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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허드슨과 ■■■■■
2022. 2. 10.

※주의 소재: 유혈 표현, 부상

 

 

검정. 오직 검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어둠. 그는 그저 고요할 뿐인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끝없이 밀려나가는 공간, 동시에 움직이면 부딪칠 듯 단단하기도 하고.

 

움직인다니? 그는 잠시 멈칫했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눈꺼풀 정도는 자신의 의지하에 있다는 의미였다. 깜빡, 깜빡. 아무 빛도 존재하지 않아 아무것에도 닿지 않는 시선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모스 부호 같기도 한 움직임은 잠시 동안 계속되다 곧 멈추었다.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히지 못한 글이 잊히듯 그는  존재하는 것을 잊었다.

 

시간이 흘렀다. 영원일까, 한순간일까. 정확한 시간의 흐름은 가늠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다른 모든 것이 그에게 와 닿지 않았듯 시간 또한 무의미한 개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별을 셀 수 있을까. 불지 않는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시간은 더 흘렀다. 그는 점차 나른해졌다. 신체가 그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다. 어둠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고 푹신한 허공이 안락하게 느껴질 즈음.

 

공간이 치이익, 하며 녹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애초에 여기는 어디지. 내 이름이 뭐더라. 빛이 번지듯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녹아내린 공간 틈새로 시간이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이안은 그동안 일 초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시간과 함께 끌려온 기억이 드문드문 채워졌다. 

 

[들리세요? 이안 허드슨 씨, 들리세요?]

 

이안은 자신의 성이 허드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성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어둠 속 허공에 떠 있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자마자 이안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유난히 세게 부딪친 엉덩이를 문지르며 그는 저 부름에 답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네, 들립니다.]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자 그것은 의지가 되어 상대에게로 흘러갔다. 이안은 미약하게나마 건너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대단히 얄팍하고 불안정한 이어짐이었다. 건너편에서 안도의 탄식이 들려왔다.

 

[다행이다! 저희 쪽에서 최대한 빨리 진입 경로를 찾는 중이에요. 침착하게 기다리시면서 지시에 따라주세요.]

 

이안은 그것이 무척이나 재난 상황의 안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재난에 가깝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저희 쪽이라니요?]

[네? 당연히 대법전… 허드슨 씨, 기억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상대 편에도 혼란이 전달된 것 같았다. 이안은 머리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더듬 언어로 바꾸었다. 이안이 찾으려고 하는 동시에 그 기억들은 이안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저는, 엽귀의 방문자고…어쩌다가 이곳에?]

[허드슨 씨는 임무 중 고립되셨습니다. 금서가 만든 이경에 진입하셨는데 허드슨 씨를 제외한 분과회원들을 거부하고 출입구 자체를 없애버렸어요. 지금은 이경을 억지로 뜯어내어…]

 

건너편의 말, 통신, 그러니까 염화가 심하게 불안정해졌다. 이안은 염화를 듣는 순간 몇 가지 기억이 더 딸려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존재가 말한 대로다. 분명 임무를 받아 분과회와 함께 이경에 진입할 준비를 했는데… 그 뒤로는 이상하게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공백에 좀 먹힌 것 같았다.

 

[곧 염화가 다시 끊길 것 같아요. 허드슨 씨, 그곳에 그대로 계셔야 해요.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잠시만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안이 다급하게 말을 골랐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건너편의 마법사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흔들리는 진실의 여섯 번째 눈동자~식스센스~〉, 이윤서라고 해요. 기억해주세요-]

 

그가 말을 채 다하기 전에 염화는 침묵 속으로 묻혔다. 이안은 또다시 혼자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보다 상황이 좋았다. 비집은 틈으로 얼마간의 시간과 기억이 새어 들어왔기에 그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이안 허드슨으로 인지했기 때문에, 이안은 의지를 되찾았다.

 

그는 먼저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곳이 금서의 영역인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이 영역이 어떤 성질을 띠느냐였다. 존재를 세계로부터 격리하여 의지를 상실시키는 것은 이안이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강한 불쾌감을 느끼며 이안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잘 정리되었던 머리가 금세 붕 떴다. 

 

그는 최대한 많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유런을 비롯한 가족들, 에이미, 다른 친구들, 그리고 일반인이었을 때의 삶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하지만 이안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의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속도는 매우 느렸고, 공백으로 지워진 기억 중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티셔츠 한 장에 흰 바지. 잠시 심부름을 하러 집 밖에 나올 때나 편한 친구들을 만날 때 입곤 했던 옷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임무를 하러 왔을 리는 없다. 옷을 당겨 보자 오래 입어 생긴 보풀까지도 그대로였다. 이안은 금서가 뭘 할 수 있는지 슬슬 감이 왔다.

 

주머니를 뒤지자 그가 가장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나왔다. 낡은 수첩, 고급스러운 재질의 안대와 사과 한 알, 그리고 부서진 하트 모양 쿠키 몇 개. 도무지 어쩌다 주머니에 있는지 모를 물건들이었다.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인데… 적어도 배고플 때 허기를 채울 수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은 그것들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윤서는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었지? 달리 할 것도 없는데 시간만 보내려니 좀이 쑤셨다. 하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 이안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기에 어둑어둑한 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보다는 밝아졌고, 자신의 신체나 물건 등은 보였지만 여전히 어둠의 장막은 묘하게 두터웠다. 의도적으로 시야를 가리는 것 같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가까이서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희끄무레한 누군가였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이안의 곁을 휙 지나쳤다. 이안이 벌떡 일어섰다.

 

“리콰이드!”

 

겨우 스치듯이 했지만 틀림없이 리콰이드였다. 이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흰색 물체가 사라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고 달려도 은색 머리칼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고, 결국 이안은 그를 코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결국 이안은 윤서와 염화가 통했던 장소와도 한참 멀어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몸이 후끈했다.

