이구나. 이안은 지금까지 이 세계의 리콰이드 던에 대해 예상하던 것을 죄다 폐기하기로 했다. 아니, 그보다 그렇다면,

“너, 하툰이라며. 그러면 파디샤와 결혼한 것 아니야? 리콰이드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히 결혼했지.”

하툰 이안은 이안이 2+3 같은 간단한 사칙연산을 헷갈려 한다는 듯이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니까 다른 세계의 사정 같은 건 모른다니깐.

“리콰이드랑 결혼했지. 리콰이드가 바로 파디샤인걸.”
“엥?”
“아무리 다른 세계의 사정이라고 해도 너무 상황 파악이 느린 것 아니냐…”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황자였던 이안은 전쟁터에서 리콰이드를 만났는데, 그 리콰이드가 파디샤였고, 아마도 리콰이드는 이안을 복속시켜 하렘에 들였다는…

“...너무 자극적인 상황 아니야?”
“남의 인생 가지고 말이 심하거든?”

하툰 이안은 여전히 이안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이안은 머리 속을 정리하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리콰이드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건 무슨 소리야? 연애에 밀당이라도 해?”
“연애? 그거야말로 무슨 소리야.”

하긴, 아무리 자신이라도 적국의 원수가 되는 리콰이드를 쉽게 사랑하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이안은 접근을 달리 해보기로 했다.

“ 하렘에 들어온 건 첩보 활동의 일환? 지금은 리콰이드와 탐색전 중인 거고?”
“뭐어, 그런 셈이지.”

이제야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리콰이드의 화제가 나왔을 떄의 하툰 이안의 뾰족한 태도가 이해가 된다. 하툰 이안은 적국의 수장을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애매한 대응은…

“솔직히 말해봐, 리콰이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으음, 믿을 수 없고, 권위주의적이고, 언제 한 번 꺾어주고 싶고…”
“그리고…?”
“분하지만, 정말로 분하지만 강하고… 그리고…”
“계속 말해봐.”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흐음…?”
“...내 편이었으면 좋겠어.”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건 분명 도움이 되겠지. 그렇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써…”
“흐음…”
“뭐야, 그 시선은.”
“아니, 그냥.”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툰 이안이 하는 말을, 그의 입장을, 그가 아직 깨닫지도 못한 리콰이드에 대한 그의 욕망을.

그를 욕망하고 싶어. 그를 사랑하고 싶어.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같은 편이 될 필요가 있다. 그렇구나, 너는 그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설령 적국에 서더라도, 나는 당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리고 그건 참… 씁쓸하면서도 묘한 사실이었다. 이안은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이제 돌아가야지. 여기 오래 있을수록 들킬 확률만 올라갈걸?”
“보수는?”
“이미 받았어.”
“알고보니 내 미래의 수명이라던가, 행운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질문에 대답해 주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걱정 마.”

하툰 이안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겠지. 이 세계의 이안과 리콰이드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안은 드물게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이안이 리콰이드를 사랑해 내고 말 것이라는, 그렇게 해서 어떤 어려움이라도 헤치고 나갈 것이라는. 그래서 이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스스로로써도 의외였다.

“죽지 마.”
“노력해 볼게.”

작별 인사는 그걸로 충분했다. 이안은 발코니로 향하는 커튼을 걷고 그 뒤로 걸어들어갔다.

하툰 이안이 그 커튼을 걷었을 때, 그는 이미 떠난 후였다.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안 허드슨과,  (0) 2024.11.05
이안 허드슨과 하구레모노  (0) 2024.11.04
이안 허드슨과 커피쿠키  (0) 2024.11.02
이안 허드슨과 우마머스마  (0) 2024.10.30
기회주의자  (0) 2024.10.07
이안 허드슨과 커피쿠키
2024. 11. 2.

https://youtu.be/MlMtPlcV6Lo?si=R7v1U9xWC7Wh_R7N

 

 

눈앞이 화악하고 밝아졌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솨아아 소리를 낸다. 이번엔 무슨 사건일까, 누구와 만나게 될까. 수십 개의 궁금증이 머릿속을 스친다. 기대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도 같다. 그리고 이안이 마침내 눈을 뜨면, 그곳에는…

 

“...?”

