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
2022. 8. 27.

※CoC 시나리오 《관계의 종언》 스포일러 주의

 

 

이안이 눈을 뜬 것은 늦은 오전이었다. 벽걸이 시계에 눈길을 줄 필요는 없었다. 옆자리의 리콰이드가 느긋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이나 자세로 미루어 판단했을 때 한참은 그러고 있던 모양이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느지막한 아침 햇살이 훤했고,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가 고요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안은 졸음이 가시지 않은 채로 몇 번 뒤척였다.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어젯밤 뜻밖의 몸고생을 한 탓인 듯했다.


"일어났어?"


그는 제대로 리콰이드를 바라보려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눈부신 탓에 자연스레 눈이 찡그려졌다. 잔뜩 잠긴 목소리는 성대를 살짝 긁는 소리를 냈다. 기억이 슬슬 돌아오자 물어볼 것이 많아, 이안은 목을 한번 더 가다듬었다.


"몸은 좀 괜찮아?"


그 말을 듣는 리콰이드는 평온해 보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던데.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하고. 리콰이드가 악몽이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덜컥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안은 밤새 땀을 닦아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랬다. 그러다 어느새 잠든 건지 눈을 떠 보니 지금이다. 그를 간호해야 하는 자신이 되려 늦잠을 자버렸다는 사실에 머슥해하고 있을 때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멀쩡하다."


첫음절에 바람 소리가 들어가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안의 주관적인 의견을 묻자면 그다지 신빙성이 가지 않는 대꾸였다. 일단 일어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앉자 리콰이드가 천천히 물러났다. 이불과 시트가 구겨지면서 빳빳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환한 햇살 덕분에 이안은 한층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리콰이드가 예의 그 무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안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어제 많이 당황했어. 크게 다친 것 같아서..."
"그래, 싸움이 있었지. 내가 다친 건 아니다. 조금 다친 것도 무사히 치료했고. 심각한 건 아니야."


그런 것 치고는 피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침실이 그가 묻히고 온 피로 흥건했다. 빨갛게 젖어가는 타일과 붉은 손자국이 남은 손잡이. 번쩍번쩍 지나가는 기억에 잠시 머리가 아팠다. 이안은 털어내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부터 실랑이를 할 필요는 없다. 슬슬 리콰이드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기에 그는 화제에서 슥 빠져나갔다.


"임무는 잘 마치고 왔고?"
"꽤 난감했었지... 그래도 잘 마쳤어."
"당신이니까."


의외의 답변이다. 그런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무언가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긴 했지만... 리콰이드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상당한 위기였나 보다. 하긴, 원래부터 쓸데없이 걱정시키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 인물인데 어제 그런 모습이었으니. 그래도 이안은 리콰이드의 말대로 그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자신이고, 숱한 위험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의무와 사명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체험했다. 그렇기에 그제 임무가 있다는 그를 배웅할 때도, 어제 피를 뒤집어쓴 채로 마주했을 때도, 놀랐을지언정 불안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그가 돌아오리라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안은 그가 다녀온 임무 이야기를 들었다. 머나먼 이경에서 이곳과 같은 하늘, 같은 구름을 하고서 아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세상. 올 하나 풀린 것 없이 모든 것이 같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들. 그런 세계를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스스로도 모르게 흡수될지도 모른다. 리콰이드의 말마따나 무엇이 달라졌는지도 눈치채지 못하는 채 휩쓸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도 리콰이드 던이 있어 그를 따라가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이안은 흥미로운 공상을 내려두었다. 결국 일이 끝난 다음 리콰이드는 그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것만은 불변의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시계를 본 두 사람은 다음 일정으로 장을 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리콰이드가 이안에게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 이유로 식사를 차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일단은 따라 주는 수밖에. 마침 날이 좋아 외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다. 이안은 주말 오전의 나른함을 개어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장바구니를 하나 들려 주면 리콰이드가 생각을 바꾸려나.


리콰이드가 드레스 룸에서 서랍을 뒤적이는 동안 이안은 침실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욕조에 핏물을 빼려고 물에 담궈 둔 셔츠와 바지가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물은 이미 진홍빛이었다. 장을 보고 돌아와서 어떻게든 저것을 해결해야지. 이안은 허물 같은 옷가지를 노려보다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새 옷을 갖춰 입은 것인지 리콰이드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위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겹쳐졌다. 이안은 물을 세게 틀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어젯밤의 예상치 못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인 날이었다. 준비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면 리콰이드가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이고, 고맙다며 입을 맞춘 다음 외출하기 전까지 잠시간 고즈넉한 시간이 이어지겠지. 이안이 좋아하는 주말 오전이었다. 그런 평온 속에서 그는 조금 전 리콰이드가 해 준 세상의 이야기를 상기했다.