 

그렇게 멈춰 선 지도 오래 지나지 않아 이안은 땅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이안은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불안한 직감이 이안을 강타했다. 생존본능이 머리를 지배했고, 동시에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안은 허공으로 날아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거대한 해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파도는 이안을 낚아채 깊은 곳으로 처박았다. 강력한 마력의 흐름에 추풍낙엽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는 마력을 쥐어짜내려 안간힘을 썼다. 분명 한 번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도 가능하다.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분명히 그것은 가능하다. 여기서 죽지 않는다.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범람하는 바닷물을 뚫고 이안은 그 흐름을 정면으로 맞섰다. 동시에 바닷물이 첨예한 마력에 두 갈래로 갈라졌다. 방대한 흐름은 이안을 밀어내려 애썼으나 이안은 바다를 다스릴 줄 알았다. 반으로 갈라져 찢어지는 마력은 거칠었고, 그는 구태여 그것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다. 바다는 그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바다를 대적할 필요는 없었다. 감정 또한 그런 법이었다. 그것은 그저 순수하고 날 것의 힘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안은 그날 이후로 그것을 제법 다룰 줄 알게 되었다.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알지 못했던 이유를 이안은 이제는 알았다. 에이미가 죽는 것도, 그 날의 클래스메이트들이 죽는 것도 정당하지 못했다. 잠자코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부조리가 그를 깨웠고 운명이 그를 찾았다. 그리고 그 답례로 그는 운명을 찾아갔다. 그는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도 운명을 찾아가는 자였기 때문에.

 

갈 곳 잃은 힘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내려다본 이안은 해일이 자연스레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막아서려 하면 할수록 무서운 힘을 얻는 것. 분노를 힘으로 사용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차갑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힘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감시하는 것은 이안이 숱하도록 해온 것이었고, 그러자 바다는 그의 편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바다는 그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 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휘두르는 자에게는 의도가 있을지언정 움직임에는 선악이 없다.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이안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바다는 이제 평온을 되찾았다. 아마 이안이 평온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필요한 때가 오면 그는 분노할 것이고, 그 분노가 바다를 깨우리라. 이안은 잠잠해진 바다 끝자락에서 해안선을 찾았고 그를 따라 걸었다. 주위는 아까보다 밝아져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해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자신의 마력을 점검하며 이안은 모래사장 위를 밟았다.

 

얼마를 걷자 모래가 아니라 흙이 바닥을 이루기 시작했다. 동시에 야트막한 수풀이 신발에 밟혔다. 더 걷자 아담한 꽃밭이 이안을 반겼다. 꽃들은 노래하듯 산들바람에 흔들렸고, 밤하늘이 비추는 별빛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꽃밭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분명히 이 땅을 밟은 적이 있다. 이 시야를 기억하고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작은 행성의 세계는 분명.

 

이안이 위화감을 느끼자마자 꽃들이 일제히 이안을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모든 인과가 그를 주시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헤아릴 수 없는 증오가 이안을 덮쳤다.

 

너를 증오해. 너를 증오해. 너를 증오해. 수많은 메아리가 이안을 향했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마력이 된 그것은 이안을 향해 날라왔고 미처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이안은 그대로 마력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 팔이 깊게 베였고,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사이 그의 상체는 뒤로 기울었다.

 

분명 등 뒤로는 단단한 땅이 있다. 꽃밭 한가운데 서 있던 이안의 그 믿음은 무참히 깨졌다. 순식간에 땅이 입을 벌리고 절벽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 같은 바위가 이안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심을 잡으려 하기도 전에 운동화의 고무가 삐끗하는 소리를 냈다. 이안은 그대로 추락했다.

 

중력에 주도권을 잃은 이안은 마력으로 몸을 감싼 채 다급하게 붙잡을 무언가를 찾았다. 바위들은 날카로웠고, 그는 가까스로 속력을 줄일 수 있었지만 바위에 부딪치고 까지는 대가를 치렀다.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떨어져 몇 번을 구른 이안은 신음했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잠시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른 이안은 피가 배어 나오는 팔을 붙들고 일어나기 위해 애썼다.

 

 

몇 번을 일어나려다 실패한 그는 바닥에 털썩 누웠다. 헐떡이는 숨 때문에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여기서 바로 일어선다고 해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안은 잠시 누운 채로 시야를 위로 했다. 아까 꽃밭의 별바다는 온데간데없고 검은 하늘에 회색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의 실루엣 사이로 해인지 달인지 모를 것의 빛이 새어나왔다. 실버 라이닝이었다.

 

이안은 넋 놓던 것을 멈추고 조금 전 보았던 풍경에 대해 생각했다. 한번 끝났다고 생각한 세계. 끝난 것임을 알고 있어도 다시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걸까. 몸을 칭칭 감은 인과의 실들이 그를 압박해왔다.

 

인과. 세계. 일그러진 세계. 일그러진 인과. 그는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것을 느꼈다. 갑자기 솟아난 힘으로 벌떡 일어나 앉은 이안은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사과 한 알은 고스란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일그러졌던 것은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를 관측하는 자신이다. 동시에 이안은 생각했다. 이 세계가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고 생각해왔지만 공포를 주입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세계를 두렵다고 여겼기 때문에 세계는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세계가 자신을 상처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는 그를 상처입혔다. 마법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감정을 두려움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이안이 땅을 그러쥐자 단단한 땅이 부드러운 흙이 되었다. 흙은 쉽게 파낼 수 있었다. 이안은 주위에 잡히는 돌을 이용해 적당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내었다. 그는 구덩이 안에 사과를 놓고 다시 흙을 덮기 시작했다. 흙을 다 덮기 전부터 이안의 기대가 차올랐고, 흙 속으로 그것이 스미어 땅에서는 부드러운 진동이 일었다.

 

마침내 이안이 일어서 몇 발자국을 떼었을 때 사과씨는 이미 생명을 틔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과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이안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허기를 채운답시고 사과를 먹었다면 하린에게 대차게 깨졌을 것이다. 생명은 자라나 죽고, 죽은 것은 썩고, 썩은 것에서는 다시 생명이 자란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이고 흐름이었다. 그는 이제야 하린이 왜 이것을 보수라고 주었는지 이해했다. 일그러지지 않은 하나의 원, 뒤틀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제 형태를 찾는 끈. 그것은 살아가는 것을 닮아 있었다.