“...?”

“어… 한 명이었던가? 이상하다, 보통 세 명이나 일곱 명이 오는데. 뭐, 괜찮겠지. 그래서 클래스는? 힐러나 탱커면 좋겠지만, 내가 스왑할 수도 있어.”

“...?”

“...?”

“그러니까… 아젬의 술식으로 불려 온 사람이지?”

“난… 심부름센터 사람인데?”

“심부름센터?”

 

뭔가 꼬여도 대단히 꼬인 듯싶었다. 이안은 일단 미간을 짚고 한숨을 쉬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안의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흘러갔다. 그러니까 너는 평행세계의 나고, 지금 나를 도와주러 왔다는 거지. 그게 아젬의 술식이랑 다른 게 뭐지? 하는 거대한 낫을 든 이안 옆에서 우리의 이안 허드슨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였다. 뭐지, 이 태도는? 심부름센터에 의뢰를 넣은 적이 없는 사람 치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안의 존재를 긍정했다. 아마도 이 이안은 평행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한참 전에 이해하고 받아들였나 보다.

 

그래도 저 태도는 뭐냐, 저 태도는. 마치 밥 먹듯이 평행세계의 사람들을 소환해다가 자신의 일을 돕게 만든다는 듯이. 틀려?

 

“어, 아니? 맞는데?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거잖아.”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서 중얼거리고 있었나 보다. 이안은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러니까, 어디서 주웠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는 고대 술식을 이 별을 구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고.”

“응.”

“그래서 지금 임무는 뭔데?”

“아, 별을 구하는 건 끝났어. 그거 하고 싶었으면 약간 늦었는데.”

“그래서 지금 해야 하는 게 뭐냐고.”

“어… 연구실을 탈출한 거대 수중식물들 처리하기?”

“...”

“미안, 근데 이거 시간제한 있어서.”

“얼마 남았는데?”

“3분.”

“3분?!”

 

앞으로 시간제한 같이 급한 일이 있으면 두괄식으로 말하라고 단단히 일러둬야겠다고 생각한 이안은 앞으로 먼저 뛰쳐나가며 외쳤다.

 

“딜러 둘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의 예상은 맞았다. 딜러 둘은 3분 안에 돌발 임무를 해치우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도 이 라바린토스라는 지역에는, 아니, 에오르제아 전역에는 돌발 임무들이 “돌발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는 것 같았지만 우선은 한 건을 해치웠으니 됐다. 지쳐서 풀밭에 털썩 주저앉은 이안 옆에 낫을 든-리퍼라고 칭하기로 했다-이안이 따라 앉았다.

 

“원초세계에서의 첫 임무치고는 나쁘지 않지? 아, 심부름센터 어쩌구 사람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바로 돌아가지 않는 건가 봐.”

“대가를 받는 것까지 마쳐야 하거든.”

“대가? 대가는 뭔데?”

 

순진하게도 주머니에 뭔가 들었을까 쑤시고 있는 저 리퍼 이안을 대체 어쩜 좋나 하고 이안은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받을게. 일단 좀 쉬자. 3분이 뭐야, 실질적으로 2분 40초라서 아슬아슬하게 끝냈잖아.”

“미안. 원래 이렇게 사소한 일로는 안 부르는데 혼자서 돌발 임무 돌기가 너무 고역이라서.”

“하긴, 시간이 걸려서 문제였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어 보이는데. 이런 것까지 하는 이유가 있어?”

“한동안은 올드 샬레이안에 붙어 있기로 했거든. 그런 겸사겸사 치안도 봐주고 하는 거지. 아, 커피 쿠키 먹을래? 엄청 많이 있는데.”

 

이안이 쿠키가 가득 들어 있는 보따리를 꺼냈다. 대체 그 안에 어떻게 다 들어가는 거지. 공간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지난 시즌 음식이라 좀 남았는데, 이젠 잘 안 팔려서 그냥 수련할 때 먹고 있어. 도움이 되거든.”

“...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3% 정도?”