무엇 하나 다른 것 없는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이런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이상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을까. 이안은 조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설령 그런 유혹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수락할 이유가 없다. 리콰이드의 진심이 담긴 세계를 버리고 다른 진실을 수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매일 아침 그의 곁에서 눈을 뜨고,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로는 손을 잡기도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는 세계. 이윽고 밤이 오면 나란히 누워 이만 잘까, 하고 눈을 감을 수 있는 소중한 날들. 리콰이드 또한 자신만큼이나 이 시간을 소중히 하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가 떠나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언제 뒤돌아보더라도, 그만큼은 자신 곁에 있을 것을. 이안은 세상의 그 누구라도 부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사랑을 하고 있구나. 거울 너머로 앞머리에서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얼빠져 보였기에, 이안은 그 모습을 보다가 킥킥 웃었다.

 



두 사람이 마트에 도착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제 받은 전단지에 적힌 대로 대대적인 세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주말이어서 그런 것인지 사람이 북적였다. 인파에 휩쓸릴 각오는 해야겠는걸, 하고 생각하며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끼리, 연인이나 친구끼리, 혹은 혼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행과 떨어지기라도 했다가는 고초를 겪을 것이다. 이안은 카트를 끌고 오는 리콰이드의 손을 냅다 잡았다. 의아하다는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그는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이렇게 하면  헤어지지 않겠지? 손 놓기 없기야."


단단한 손이 얽히는 데서 따스함이 있었다. 리콰이드는 잠시 잡힌 손을 내려다보더니 마주 손가락을 감았다.


"... 그래. 너나 놓지 마."


이안은 그 말에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만나기 시작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단 둘이 있을 때면 묘한 설렘이 있었다. 비록 배경이 식료품을 담은 선반에, 끝없이 이어질 듯한 창고형 마트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랴. 마냥 좋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주위 사람들이 만년 신혼이라고 말할 때도 이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일 뿐 잡은 손을 놓지 않곤 했다.


안타깝게도 맞잡은 손은 우유 두 팩의 성분을 비교하기 위해 떨어져야 했다. 리콰이드는 '우유가 거기서 거기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무지방을 살지 저지방을 살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안 앞에서 그런 말을 건네지 않을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다음 원래 사던 버터와 세일하는 신제품 앞에서도, 샐러드 드레싱 코너 앞에서도, 제철이라 달다는 과일 매대 앞에서도 두 사람의 손은 번번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손을 맞잡아왔다. 의식하지 않고 되찾아오는 흐름처럼, 이안은 그 손이 좋았다. 엷은 살결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기도 하고 괜히 꼭 힘을 주기도 하며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이 미는 쇼핑 카트 위에 식재료가 차근차근 쌓였다. 달걀, 오렌지, 시리얼, 잼과 스콘, 미트 파이, 소시지, 크림과 베이컨, 칵테일 새우, 샐러리와 적양배추, 큼지막한 오리... 리스트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류 코너 앞에서 서성이는 리콰이드를 보고 이안은 한 술 더 떠서 사과주를 한 병 담기도 했다. 커다란 카트가 꽉 찬 것은 당연지사다. 담을 때 신나게 담고, 물건을 계산할 때까지만 해도 이안은 맛있는 것을 해 먹을 생각에 잔뜩 들떠서 카드를 긁었다. 그가 조금 지나쳤나, 하고 생각한 것은 장바구니에 물건을 옮겨 담으며 선택의 무게를 체감한 후였다.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지? 이웃을 초대해서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 아니야? 생각의 흐름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스마트폰의 벨소리였다. 마침 이안은 우유를 몇 리터까지 동시에 들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재빨리 리콰이드에게 부탁하는 눈짓을 했고, 리콰이드는 손에 들린 설탕 봉지를 내려놓으며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네 ■못은 아무■■ 없■."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노이즈가 잔뜩 껴 겨우 음절을 분간할 수 있는 정도였다. 몇 군데를 놓친 탓에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화는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잠시 머물렀던 소강상태의 침묵이 마트의 소란스러운 웅성임으로 뒤덮였다. 그가 고개를 들자 리콰이드도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팸인가?"
"잘못 걸려왔을 수도 있고, 당신 말대로 스팸일 수도 있고... 이상하게 요새 그런 전화가 많이 오더라."
"뭐 이상한 홈페이지라도 가입한 거 아닌가?"