 

새싹은 순식간에 자라나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푸르른 이파리와 굳건한 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안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보폭에 맞추어 줄기 역시 두꺼워졌다. 어느새 나무는 높디높은 절벽까지 마지막 가지를 닿았다. 가장 낮은 나뭇가지는 밟고 올라서기 딱 좋은 위치에 자라나 있었다. 이안은 감탄의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로 이 방법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시련들도 조금은 예측할 수 있다. 아직은 남은 쿠키와 안대, 그리고 수첩을 누가 주었는지,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때가 되면 알 것이다. 이안은 운명을 잡아 보기로 했다. 나가면 하린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콧대가 이 사과나무보다 높아질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이안은 가장 낮은 나뭇가지를, 그리고 그다음 나뭇가지를, 그런 식으로 사과나무를 타고 올랐다. 거대한 나무는 곳곳에 사과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따지 않았다. 필요한 이가 있다면 필요한 만큼 가져가리라. 이안의 역할은 이 사과나무를 심는 것으로 다 마쳤다. 나무는 그런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이파리들이 이안의 볼을 간지럽혔다. 그럴 때마다 온몸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는 금세 나무 꼭대기에 도착했다. 떨어졌던 절벽으로 살짝 떨어지기 좋은 위치였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해안가와 반대 방향의 꽃밭. 하늘은 구름이 개어 밝은 원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여전히 암흑이었다. 꽤나 상쾌해진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훑어보던 이안의 표정이 굳었고, 이내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꽃밭 끝자락을 리콰이드가 지나고 있었다. 빠른 보폭에 은빛 머리가 휘날렸고 그는 사정없이 꽃들을 밟아 가며 어둠 쪽으로 사라졌다.

 

“잠깐!”

 

있는 힘껏 소리친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절벽 쪽으로 살짝 떨어졌다. 무사히 착지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응원하듯 사과나무가 우수수 떠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바람이 발에 힘을 실어준다고 느꼈다.

 

별들보다 빠르게 그는 달렸다. 운동화가 잔디를 밟고 꽃밭을 헤쳐 나아갔다. 리콰이드와 그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꽃밭이 끝나고 언젠가부터 거친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었다. 회색의 바닥 위의 회색 벽들이 곳곳에 서서 시야를 막았다. 이안은 벽 하나에 부딪힐 뻔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리콰이드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회색 벽들이 시야를 메웠다.

 

이안은 짙게 한숨을 쉬며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단단한 것이 마력으로도 쉽게 깨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몇몇 벽은 서로 붙어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이 걸음을 옮길수록 그 벽들은 빽빽하게 밀집되어 갔다. 그는 곧 이것이 미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리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고자 하면 꽃밭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 방향으로나 향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리콰이드는 분명히 이 앞으로 향했다. 미로의 출구로 간 걸까. 미로는 비정형적인 온갖 각도의 통로로 나뉘었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만 간다는 편법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하면 금세 미로의 외곽을 돌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안은 잠시 선택지를 고려하며 근처에 있던 벽에 기대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무언가가 잡혔다. 쿠키가 담긴 주머니였다. 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을 확인한 이안은 부서진 쿠키의 가루가 은은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헨젤과 그레텔을 하면 된다. 

 

누구에게 쿠키를 받은 것인지는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안은 그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주머니 속 과자를 분질렀다. 주머니의 입구를 열자 페어리 더스트처럼 가루가 허공으로 천천히 흩날렸다. 시험 삼아 조금을 뿌리자 가루는 금세 가라앉아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났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이안은 조심스레 가루를 흩날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로는 세 갈래 길에도, 때로는 커다란 광장 같은 곳에도, 때로는 막다른 벽에 도달하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가루는 동나지 않았다. 사과 한 알이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가 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일까. 동시에 이안은 그가 조금씩이지만 중심부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점차 가루의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었을 때 그는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코너를 돌아 마주한 벽에는 처음으로 검은 문이 달려 있었다. 이안은 그 문이 무척이나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어두운 방을 드러냈다. 이안은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몸이 문을 통과하자마자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그는 이 장소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 정사각형의 작은 방은 인계의 집에 있는 그의 방이었다. 정확히는 몇 달 전 등교거부 중이었던 그의 방의 풍경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방은 이렇게 어둡지 않았다.

 

빈틈없이 쳐진 무거운 커튼. 불이 꺼진 방과 네온으로 빛나며 위이잉 소리를 내는 컴퓨터.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와 쓰레기통에 처박힌 연애편지들. 앵커였던 소꿉친구가 희생당하고 의도적으로 세계를 고립시켰던 시간. 그때의 원망과 치기 어린 분노가 방 구석구석에 눌러붙었다. 방에는 누군가 방금까지 있었던 것처럼 묘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안은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더듬어서 문고리를 돌리려고 했지만, 문은 굳게 잠기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안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아들, 식사가 아직이지 않니?”

 

유런이었다. 이안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그제야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 이 연극을 끝내야 한다.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유런의 목소리는 무어라 덧붙였다.

 

“뭐라도 챙기지 않으련…?”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 이안은 다음 대사를 알고 있었다. 아냐,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에 새겨질 정도로 외우고 있었다.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 이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뱉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죄송해요, 오늘은 넘길게요.”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랍게도 평온했고 약간의 권태마저 묻어났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경악을 넘은 공포에 가까웠다.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네가 몸 상할까 봐 걱정이야.”

 

그러는 사이 건너편의 상대역은 열심히도 연기를 이어갔다. 이안은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당장 문을 부수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으며 그가 적대하는 대상에게 닿지도 못할 것이다. 참아야 한다. 등 뒤의 문고리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라도 해주렴.”

“....”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정된 일을 막는다는 것은 기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안은 기적을 보여줄 수 없었다. 기적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으킬 수 없는 법이다. 당신이 필요해. 기적을 목격할 당신이 간절히.