 

그게 그렇게 딱 나오는 숫자인 거야? 아니 그보다 적어!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퍼 이안은 또각또각 커피쿠키를 먹고 있었다. 이안은 조금 더 그를 추궁해 보기로 했다.

 

“그럼 여기는 올드 샬레이안…이라고 불리는 곳이야?”

“정확히는 올드 샬레이안 지하에 있는 라바린토스라고 하는 연구 공간.”

“이게 전부 다 연구용이라고?”

 

이안이 되물은 이유가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라바린토스는 거대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상층부였는데, 하층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이안의 경악을 알아챘는지 리퍼 이안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서 일말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샬레이안은 지식의 도시거든.”

“너도 샬레이안 사람이야?”

“그건 아니지만, 여기 마법 대학을 나왔. 제2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지.”

 

흐음, 그렇구나. 이안은 잠시 동안 이 모든 정보를 검토했다.

 

“그래서 올드 샬레이안에 남아 있기로 한 거야? 왜, 별을 구하는 모험은 끝났다며.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아… 그게, 음, 내 입으로 말하려니 갑자기 부끄럽네.”

 

저건 분명히 리콰이드와 관련이 있다. 저렇게 몸을 배배 꼬는 걸 보니 리콰이드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그는 리퍼 이안이 한참 공상에 빠지려는 것을 싹둑 잘랐다.

 

“리콰이드지?”

 

리퍼 이안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 아니, 평행세계의 나라고 했지. 그럼 너도 리콰이드를…”

“그런 셈이지.”

“역시 다른 세계에서도 그렇구나…”

 

리퍼 이안은 자신이 리콰이드를 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안은 그런 리퍼 이안이 또다시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안은 이어서 그를 채근했다.

 

“이쪽 세계에서는 어떻게 됐는데?”

“.......”

 

입을 다문 리퍼 이안 너머로 이안도 예상치 못하게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 장면은 흐릿하더니 점차 또렷해져 선명히 읽어낼 수 있었다. 이안에게는 마치 마력의 흐름을 통해 과거를 읽어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다시 리퍼 이안과 눈을 마주하자 그는 적잖이 놀라 보였다.

 

“잠깐, 설마 초월하는 힘으로 과거를 본 거야?”

“초월하는 힘?”

“그래, 방금 에테르를 통해 과거를 봤잖아. 뭘 봤는지 말해 줄 수 있어?”

“그야… 네가 리콰이드에게 공개고백키스를…”

“그만! 거기까지! 그만! 그만 들어도 괜찮아! 그리고 역시 초월하는 힘으로 본 것 맞잖아!”

 

아니래두. 하지만 여기선 적당히 넘어가는 게 맞겠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아, 이제 난 몰라…”

 

이안은 좌절하고 있는 리퍼 이안을 다독였다.

 

“왜, 리콰이드도 놀라긴 해 보였지만 질색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금 같이 올드 샬레이안에 머물고 있는 것 아니야? 기회를 준 거잖아.”

“응…  그렇지만 솔직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래서 라바린토스에 나와서 돌발 임무만 하고 있던 거로군. 이안은 드디어 거대 수중 생물과 이 이안 허드슨의 상관관계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잠시간의 생각 끝에 그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네게 리콰이드란 어떤 존재인데?”

“음… 그거 어려운데.”

 

다행히도 그 질문은 이안의 사고를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곧 리퍼 이안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충실하게 답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스승이자 좋아하는 사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음… 그리고 정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랄까?”

 

고르고 고른 말 한마디에 리퍼 이안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끄러움, 멋쩍음, 그러나 그런 감정은 단 하나,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기인했다. 리콰이드에 대한 그의 감정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기대로.

 

이안은 그것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렇구나, 그 감정은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분명 갓 떠오르는 샛별과 같은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안의 입가에 자연스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걸 그대로 전해 보는 건 어때? 리콰이드도 이렇게 도망치는 것보다는 그 편을 더 좋아할 거야.”

“공개고백키스를 했는데도?”

“그건, 끙, 그래. 공개고백키스를 했는데도.”

 

리퍼 이안이 풀밭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기분 좋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바로 리콰이드를 만나고 와야겠어. 여기서 기다려줄래?”