리콰이드의 말에 이안은 최근 개인정보를 기입한 사이트를 되짚어 보았다. 지난번 휴가 때 숙소를 예매하려고 가입한 멤버십, 치즈를 세일하길래 냅다 등록해둔 홈페이지... 곰곰이 생각해도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이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디선가 새어나갔나 봐. 차단해둬야겠어."


아까 리콰이드에게 대답한 것처럼 확실히 이상한 전화가 많이 오긴 했다. 문자도 몇 번 오나 싶더니 금세 사라져 있고, 개인정보를 소홀히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리콰이드라고 생각해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목소리를 판별하기에는 짧고, 몇 마디 들리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말과 함께 엇박으로 들리는 숨소리에서 무언가를 읽어냈다고 착각해서일까? 그렇지만 리콰이드는 눈앞에 있는걸. 어딘가로 떠나지도 않고, 자신 탓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까이 선 리콰이드 옆에서 이안은 큰 고민 없이 번호를 스팸으로 등록했다.


"가서 마저 하던 거 해야지. 오늘은 누가 점심을 해 준다며. 저녁인가?"
"점심이야."


고개를 들고 바라본 리콰이드는 작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안은 리콰이드에게도 잘 보이게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시간은 정오에서도 몇 시간 지나 있었다.


"점심이구나."
"점심이라고."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이안은 샐쭉 웃었다. 어제 일로 걱정한 것 치고는 리콰이드도 평소처럼 보였다. 이제는 자신이 지나치게 당황했던 것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렴, 아까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평소의 주말, 평소의 오후라고. 집으로 가는 길은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타서 드라이브를 하자. 이안은 다시 리콰이드의 손을 잡았다.

 



장바구니를 널찍한 주방에 내려놓은 다음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였다. 달걀은 달걀 상자에, 시리얼은 찬장에, 좀 이따 마실 과실주는 저 옆 한편에. 각종 식재료가 작업대 위로 딸려 나왔고 예열을 위해 오븐의 불이 켜졌다. 리콰이드는 스튜라도 만들 요령인지 감자나 브로콜리 따위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안은 커다란 오리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고민했다. 원래라면 이때 즈음 장난스런 농담을 건네거나 뒤에서 와락 안기도 했겠으나 앗차, 리콰이드가 칼을 들고 있었다. 쌍검만큼 무섭지는 않아도 마검이든 식칼이든 칼을 든 리콰이드는 위협적이었으니 이안은 자제하기로 했다. 대신 이안은 자신도 칼을 들어 오리를 손봐 주기 시작했다. 내장과 지방도 버리지 말고 그레이비 소스라도 만들어 볼까. 스터핑으로는 양파와 레몬, 생강을 넣자. 대강 준비가 끝나고 오리를 오븐 안으로 밀어넣으면 한동안 할 일이 없었기에, 이안은 계속해서 리콰이드 곁을 기웃거리면서 다른 메뉴라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파스타를 곁들인 감바스, 찍어 먹을 식전 빵도 잘라 둬야겠지. 아까 제쳐 둔 그레이비도 만들고, 디저트로 먹을 오렌지도 잘라 두자. 리콰이드가 쓰다 남은 감자로는 으깬 감자 샐러드를 하고, 버터도 듬뿍 넣어야 맛있다. 새로 산 샐러드 드레싱에 구운 가지를 같이 먹어 볼까. 한참 움직이다 보면 리콰이드가 만지작거리던 스튜가 다 되었는지 간을 보라며 손짓을 한다.


"맛있는데?"
"잘됐군."


이안은 그 옆에서 당신이 근래 한 요리 중 가장 맛있었다는 둥(사실이다) 몇 마디를 더 얹다가 기어코 주방에서 내쫓긴다. 어차피 오리는 한 시간은 더 구워야 하고, 리콰이드는 간만에 플레이팅에 공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자리를 비켜 주는 편이 낫다. 이 김에 집안일이라도 할까. 아침에 급하게 나왔으니 화장실 정리라도 할 겸 이안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부산하던 주방과 다르게 위층은 고요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에 빛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복도마다 걸린 두 사람의 사진들. 손님이 오가곤 하는 일층과 다르게 여기는 두 사람만의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집의 구조도, 가구도 열일곱 살의 이안이 기억하는 그대로. 작은 모퉁이나 문지방 하나라도 그간의 추억으로 빛바래 있다. 이안은 유난히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결혼사진의 액자를 만지작거리다 지나친다.