 

그는 문고리를 강하게 쥐고는 마력을 때려 부어 문 채로 뜯어냈다. 기적이 되지 못한 의지는 분노에 그칠 뿐이다. 강대한 마력의 일격이 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휘몰아쳤다. 이안의 예상대로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가 입구부터 뿌려놓은 과자 가루가 전부 마력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안은 망연하게 허공에서 반짝이는 가루를 응시했다.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서자 그는 곧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미로가 아니었다. 미궁이었다. 죄인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을 중앙에 두고, 입구도 출구도 오직 하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만든 미궁에 그는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아무것도 닿을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유배지였다. 분명 한때 그것을 바란 적도 있었지. 들어가서도 나가서도 안 되는 그곳에 영원히 갇혀 있기를.

 

그런데 누가 누구를 구한다는 말인가. 자신조차 미궁에 가둔 사람이 어찌 횃불을 들고 실타래를 푼단 말인가. 이안은 가만히 외벽에 기대듯 주저앉았다. 과자를 준 사람은 이 연극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째서인지 그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비관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이 감옥에서 어떻게 나간담. 방에 있는 물건이라도 다시 확인해야 할까.

 

이안은 잠시 상황을 고려했다. 기적은 가장 간절할 때야 비로소 형태를 가지곤 한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어두컴컴한 미궁. 그는 리콰이드를 미궁에서 구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구불구불하고 빠져나올 수조차 없는 그의 마음, 그의 사랑에서 반드시 그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었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한 손에는 실타래를. 미궁에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타래가 아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를 찾아주는 사람이기에. 그를 미궁 밖으로 인도하는 것은 바깥과의 매듭이다.

 

완전히 단절된 세계에서 그가 돌아가는 데 필요했던 것은 수복된 앵커였다.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 그들을 바꾸고 그들에 의해 바뀌는 경험들. 그리고 서후에게 제과제빵은 바로 소통의 통로였다. 마음을 담아 전할 수 있는 물건, 그리고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어져 있다는 증거. 그렇기에 과자 가루가 매듭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가 그것을 깨닫자마자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흩어져 있던 가루는 제 자신을 재생하듯 긴 선으로 모여들었고, 빛을 발하면서 비단 매듭이 되었다. 이안은 비단을 손으로 한번 튕기며 생각했다. 이것 또한 허기를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서후는 실망한 티를 내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실망하겠지. 애초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옛 방을 돌아본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쓰레기통을 뒤졌다. 구겨진 편지 몇 개가 금방 보였다. 씩 웃은 이안은 그것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 때의 자신이 알았다면 뒤집어질 만큼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이것들을 리콰이드에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이안은 이제는 문이 없어진 감옥을 나왔다. 바닥에 놓여 있는 끈 한쪽을 책상다리에 묶고 이안은 끈을 손으로 짚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이 빠진 붉은 비단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돌아갈 때는 갈림길에서 고민할 일도 없다 보니 들어올 때보다 몇 배는 시간이 덜 들었다. 그는 금세 미궁이라 하기도 어려운, 시멘트벽들이 드문드문 놓인 곳까지 나올 수 있었다.

 

기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으킬 수 없었다. 그가 리콰이드에게 기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리콰이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가고 기적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의뢰인들이 준 보수가 기적의 매체로 작용한 것은 그가 의뢰인들과 진심으로 이어진 관계를 쌓아서겠지. 그리고 아마 비단 끈은 서후와 자신 간의 매듭이리라. 

 

이안은 끈을 회수할까 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이곳까지 헤메게 된다면 이 끈이 안내자 역할을 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서후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거진 모든 것을 사랑했으니까.

 

시멘트 바닥에서 벗어나 흙길로 접어든 이안은 또다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하늘에 뜬 것은 달이었다. 월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안은 달이 붉은빛으로 물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달이 있는 곳으로 가면 무언가 나올지도 몰랐다.

 

붉은 달빛을 따라서 한참 걸었을까. 이안은 주위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 건물 안이라도 들어온 것 같은 묘한 감각에 이안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암석 타일이었다. 그 문양은 묘하게 익숙했는데, 마치 대단히 자주 보는 것이었지만 한번도 집중해서 본 적이 없는 듯한…

 

이안은 문양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짙은 심홍의 액체가 바닥을 타고 유유히 번져나갔다. 이안은 그것을 밟을 뻔하다가 자신이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을 뻗어 보자 빳빳한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엽귀의 제복이었다. 동시에 주머니에 있던 안대가 그의 의안 위에 씌워져 있었다.

 

무엇을 보게 되던지 그리 유쾌한 광경은 아닐 것이다. 제복으로 바뀐 옷과 흥건한 피가 충분한 경고였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피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찰박 찰박, 구두가 액체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손을 밟을 뻔했기 때문이다. 경악한 이안은 재빨리 물러나서 누구의 손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이 파견된 분과회의 사서, 블랑케였다. 그는 부활을 시도 중인지 애타게 운명을 잡았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마지막에 이안과 마주친 그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가 소멸하기 직전 이안은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너를 감싸지 말걸 그랬어.

 

곧 이안의 눈앞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려고 피로 젖은 바닥을 짚었다. 장갑에 피가 흥건하게 묻었다. 손을 대충 바지 무릎에 문지르고 난 뒤에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임무를 같이 받은 분과회원들은 그저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언젠가 임무를 같이 한 마법사들, 엽귀의 동료, 선배들. 다이스가 애처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공허로 화할 즈음에 이안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타케시는 안타까워했고, 하린은 주연을 찾았다. 서후는 언젠가 이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그저 편안하게 웃었다.

 

서후의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본 이안은 한쪽 무릎을 꿇었던 것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차마 걸음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다음에 뭐가 올지 다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에서 솔직히 그는 그 모습을 침착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지키지 못한 거다. 돌이켜보면 학교 친구들을 구했던 각성의 순간에서조차 이안은 불의에 맞서고자 했지, 그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힘을 각성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킨다는 것은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안은 무언가를 보관하는 데 그렇게 뛰어난 재주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게 뭐지? 가졌다면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운명조차 가지지 못한 내가 정말로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움에 이안은 몇 걸음을 헛디뎠고, 그 때문에 앞으로 나아갔다. 리콰이드는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이안이 몸을 숙이자 그는 눈을 뜨고 이안의 볼을 만지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이안은 잠자코 가까이 다가갔다. 놀랍게도 리콰이드는 손을 더 멀리 뻗어 이안의 머리 뒤에 있는 안대의 매듭을 풀었다. 안대가 리콰이드 위에 떨어지기 직전에 그는 완전히 소멸했다.