“아니,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거든.”

“아! 그러고 보니 보수를 줘야 했지? 어떤 걸 원해? 지금 당장 거래 가능한 희귀한 물품은 없지만 길이라면…”

“괜찮아, 이미 보수는 받았으니.”

 

리퍼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제 한 번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고맙게 들을게.”

“나야말로 고마웠어! 그럼 잘 있어, 이안!”

 

그가 몸을 돌려 리콰이드 쪽으로 달려가기 전에 보였던 환한 미소는 라바린토스의 인공 태양보다도 밝았다. 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이안은 혼자 옅게 웃었다. 커피쿠키라, 한동안 먹을 일 없는 간식이었다.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안 허드슨과 하구레모노  (0) 2024.11.04
이안 허드슨과 베일을 두른 하툰  (0) 2024.11.03
이안 허드슨과 우마머스마  (0) 2024.10.30
기회주의자  (0) 2024.10.07
04 은막  (0) 2024.06.04
이안 허드슨과 우마머스마
2024. 10. 30.

https://youtu.be/qakZV0zWX4U?si=YthGjEXW05nZiHks

 

 

우마무스메.

 

그녀들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때로는 기구하고, 때로는 눈부신 역사를 가진 다른 세계의 이름을 지니고 태어나 

그 영혼을 이어받아 달린다.

그것이 그녀들의 운명.

 

‘그건 알겠는데 말이지–!’

 

이슬이 떨어지는 잔디밭. 갓 동이 튼 하늘이 눈앞에 시원하게도 펼쳐진다. 이안 허드슨은 새벽 공기를 깊이 들어마쉬었다 내쉰다.

 


 

사실 심부름센터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그리 나쁘지 않은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의뢰를 안 받은 지도 한참 되었으니까 말이지, 옛 친구들과 다시 연을 이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처음 심부름센터를 열 때의 이안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리콰이드를 얻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떠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리콰이드와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그는 새 연인과 보내는 시간이 점차 많아졌고, 목적을 달성했던 심부름센터는 그 뒤로 잠정 폐쇄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 심부름센터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물론 이안에게는 이안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심부름센터를 처음 열었을 때와 같이 이안에게는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이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런 기이한 예감까지 들기도 했다. 그동안 겪어 왔던 운명의 실타래가 또 다른 방향으로 풀려, 예상치 못한 만남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이안이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의뢰자는 어떤 형태로든 “이안 허드슨” 혹은 그 등가여야 할 것. 의뢰 내용은 자유. 보수는 단 한 가지,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것.

 

그렇게 이안이 무수히 많은 평행 세계로 전단을 돌린 다음 날, 그는 집 앞에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편자 모양…? 처음 보는 특이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어느 학교에서 보낸 것 같은데. 이안은 망설임 없이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현재.

 

이안이 눈을 뜨자 그는 낯선 곳에 있었다. 편지가 독로의 일종 같은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눈앞에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자기 자신. 뭐, 의뢰자가 이안 허드슨이어야 할 것이라고 조건을 걸어 놓은 이상 평행 세계의 자신을 만나리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 그런데 이안을 당황시킨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귀… 그리고 꼬리?”

 

그 말에 쫑긋 하고 선 귀와, 이따금 재촉하듯 움직이는 검고 긴 꼬리. 다른 어느 동물도 아닌 말 꼬리 같았다. 봉긋 아담하게 솟아 있는 가슴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정도는 여체화를 했다고 칠 수 있지만, 장난감 머리띠가 아닌 정말 케모미미를 한 자신을 보니 어쩐지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눈앞의 귀와 꼬리를 단 자신은 정말로 의뢰서가 작동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적응력이 뛰어난 이안 허드슨 답게 곧 붙임성 있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심부름센터 사람인가 보네! 그럼 잘 부탁해, 일일 트레이너!”

“트레이너…?”

 

귀와 꼬리를 단 이안 허드슨… 그러니까 짧게 우마머스마라고 하자, 이안은 생각했다. 아무튼 이 우마머스마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하더니 곧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의뢰서에 그렇게 작성해 뒀거든, 일일 트레이너를 부탁한다고. 아무래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네.”

