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침
2022. 5. 19.

“이안! 네 이름 앞으로 택배 왔다!”

“지금 가요!”

 

평일 이른 아침. 어느 집마다 분주한 풍경은 비슷하겠지. 유런은 다시 한번 아들을 재촉하고는 반쯤 빈 잔에 다시 커피를 따랐다. 더 지체하다가는 음식이 식는 건 고사하고 학교에 지각할 텐데, 허둥지둥하는 건 본래 이안답지 않다. 아침에 운동을 나갔다 온 건 확실한데… 그 사이에 어디다 정신이 팔린 건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덮을 만한 소음이 위층에서 들려오자 유런은 아예 혀를 찼다. 유난히 큰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이안이 계단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 즈음이었다.

 

“지금 몇 시에요?”

“일곱 시 반. 택배는 내가 방으로 올려 둘 테니까 아침부터 먹고 가.”

“앗, 아니에요! 제가 지금..!”

 

유런은 교복 블레이저를 반쯤 입은 아들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내려와서는 손바닥만 한 택배 상자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조심스레 방으로 가져가는 것을 커피잔 너머로 지켜봤다. 이안은 잠시 택배를 뜯는 건지 조용해지더니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로 책가방을 달고 내려왔다. 또 뭐가 그렇게 뿌듯한 건지. 이안은 들뜬 기색으로 아침상 앞에 앉았다. 아슬아슬하게 온기를 잃지 않은 토스트가 바삭했다.

 

“중요한 물건인가 봐?”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부정할 거라면 토스트를 베어 물 때마다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라도 해 보지, 표정관리도 안 되는 통에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유런은 속으로 혀를 차며 이안 쪽으로 오렌지 주스를 밀어줬다.

 

“어제 늦게 들어왔던데.”

“그건 일…이 아니라, 친구네 집에서 과제를 하다가…”

“그래? 내가 아는 친구야?”

“음… 아마 모를 거에요. 새로 사귄 애라서.”

“흐음…”

 

이안은 유런의 눈초리를 열심히 모른 척하며 야무지게도 잼을 발랐다. 그 레퍼토리만 몇 번째 쓰는 거지. 몰래 놀러 나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유런은 이안이 들었으면 강력하게 항의할 생각을 속으로만 숨겨두었다. 그 와중에 이안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운을 뗐다.

 

“오늘,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어서 늦을 것 같은데...”

“저녁 늦게?”

“네, 대회가 곧이잖아요. 강호는 아니어도 다들 열심이에요.”

“얼마나 늦는데?”

“... 열한 시?”

“.....”

 

유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세상 어느 학교 오케스트라가 밤 열한 시까지 연습을 하느냔 말이다. 아무렴, 여섯 시까지는 하겠지. 저녁을 먹고 그 뒤로 어디로 빠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열 시 까지 데이트를 하고 바래다 주면 분명 집에 돌아오는 건 열한시 내외 즈음이 될 거고. 딱 맞아떨어지는 계산이 낯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들을 양육하는 도중 이런 어려움에 봉착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차라리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정식으로 이야기라도 해 주면 좋을 것을, 언제까지 숨길 생각인 건지. 얼빠진 얼굴을 하느라 이미 온 사방에 소문났다는 걸 아는지는 모르겠다. 유런은 제 앞에서 아직도 눈치를 보고 있는 이안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저녁 먹고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 둘게. 저녁 부실하게 먹지 말고 더 늦으면 연락해.”

“그럴게요!”

 

대답이나 못하면. 이안은 금세 얼굴이 밝아져서는 주섬주섬 책가방이며 겉옷을 챙긴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들려오는 인사와 함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나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유런은 드디어 소리 내서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수상한 외출은 애당초 작년부터 이어지고 있었지만, 근래 와서 늦은 밤까지 외출에, 갑작스러운 외박에… 사생활에 참견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부모로서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본래 성격 탓에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금방 소개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지. 그래도 학교도 안 가겠다며 방안에 꽁꽁 틀어박히던 작년보다는 훨씬 나으니 말을 얹지는 않겠지만… 부모인 자신이 나서서 캐묻는다면 대답이야 듣더라도 해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 일일이 단속한다고 해도 저 나이대 애들은, 특히 이안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아이라는 걸 유런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려니 믿고 존중해줄 수밖에 없나. 정말, 쟤가 언제 저렇게 커버렸담. 유런은 가볍게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해?”

“아!”

 

이안은 재빨리 들여다보고 있던 가방을 덮고 뒤를 돌았다. 벌써 수업이 끝났는지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수롭지도 않게 이안의 어깨를 툭 친 에이미는 팔짱을 껴고 이안을 내려다봤다.

 

“수업 끝났어?”

“한참 전에. 그래서 뭐 보고 있었어? 한참 전부터 불렀는데 대답이 없던데.”