 

이안은 피웅덩이 위에 둥둥 떠 있는 안대를 바라보았다. 현실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멍하니 생각했다. 뜬 눈이 감기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로 무언가가 윤서의 모습으로 화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이안은 피웅덩이에 비친 모습으로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개척자라고 부르다니 빛 좋은 개살구네요.”

 

영락없는 윤서의 목소리인 그것은 조금은 조롱하듯이, 조금은 지루하다는 듯이 자신의 손톱을 구경했다. 

 

“겨우 이런 것을 두려워하는 건가요? 시시한 마법사였군요.”

 

그 말에 이안이 고개만 돌려 뒤돌아보자 그것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였다.

 

“설마 몰랐다고 하지 마세요. 알고 계셨잖아요? 와, 그렇게 노려보니까 좀 무섭다.”

 

그것은 까르르 소리를 냈다. 이안은 안대를 주워 들고 일어섰다.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친족도 멸하는 마법사와 그의 눈 먼 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엽귀를 떠났지만 이안은 그가 훌륭한 엽귀였다고 생각했다. 그가 엽귀를 도피처로 사용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엽귀를 떠났다. 외부적인 위협이 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가치와 의미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그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그 부름에 응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안 또한 부조리가 소중한 이들을 옥죄었을 때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 검을 뽑았다.

 

이제 이안은 자신이 조금 전 지키는 법을 모르겠다고 한 이유를 알았다. 그는 자신이 지켜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소유여야 비로소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러나 틀렸다.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부름에 응하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면, 이안은 지키는 방법을 숱하게 알았다.

 

개척자는 단순히 원하던 것을 손에 넣으면 다음 것을 찾아 나서는 자가 아니었다. 그만이 아는 새로운 가치를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존재였다. 길을 찾아 나서고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그것을 닦는다. 언젠가 올 이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는 자. 그가 자기 자신을 그리 정의했으므로, 그 자신을 다시 찾아냈다. 

 

손 안에서 타케시가 건넨 엽귀의 안대가 흔들렸다. 리콰이드는 그것을 풀었다. 환상 속의 리콰이드는 두 눈으로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으로, 하나는 사이클롭스의 마음으로. 그리고 윤서의 모습을 한 그것과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안대는 마검으로 화했다.

 

일격에 칼날이 쇄도하고 마력이 맞부딪쳤다. 그것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이안은 반 바퀴 돌듯이 몸을 움직이면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검이 먼저 진동했고, 이안은 그것이 무언가를 전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주문이 쇄도해왔기에 때마침 저항에 성공한 그는 마검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마검이 진동할 때마다 이안은 그것이 춤을 추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케시의 검무가 조금씩 흘러들어왔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한 이안은 공격을 조금 맞는 대신 유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무수히 많은 마검이 허공에 떠올랐고, 검무를 추듯 우아한 동작으로 모여든 그것들은 소용돌이치며 군단으로 변화했다. 귀가 멎을 듯한 함성이었다.

 

“시시한 마법사라고 했었지? 그 손에 좀 죽어줘야겠어.”

 

상대에게 달려든 군단이 폭발하며 거대한 굉음을 자아냈다. 소멸의 비통한 상실이 주권 전체를 덮었고, 마침내 이안은 자신의 슬픔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었다. 한순간에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은 눈 깜짝할 새에 닫혔다. 이안은 남은 것을 주머니에 넣으며 손을 털었다. 

 

타케시의 안대는 사라져 있었다. 군단이 소멸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피웅덩이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고, 주위도 한결 밝아졌다. 월식은 끝난 지 한참이라 달이 흰 얼굴을 한 채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이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수첩 하나였다. 잠시 숨을 고르던 이안은 방금 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것.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또 비현실적인 두려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파괴를 겪어 본 자는 아니었지만 그 끔찍함에 대해 숱하게 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이안은 잠시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초조함이 앞섰다. 결국 그는 주의를 돌리기 위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첩은 오래되어 끝 부분이 닳아 있었고 거의 사용되어 있었다. 글이 적혀 있는 부분을 살펴본 이안은 그것이 신문 기사의 아이템들을 적어 놓은 내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날짜는 백 년도 전이었지만. 이안은 한숨을 쉬며 수첩을 닫았다.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걸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를 깨운 것은 구두 발굽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익숙했다. 그는 고개를 홱 들었다.

 

홀 저편에서 리콰이드가 어딘가 바쁘게 향하고 있었다. 이안이 그를 불러세우기도 전에 그는 복도로 사라졌다. 이안은 급하게 수첩을 쑤셔 넣고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코너를 돌자 익숙한 복도였다. 이안이 뻔질나게 들락날락 거리는 리콰이드의 집무실 앞. 리콰이드는 이미 집무실로 들어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환한 햇살이 눈 부실 정도로 복도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빛에 이안은 눈을 조금 찡그렸다. 햇빛이 그의 옷에 스며들어 검붉은 피를 지웠다. 금세 이안의 제복이 말끔해졌다. 그는 신경쓰지도 않고 발걸음을 바삐 했다. 노크조차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벌컥 열고 들어간 리콰이드의 집무실은 허탈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여기에도 오후의 햇살이 책상을 비추었고, 빛먼지가 고요히 떠다녔다. 묘한 것은 보통 서류로 가득 찬 집무실이 낱장 한 장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장식이나 잉크펜은 놓여 있었지만 서류파일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집무실을 돌아보면서 기억과 변한 점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찻잔이나 주전자, 군것질거리, 빔프로젝터 등 다른 것들은 이안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종이 한 장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수상한 점이었다.