 

그야 제대로 읽어보기도 전에 독로가 작동했으니까, 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생각도 없었으니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하고서 이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트레이너라면 뭘 하면 돼? 어떤 트레이닝인데?”

“쉽게 말하면 레이스야. 달리기 경주인 셈이지. 트윙클 시리즈는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스포츠인데, 으음, 너무 설명이 길어지려나. 어쩔 수 없지, 따라 나와!”

 

음, 생긴 것과 더불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걸 보니 이안 허드슨은 확실히 맞는 듯 싶었다. 혹시나 누군가와 마주쳐 오해를 할까 봐 둘은 남매 사이인 것으로 말을 맞춰 두고는 두 사람은 이른 시간의 복도를 걸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람은 적었지만, 간간히 운동복을 입고 마찬가지로 말꼬리를 단 사람들이 이안과 인사하며 지나쳤다.

 

“꽤 알려진 얼굴인가 보네.”

“트레센 학원은 기숙학원이라 다들 건너건너 아는 사이거든. 나는 아직 데뷔도 안 한 풋내기지만 말이야. 아, 설정상 오빠인데 반말 해도 괜찮겠지?”

 

이안은 마찬가지로 평행 세계의 본인과 남매 사이가 되어도 거리낌이 없는 건 이안 허드슨의 특징인가 생각했다. 그렇지만, 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저 이안의 입장이어도 그리 다르게 반응하지는 않으리라 싶었다.

 

두 사람이 얼마 걷지 않아 커다란 운동장이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벌써 몇몇의 학생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우마머스마 이안은 짐을 한쪽에 내려놓고 툴레툴레 계단을 내려와 잔디밭 위에 섰다. 그제야 조금 운동 선수 다운 모습이 나온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일단은 가볍게 한 바퀴 돌고 올게. 타임 부탁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바람과 같이 날아갔다.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이안은 엇박자로 타이머의 버튼을 눌렀다. 이미 그는 저 멀리 첫 번째 코너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새삼 오는 길에 이안과 나누었던 대화가 체감으로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스피드, 그리고 그 스피드를 버틸 수 있는 강인한 다리.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위해 달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갈까. 생각은 오래 지나지 않아 타이머의 스톱 버튼과 함께 멈춘다. 옆에서 우마머스마 이안은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는다. 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걸려 있다.

 

“어때, 나쁘지 않지?”

 

그 말에 이안도 어쩔 수 없이 그 웃음을 돌려준다. 방금 그가 보여준 달리기는 이안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거는 스퍼트, 도저히 두 눈을 믿을 수 없는 가속력은 한순간이나마 공기를 뜨겁게 만들었다. 분명 그 두 눈에 희망을 거는 팬들도 적지 않아질 테지. 이안은 한순간이나마 그를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불가능조차 해내 보여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잡겠다는 불굴의 의지. 그런 것이 잠깐이나마 이안과도 공명한 것 같은, 그런 욕망이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규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트레이닝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얌전히 트랙에서 달리고 있는 우마무스메들과 달리 이 우마머스마 이안에게 트레이닝이란 다른 개념인 것 같았다. 하천 부지를 달리는 것은 당연이고, 수영, 근력 트레이닝, 장기 두기, 신사의 계단 오르내리기, 등산까지. 물론 따라다니기만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지칠 일은 없었겠지만, 이 우마머스마는 기왕 ‘일일’ 트레이닝인 만큼 자신의 트레이닝에 동참해주기를 원했다. 

 

이안허드슨, 이 말귀도 못 알아먹는 자식아, 아무리 내가 이안 허드슨이더라도 우마무스메와 일반인에는 태생적인 한계 차이가 있단 말이다! 결국 하루가 끝나고 이 막무가내 우마머스마의 방에 돌아왔을 때 이안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우마머스마 이안이 사과의 의미인지 에너지 드링크를 건넸다.

 

“미안, 미안. 그렇지만 생각보다는 잘 따라왔어.”