화장실의 조명을 켜면 새파란 등이 햇빛과는 사뭇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문을 짚고 들어서는 이안에게 리콰이드가 좋아하는 방향제의 냄새가 훅 끼친다. 칫솔은 몇 시간 전 사용한 그대로 끝이 조금 젖어 있고, 텅 빈 욕조는 며칠 전 청소한 보람이 있는지 반지르르한 윤택을 낸다. 지금 쓰고 있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큰 걸로 바꾸자고 해 볼까. 이안은 막상 화장실에 들어오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욕조에 걸터앉아 블라인드 사이로 창 밖을 내다봤다. 이 동네는 주택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한낮 주말에도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안은 처음 이 부근 집값을 들었을 때 경악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학생이라 사회인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는데,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백 년 하고도 몇십 년을 앞서간 걸 어떻게 따라잡는단 말인가? 지금 와서는 그다지 의미 없는 생각이다.


이안은 일어나 칫솔이나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길 잃은 단장이라도 들어와서 세면도구에 빙의하면 큰일 아닌가. 출근 준비라는 전쟁 속에 칫솔에게 습격당하는 이벤트를 추가할 필요는 없다. 얼마 남지 않은 화장지도 그렇고, 반쯤 찬 쓰레기통도 비우면서 괜히 부산스럽게 굴었다. 한참 배스 솔트를 효과적으로 수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아래층에서 이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 다 되었어?"


쿵쿵 소리를 내며 층계를 내려가자 벌써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이안이 짐작한 것처럼 리콰이드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는지 부엌과 이어진 다이닝 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중앙에는 레몬을 채워 넣고 통째로 구운 오리, 곁에는 크랜베리와 그레이비 소스, 그 주위로 샐러드와 갓 데운 빵, 으깬 감자, 오일 파스타와 감바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크림 스튜에 끝나고 입가심을 할 과일까지. 식탁은 두 사람이 준비한 음식으로 가득 찼고, 조금 남은 공간마저 장식품과 개인 접시, 그리고 각종 식기가 즐비했다.


"왔군, 앉아라."
"이건 점심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창하지 않아?"
"흠."


이안은 리콰이드가 와인잔을 두 개 들고 오는 것에 맞추어 의자를 뒤로 뺐다.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입맞춤을 받은 리콰이드가 자리를 잡고, 이안이 빈 잔을 채우기까지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 아까우니까 저녁으로 하자."


쨍,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와인잔이 부딪쳤다. 이안은 와인잔 너머로 자신을 흘기는 리콰이드에게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건넸다. 옅게 탄산이 올라오는 음료는 처음엔 달고 끝 맛은 쌉싸름했다. 분명 사과주 말고 사과주스를 마시자고 했는데,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이안이 오리를 해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무슨 일이야?"
"어제?"
"지쳐서 늦게 들어왔잖아. 임무라도 있었어?"
"어제는 서류 작업밖에 없지 않았나. 그렇게 늦은 기억도 없군."


이안이 스튜를 떠서 한입에 냠 물었다. 리콰이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랬나? 체감상 늦었다고 생각했나 봐. 요즘 해가 일찍 지잖아."
"일찍 들어오라는 네 방식의 잔소리인가?"
"그럴 리가."


대여섯 가지의 식기를 예법에 맞게 사용하는 것은 몇 번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체화된 것처럼 능숙하게 각종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오가는 리콰이드와 달리 자신이 없는 이안은 식기를 집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선택이 정답인지 확인하려 흘끔흘끔 리콰이드 쪽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눈치를 보는 꼴이 되었다. 언뜻 마주친 눈은 즐거운 기색을 띄고 있었기에 이안은 연신 사과주만 들이켰다. 이 정도로 취기가 오를 리도 없는데 얼굴이 홧홧했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로 입가심까지 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물론 이안의 예상대로 두 사람이 먹을 양보다 지나치게 많았기에 음식은 남았고, 차갑게 식은 오리는 먹기 좋게 살이 발린 그대로 냉장고 안에 자리 잡았다. 내일 아침에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남은 스튜와 함께 해치우면 딱 좋겠네, 하는 이야기를 싱크대의 물줄기 소리가 덮었다. 세팅은 당신이 했으니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는 이안의 주장은 순순히 받아들여져, 리콰이드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이안은 켜켜이 그릇을 쌓았다.