 

그 때, 이안은 집무실 책상 한구석에 굴러다니는 실링 스탬프를 발견했다. 실링왁스 세트와 함께 꺼내져 있는 것은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다. 이안은 슬슬 다음 해야 하는 행동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마음을 받아 적는 것은 수없이도 해 왔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편지의 상대가 읽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적은 적도,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적은 적도 있었던가. 수십 통의 연애편지는 처음부터 단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흘러넘치는 마음을 잉크 삼아 종이 위에 사랑을 그려나간다. 부끄러울 만큼 묻어나는 애정과 확신. 이안은 이렇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수첩의 주인은 수첩이 사랑의 상징으로 쓰였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사랑을 전하는 연애편지보다 노골적인 상징이 있을까. 그는 부디 그 점을 감안하여 자신이 앞으로 할 짓을 다이스가 용서해주기를 바랐다.

 

평온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중에 이안이 슥슥 깃펜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수첩은 본래 한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기에 쓸 수 있는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래서 금세 종이가 동난 이안은 남은 종이를 접어 봉투를 만들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언젠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해야 한다. 그는 다이스가 마리아에게 완전히 이별을 고할 때 곁에 있었다. 아마도 수도 없이 그 무덤 앞을 홀로 방문했겠지.  다이스는 그에게 수첩을 건네는 것으로 마지막 미련을 떠나보냈다. 그렇다면 그도 그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마땅히 그의 이별로 예우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리콰이드가 보는 앞에서 했던 것처럼 실링왁스를 녹여 뚝, 뚝 떨어트린다. 그것이 식기 전에 스탬프를 꾹 누르면 그의 가문이 사용했던 문양이 그려진다. 몇 번 후후 분 다음에 이안은 엉성한 편지를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중앙을 북, 찢었다.

 

“나와.”

 

세상이 무너지듯이 일렁였다. 기만이 가득한 햇빛의 창이 군청색 그림자에 적셔 사라졌다. 환상이 사라지자 그는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화려한 색색의 창문과 깔끔한 대리석 타일로 이루어진 압도적인 크기의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단상 위에 놓인 황금의 옥좌는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고 있었다. 리콰이드는 그곳에 앉아 홀의 입구에 선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기억하는 것과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콘셉트는 같았다. 리콰이드의 스펠바운드였다.

 

이안은 조소를 흘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래, 당신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테마 파크 투어를 하면서도 계속 줄 듯 말듯 구는 거 있지.”

 

그는 거대한 홀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구두가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리콰이드의 모습을 한 그것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었어? 이런 피날레를 준비해 뒀으니 말이야.”

“글쎄.”

 

이안은 대충 팔을 휘둘러 마검 하나를 소환했다. 이미 피가 흥건한 그것은 척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그것을 몇 번 끌다가 보란 듯이 멀리 던져버렸다.

 

이안의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큰일 났네. 바칠 것도 없고 기적을 일으킬 행운의 아이템도 없다. 이안은 오랜만에 정말로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물이라 함은 전부 타인에게서 받은 가치뿐이다. 타인의 가치를 제 것인 양 으스대며 건넬 생각은 없었다. 온전히 이안의 소유인 것만이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은 텅 비었다.

 

단 하나, 이안이 태어날 때부터 가졌고 죽을 때까지 소유하고 있을 물건. 그것은 현재 이안의 가슴 안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매 순간 붉은 피를 뿜어내는 그것은 또한 이안의 목구멍에도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심장이라고도 부르고 마음이라고도 부르곤 하더라. 펄떡거리는 것이 목에서 흘러넘칠 듯이 위협했다. 당신을 눈앞에 두면 언어는 언제나 중심을 잃고 당신에게로 흘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용암이 땅 위로 부글부글 끓듯이 막으려고 한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이치였다.

 

내가 가진 것 중 당신에게 걸맞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을 당신에게 바칠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전부가 당신에게 걸맞다면 나는 망설임조차 않고 전부를 당신에게 바칠 것이다. 이안은 그에게 마음이 끌리듯 왕좌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 사랑은 칼날과 같고 내 마음은 정의와 같은 것. 이 목숨이라도 가지겠다면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을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생명을 지닌 것처럼 흘러내렸다. 마법사인 자신조차 어떻게 언어로 정제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감정들. 이안은 최대한 날 것 그대로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가슴 벅차게도 나에게 당신은 최선도 차선도, 최악도 차악도 없는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에. 나는 그 이치에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당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입 맞추기도 하겠지.”

 

이안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는 왕좌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리콰이드의 모습을 한 그것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바라건대 원한다면 나의 죽음조차 가져, 나는 평생 당신를 섬길 테니. 이것이 바로 나의 사랑, 나의 신념이자 열정. 당신에게 기적을 보여 주겠다고, 기적을 보여 줄 때까지 도전하고 또 실패하겠다고 말했지만 진실을 고백하건대 내게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항상 기적이었어.”

 

그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이렇게까지 푹 빠져서 대체 어쩌자는 거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지. 바다가 해안에 끌리고 흰색 포말을 남기는 것처럼, 결국 절벽을 깎고 바위를 부수어 모래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언제나 당신에게 끌리고 당신을 바라겠지. 햇빛이 해수면에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반짝임만으로도 내게는 평생 충분할 것이다. 평생 당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나의 존재는 충분해질 것이다.

 

햇빛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조심스럽게 왕좌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베일처럼 그들을 감쌌다. 리콰이드는 자연스럽게 그의 왼쪽 손을 내밀었고,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마주며 이안은 그의 목숨에 두고 평생 마음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다음 순간, 이안은 팔을 뻗어 던져 놓은 마검을 불렀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미쳐 대응하지 못했고, 깨달은 후에는 이미 이안이 씩 웃으며 그것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은 후였다. 흰색 옷이 검붉게 물들어갔고, 그 뒤에는 푸른 왕좌가 붉게 물들었다. 선홍의 액체가 뚝, 뚝 떨어져 옥좌 주위로 피웅덩이가 고였다. 이제 좀 리콰이드의 스펠바운드 같네. 이안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칼을 꽂은 채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창가의 빛이 그의 얼굴 주위를 감쌌다.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야. 내 사랑이 원래 좀 이렇거든?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다면 내가 끝까지 찾아가서 그를 대적할 거야.”

 

이안은 씩 웃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그의 모습을 한다고 해서 내가 죽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나는 다른 사람 전부를 놓치더라도 그는 끝까지 책임지기로 마음먹었거든.”