“아, 이건… 별 거 아니야.”

“별 게 아닌데 이름 부르는 것도 못 들을 정도로 빠져 있던 거야?”

“미안… 지금 점심시간이지? 오늘 뭐 나온대?”

 

에이미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이안의 태도에 슬쩍 눈을 굴렸다.

 

“무슨 파스타였나… 특별한 건 없는데. 애들이 자리 잡아뒀을 거야.”

“기다리고 있겠네. 빨리 가야겠다.”

 

이안은 그 말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벌떡 일어섰다. 에이미가 무어라 말을 얹기도 전에 재빠른 태도로 가방 지퍼를 닫은 것은 덤이었다. 티가 안 나려고 해도 날 수밖에 없는걸. 에이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카페테리아에 자리 잡았는지 복도는 한산했지만 가끔 둘을 지나쳐 바삐 움직이는 몇몇이 보였다.

 

“요새 점심시간에 공부하는 애들도 많네.”

“그러게, 슬슬 A레벨 시험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너는 준비 잘 되어가?”

“나는 뭐…”

 

어색하게 웃어넘기는 이안을 보고 에이미가 눈을 가늘였다.

 

“튜터도 붙이고선 한참 바쁘다더니, 공부도 아니면 도통 뭘로 바쁜 거야?”

“그건 한참 전에 잠깐이었잖아! 그냥 스터디 좀 하는 거야. 클럽 활동도 있고”

“대회가 요 앞이었던가… 그런데 스터디는 누구랑 하는 거야?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 말하는 걸 잊어버렸나 봐. 아, 저기 올리버 지나간다.”

 

갑자기 얼굴이 밝아져서 지나가던 학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안을 에이미가 못 말린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말하는 걸 잊어버린다고, 천하의 이안 허드슨이? 말하면 안 될 이유가 있어서 말을 삼갔으면 삼갔지, 새로 시작할 정도로 관심이 있으면서 주위 친구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다니. 적어도 에이미가 이안을 지켜본 10년 남짓한 역사에 비추어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안 그래도 몇 달 새 들어서 갑자기 방과 후에 바쁘다면서 쌩하니 사라진다던가, 놀자고 하는 제안에도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는 일이 부쩍 늘었더니만… 평소처럼 무언가를 열띠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야기를 뚝 끊고 입을 닫아버리는 것도 그렇고. 마치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극비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 모양새다.  에이미는 인사를 마치고 무해한 얼굴로 돌아서는 이안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그래서 저번에 추천해줬던 가게는 잘 갔어?”

“응, 딸기 트라이플이 정말 맛있더라고. 같이 간 동행인도 맛있다고 했어. 알려줘서 고마워.”

 

동행인이란 말이지. 에이미는 그래서 동행인이 누군데, 하는 질문을 꾹 눌러 담고는 별말씀을, 하고 웃었다. 이안이 이유 없이 비밀로 할 사람도 아닐뿐더러 단순히 물어봤다고 알려줄 정도였으면 애초에 비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중요한 소식을 노골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 눈감아 주는 걸로 할까. 십 년 동안 봐왔으니 그 정도로 심하게 서운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말해도 된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이골이 날 때까지 이야기를 해댈 테니, 지금은 천천히 기다려줘야겠다. 카페테리아의 소음이 또 다른 가게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덮으며 에이미는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했다.

 


 

“해서, 생각나서 사 봤는데…”

 

눈썹을 올리는 리콰이드 옆에 앉은 이안이 쭈뼛거렸다. 저물어가는 해가 창 밖에서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와중 콧날이며 뺨의 튀어나온 부분에 선홍빛이 비쳤고, 그런 빛을 받아 이안의 푸른 눈에도 묘한 자주색이 감돌았다. 이안은 교복 타이를 만지작거렸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이리로 온 탓에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는데 괜히 신경 쓰인다. 소파에 앉은 둘 앞에 놓인 탁자에는 이안이 하루 내내 애지중지 하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만년필?”

“이런 것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당신이 본래 쓰는 것에는 못 미치겠지만…”

 

평가를 받는 아이처럼 숨 죽이고 기다렸다가 리콰이드의 얼굴에 슬쩍 닿는 눈길이 한 번, 이안은 잠자코 있기보다는 언제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아이였기에 눈길 하나에도 자연스레 의미가 담긴다.

 

“지난번에 당신이 반지를 선물해 줬잖아. 그러니까 답례는 아니더라도 나도 뭔가 선물하고 싶었어.”

 

입에 올리려니 공연히 낯이 뜨거워진다. 진심을 전달하는 건 몇 번이고 한다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지도, 능숙하게 전할 수 있는 요령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이 마음이 방향계의 침처럼 첨예하게 당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이 감춰졌다가 다시 당신에게로 향하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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