젖은 머리를 털면서 내려오는 서경을 맞은 것은 거실에 늘어져 있는 이안이었다. 시간은 아직 초저녁이라 사위가 밝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시간. 리콰이드는 짧게 웃으며 이안 옆에 자리 잡았다.


"그것 조금 했다고 지친 건가?"
"플레이팅 한다고 그릇을 너무 많이 썼어... 냄비도 그때그때 닦았어야 했는데."


옆자리에 무게가 실리자 이안은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채 마르지 않은 리콰이드의 머리카락이 맞닿은 그의 웃옷에 물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그런데,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시 본 이안의 눈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리콰이드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아하. 들어나 보지. 무엇을 바라나?"


이안은 한참 딴청을 피우며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러나 새침하려고 애쓰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아 마음을 정한 것은 꽤 이전일 것이다.


"입맞춤이라던가?"


키스를 조르는 그의 시선이 리콰이드의 입술을 짚고 넘어갔다. 그것을 놓칠 리가 없는 리콰이드는 조금 더 가까이 기대는 것으로 이 방자함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


"당돌한데."
"그래서 싫어?"


눈을 도르륵 굴리는 것은 이안이 부끄러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제는 손바닥 읽듯이 반응을 읽게 된 리콰이드가 마주 미소지었다. 그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기 직전 이안의 시선이 정확하게 리콰이드의 눈으로 향했다. 직감적으로 상을 받을 걸 아는 사람의 태도다.


"그럴 리가."


리콰이드가 기대온만큼의 거리를 이안이 좁혔다. 이안의 속눈썹이 나풀나풀 아래로 향하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가 두 사람의 형상에 남색 음영을 남겼다. 느리고 부드러운 것이 꼭 그들이 나누는 입맞춤 같았다. 방금 양치를 하고 나온 건지 리콰이드의 입에서 시원한 박하향이 나서, 이안은 부스스 웃었다.


"역시 칫솔에 단장이 빙의하면 곤란하겠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중얼거리는 이안의 머리를 리콰이드의 손이 꾹 눌렀다. 검은 머리카락이 잠시 가라앉았다가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한 번 더 하자."
"정에 호소하기로 한 건가?"
"한 번으로 안 될 것 같은 걸."
"끝도 없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콰이드는 이안의 짓궂은 웃음을 어느 정도 되돌려 주고 있었다. 이안이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탓에 두 사람의 입술이 장난치듯 몇 번 부딪치다 겹쳐졌다. 앞선 것보다 길고 다급했기에 멀어질 즈음엔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볼에 떠오른 홍조가 석양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안의 시선이 리콰이드에게로 향한다. 오롯이 리콰이드에게로, 그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굴곡과 그림자로, 물기를 먹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떨어지는 형태로. 그의 눈이 담고 있는 섬세한 감정과 욕망들, 그것을 둘러싼 방식과 가치들에.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는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본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자신을 가리키기로 선택한 것을 목격한다. 흘러나오는 것은 여과 없이 진실된 감정. 이안은 그것이 언제나 이어지리라는 확신으로 응한다.


의심할 필요도, 그럴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은 완전한 애정. 그것이 못내 좋았기에 행복했다. 더 이상 손을 놓을 필요는 없다. 만일 이상향이 실존한다면 비로소 이곳이겠지. 가장 익숙하고, 가장 친근하고, 가장 편안할 이곳. 시초부터 이안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으니까. 언제라도, 어디까지라도 바라게 될 것은 단 하나니까. 그것만으로 그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오직 리콰이드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진다. 그의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안의 세계는 완전해진다.


완벽한 사랑을 선보이는 리콰이드 앞에서 이안은 무너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평생 바랄 수 있는 것을 평생에 걸쳐 받았다. 그렇게 완전하고 전능한 것 앞에서 어찌 감히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찌 진심으로 날을 세우고 눈물 흘리게 할 수 있을까. 슬픔 한 점 없는 세계에서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안은 받아들인다. 당신 곁의 깊은 바닷속에서 잠들고 싶어. 부재중 전화나 피 묻은 셔츠나 점점 짧아지는 해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가졌으므로 눈치챌 필요조차 없다. 단 하나, 필요한 것은 당신의 애정이고 이 무결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기에.

 


그렇기에 이안은 행복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렇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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