 

그것의 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이안은 조금 더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상황이라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다른 상황과는 다르게, 나는 그의 부고를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느니 내가 직접 그를 처단하겠어. 말했잖아? 이것이 나의 사랑이고 정의라고. 그를 사랑하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가 어디 보통 사람이야?”

 

그가 마검을 찔러넣은 상대는 리콰이드가 아니었다. 오직 그의 얼굴을 하고 이안의 기억을 모방해 말할 뿐. 하지만 상대가 리콰이드라고 했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선 그를 살해했겠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고 스러지는 그를 품에 안는 것은 최후의 욕심일까.

 

하지만 이안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결말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상실은 소중했기에 의미가 있고 아픔은 행복했기에 진정으로 쓰라린 것이다. 반대로 아픈 것은 행복했기 때문이고 잃는 것은 소중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악하고 어느 한 쪽이 선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기에 겪는 괴로움이라면 나는 수만, 수억 번이라도 더 사랑하고 괴로울 것이다.

 

생의 끝에도 후회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는 그날까지 나는 언제라도 당신의 목숨을 거두어 갈 각오를.

 

그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붉게 물든 왕좌가 텅 비어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지나치게 넓은 홀에 혼자였다. 이안은 왕좌 옆에 털썩 주저앉아 기댔다. 이렇게 쓸쓸한 곳에서 리콰이드는 어떻게 홀로 있었던 걸까. 차갑고, 외롭고, 당신조차 없는 곳에서.

 

“보고 싶네…”

 

그 말과 함께 이경이 천장부터 부서지기 시작했다. 대법전에서 마침내 이경에 진입할 방법을 찾은 것인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이경을 연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부서져 가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파편이 색색의 꽃잎처럼 팔랑거리며 날아갔고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윤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인 것 같지만 리콰이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밖으로 나가면 의뢰인들에게 보수를 사용해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다. 그런 다음에는 당신의 집무실에 들려서 이번에야말로…

 

마침내 이안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꽃잎 몇 장이 그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가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이안의 눈꺼풀 위로 빛이 아른거렸다. 멀리서 파도가 모래에 부딪히는 소리도,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단잠이었다.




이안 허드슨의 심부름센터 完.



 

삽화: @daradora_53, @dotheart_cmsn

표지: @CM_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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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의 거리는 한적했다. 이안은 스마트폰을 연신 들여다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낮게 쌓인 벽돌담은 아담했고 이안의 목적지까지의 길을 안내했다. 담 위에 쌓인 눈이 조금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겨울이었지만 날은 조금 포근했다. 이 부근은 어제 눈이 와서일지도 몰랐다. 이안은 영국의 날씨를 생각하고는 한국의 화창한 하늘을 즐기기로 했다.

 

몇 번 코너를 돌자 금세 목적지가 보였다. 모퉁이에 위치한 제과점은 안에서부터 분주해 보였다. 문에 닫혀있다는 팻말이 걸려져 있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문을 밀어 열었다. 딸랑, 하고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왔니? 네가 이안이구나.”

 

푸근한 인상의 중년 아주머니가 이안을 나와 반겼다. 그는 앞치마에 급히 손을 닦고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안은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민정 씨 맞으시죠?”

“딱 맞춰 왔네요. 오는 길은 헤메지 않았나요?”

“전혀요. 도서관에서 가까워서 금방 왔어요.”

“서후가 데리고 오는 사람들은 다 똑같이 그 말을 하더라고요. 서후도 도서관을 좋아하는데 다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나 봐요.”

 

민정의 너스레에 이안은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이안이 긴장해서라고 생각한 민정은 잠시 일을 보러 가겠다며 가게를 편히 둘러보라고 했고, 방금 나온 것인데 맛 좀 보라며 과자 몇 조각을 담아 주었다. 하나를 입에 넣으려던 이안은 서후도 금방 내려온다는 민정의 덧붙임을 듣고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레 가게를 살피기 시작했다.

 

민정이 운영하는 제과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카페를 겸한 것도 아니었기에 손님이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없었고, 대신 한쪽 벽면의 유리 케이스 안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디저트들이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본래 빵이 있었을 것 같은 판매대 위에는 갓 구워진 쿠키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나열되어 있었고, 옆으로 각종 구움 과자들이 식혀지고 있었다.

 

주택가의 작고 아담한, 지나치기는 쉽지만 한번 들르면 몇 번이고 다시 오게 되는 류의 제과점이었다. 이안은 내심 속으로 감탄했다. 이런 제과점이 집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행운일 것이다. 그리고… 이안은 과자를 입에 넣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런 과자를 판다면 반드시 다시 들리게 될 것이다. 설령 지구 반대편에 살더라도.

 

이안이 입안에 사르르 녹아드는 버터의 풍미를 감상하는 동안 서후는 계단을 반쯤 내려와 있었다. 그는 이안의 표정을 보고는 미소를 입에 올렸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민정 선생님 과자가 맛있죠?”

“앗, 네! 너무 맛있어서 내려오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네요.”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오늘은 엽귀의 서경이 아니라 심부름센터의 의뢰인으로 만나는 거니까요.”

 

서후는 살짝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긴장한 것이 티가 났나. 사실 이안은 서후와 귀문 내에서도 몇 번 말을 섞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의뢰인으로 연락해 왔을 때 조금 놀랐다. 존경하는 선배였지만 친해질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던 터라 내심 기쁘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막상 연락해온 의뢰인들은 이안의 예상에서 거리가 있었다. 첫 번째 의뢰인은 이안이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긍이 갔다. 대법전 내 연애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다이스 쪽에서 충분히 이안을 알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흥미가 가서 발을 뻗어왔겠지. 