 

그야 마법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숨을 쉬고 있지도 못했을 거다. 평소라면 이런 용도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이안은 어떤 일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은 에너지 드링크를 꿀꺽꿀꺽 다 마쉰 뒤 앉아 있던 침대에 뒤로 엎어졌다.

 

“일반인에게 이런 걸 시키면 탈진해서 죽어, 알겠어?”

“알았다니까. 어쨌든 너도 일반인은 아닌 거잖아?”

 

이안이 누워 있다가 슬 몸을 움직여 우마머스마 이안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는 딴청을 피우며 변명을 했다.

 

“시험하려고 한 건 아니니까! 그냥, 갑자기 마법적으로 평행세계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잖아? 물론 어떤 일에도 도움을 주겠다고도. 그러면 뭔가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물론 다 끝난 다음에 까먹는 건 아쉽지만.”

 

그런 효과를 노린 건 맞았지만, 이 우마머스마는 지나치게 위험 의식이 없었다. 이안은 반동으로 한 번에 다시 몸을 세워 앉았다.

 

“리콰이드는?”

“어?”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어오자 우마머스마 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은 원정을 가서 없는데… 큰 레이스가 있거든.”

 

그래서 하루종일 안 보였던 거로군, 하고 이안이 결론을 내리는 와중에 우마머스마 이안이 발랄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그 침대 리콰이드 거야. 룸메이트 사이라서.”

“뭐?!”

 

이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나서 뭘 할 수 있겠는가. ‘리콰이드’ 쪽 침대와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별달리 특징이 없었다. 빼곡하게 적혀 있는 연습 일지라던가, 대회 날짜를 동그라미 친 달력 등을 빼면. 이안은 다시 리콰이드의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그렇구나…”

“뭐야,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아니, 그냥.”

 

이안은 고개를 돌려서 탁상 위 고이 접혀져 있는 리본에 눈길을 주었다.

 

“신기하구나, 싶어서.”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상대쪽 이안 또한 이런 시간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줄 줄 아는 듯 했다. 이런 면까지 리콰이드에게서 점수를 땄을까. 다시 먼저 입을 연 것은 자신이었다.

 

“리콰이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진지한 질문이지?”

 

우마머스마 이안은 이안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 라이벌이자 목표, 그리고 내가 달리는 이유…겠지.”

“달리는 이유라.”

 

우마무스메는 달린다. 그는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그것이 삶의 사명이며 죽음 또한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안 허드슨은 여기서 고백한다. 리콰이드 던이 자신이 달리는 이유라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이유라고도. 삶과 죽음이 하나의 동전이고 우마무스메의 달리기가 그 동전이 테이블 위에서 굴러가는 회전이라면.

 

이안은 비스듬히 누워서 평행세계의 자신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아까의 골똘히 생각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알 것 같네.”

“그렇지? 역시 이렇게만 이야기하고도 통하는 게 있다니 자기 자신이라 그런가?”

“완전히 알겠다고는 안 했거든.”

“엑.”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리콰이드 쪽의 침대에 꾸물꾸물 들어가 눕는다. 거의 소등 시간이 다 되었다. 우마머스마 이안도 나름대로 대화에 납득했는지 이불을 덮는다. 불이 꺼지고, 가벼운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정적을 깨는 것은 우마머스마 쪽의 이안이다.

 

“있잖아,”

“응?”

“고마워.”

“왜?”

“사실 리콰이드가 원정을 간 이후로, 나는 아직 전담 트레이너도 없는데 리콰이드는 멀리 앞서나가는 것 같았거든. 그런데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나니 조금 확신이 생겨. 달리면 되는 거지?”

“......”

“있는 힘껏, 달리면 되는 거지?”

“......그래.”

 

밤하늘의 별자리가 누워 있는 두 사람 가운데 난 창으로 비춰져 천장을 수놓았다. 이안은 상대 쪽의 이안이 깊게 잠들고 난 후에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어떤 조언이 좋았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마무스메는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안 허드슨과 베일을 두른 하툰  (0) 2024.11.03
이안 허드슨과 커피쿠키  (0) 2024.11.02
기회주의자  (0) 2024.10.07
04 은막  (0) 2024.06.04
03. 비희悲喜  (0) 2024.05.27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