 

두 번째 의뢰인은 조금 묘했다. 엽귀의 누가 전해준 걸까? 순전히 일손이 필요해서 의뢰를 했다기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타케시는 명백히 이안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나온 사람 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겸사겸사 벌초를 시켜먹긴 했지만. 엽귀의 선배 중 한 명이 이안을 걱정해서 이제는 외부인이 된 타케시에게 연락을 한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세 번째 의뢰인은… 이안은 솔직히 그 일화가 웃기긴 했다. 그 뒤로 하린과 몇 번 마주쳤고, 설원에서 시원한 욕설을 하던 방문자는 온데간데없고 고상하고 우아한 원탁뿐이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인사를 해주는 것이 이안을 썩 나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어쩌다 이 심부름센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인데, 이안은 하린이 말한 ‘리콰이드의 애인이기 때문에 눈여겨봤다’는 말을 믿기는 했다. 반만 믿는 것뿐이지. 그런 것 치고는 묘하게 우호적이었는데…

 

네 번째 의뢰인인 서후는 타케시와는 조금 다른 결로 긴장이 되었다. 이번이야말로 이안의 소문을 들은 서후가 그에게 한 마디를 해 주기 위해 불렀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그의 의뢰 내용을 생각하면 타케시처럼 일손이 필요해서는 아니…겠지? 이안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머릿속이 재빨리 가지런히 나열된 수십개의 아이싱 쿠키를 상영했다. 오늘의 이안은 예초기가 아니라 쿠키 틀이 될지도 몰랐다.

 

그 동안 서후는 이안이 쓸 앞치마와 모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몇 가지 물품을 건네고는 이안에게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전했다. 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너른 작업대와 오븐 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 제가 청소하는 걸 좀 좋아해서요. 취미거든요.”

 

청소가 취미인 사람. 이안 내에서 서후에 대한 평가가 더 무시무시한 쪽으로 재빨리 바뀌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서후는 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부끄러운 건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청소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잖아요. 그냥 더러운 걸 지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리고 노력한 만큼 성과가 보이니까 성취감이 들죠. 그래서 제과제빵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빵 구울 때는 그것밖에 생각을 안 하니까.”

“정말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매번 청소할 시간 내는 것도 일일 텐데.”

“일과가 그다지 차 있지 않아서요. 지인도 별로 없고, 아…”

 

서후는 말실수를 했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아마도 이 서경 엽귀는 사람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노심초사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이안은 더욱 친근하게 말을 붙이려 노력했다.

 

“그럼 다른 일 할 시간이 많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아시잖아요, 임무가 시도때도 없이 내려오는 거.”

 

이안이 웃으며 말을 받자 서후는 또 살았다는 듯이 얼굴이 환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문에서 언제나 서후의 사무적인 얼굴만 보아 왔기에 이안은 내심 놀랐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안 안의 반듯한 엽귀이자 처형인인 서후의 이미지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두 사람은 손을 깨끗히 씻고는 베이킹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막상 본방에 들어가자 서후는 임무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한결 부드럽고 편안한 톤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안은 한참 생각하다가 그 목소리가 민정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민정의 제자답게 서후는 설명을 상세히 했으므로, 초심자인 이안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미리 준비한 상온의 버터와 슈가파우더. 핸드 믹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계란을 풀고 조금씩 넣으면서 섞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이안은 서후가 시범을 보이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음은 박력분. 체를 친 다음 반죽이 될 때까지 자르듯이 섞는다. 여기까지 마친 두 사람은 냉장고에 반죽을 휴지시키는 동안 잠시 쉬기로 했다. 서후는 2층에서 차를 내오겠다고 제안했고, 이안은 그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끝, 창가에서 햇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고요한 실내에서 빛먼지가 떠다녔다. 본래 가정집이었던 것 같은 2층에서 서후는 제법 그 공간이 익숙한 듯이 돌아다녔다. 금세 차와 흠집이 가 상품으로 내지 못한 것 같은 과자들이 준비되었다. 이안은 티세트를 차리는 것을 도우며 실례가 되지 않을 만큼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향긋한 차가 과자와 잘 어울렸다. 솔직히 과자가 압도적으로 맛있었지만. 따뜻한 차를 앞에 두자 서후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가 차를 한 입에 대고 입을 열었다.

 

“2층은 원래 민정 선생님 집이에요. 주택을 개조해서 1층을 가게로 쓰고 있는 거거든요.”

“아아… 저, 여기 올라와도 되는 건가요?”

 

이안의 농담을 받지 못한 서후는 진지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저도 맨날 올라오고, 이번 일에 대해 이야기하니 선생님도 윗층을 써도 된다고 허락하셨거든요. 1층은 이야기 나눌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 말에 이안은 궁금증이 돋았다.

 

“정확히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아, 그… 후, 배…가 와서 베이킹을 도와준다고요.”

 

후배라는 말에 서후는 대단한 결례라도 저지르는 양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이안에게 서후는 존경하는 인물이자 까마득한 5계제 선배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었다. 이안은 얼굴을 밝혔다.

 

“저도 존경하는 선배가 의뢰해주셔서 기뻐요. 이렇게 대화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거든요. 어떻게 알게 되신 거에요?”

 

그 말에 서후는 얼굴을 확 붉혔다. 쑥스러운 듯이 그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아, 그건 연락을 받아서…”

 

핫, 이번에도 실수했다는 표정. 낭패감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이안은 서후에게 미안함을 느낌에 동시에 역시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죄를 지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후를 들들 볶을 수도 없었기에 이안은 그 말을 흘려들은 척을 했다.

 

“의뢰는 아이싱 쿠키 만드는 것을 도와드리는 것이었죠? 일손이 부족한 건가요?”

“으음,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서후는 자신이 하는 말이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거짓말은 못 하는 엽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안 씨와 대화해보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었거든요.”

 

이안의 머릿속에서 다이스의 소문이 파다한 연애담 과 하린의 둘이 사귄다고 공지사항 때렸잖아? 발언이 스쳐 지나갔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 맥락인가. 그것 외에는 딱히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운명을 지웠다고 들었어요. 좋아하는 사람과의 운명점을, 엽귀에 남기 위해서요.”

 

그쪽이었구나. 이안은 서후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깨닫고 몸을 곧추 세웠다. 서후는 찻잔을 내려다본 채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그랬거든요. 아니, 아직도 그러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전에는 바로 지워도 좋으니까 한순간이라도 이어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먼저 운명을 이으려는 시도도 했고요.”

“... 그렇다면 지금은요?”

 

서후는 시선을 찻잔에 둔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붉은색을 띄는 찻물이 맑았다.

 

“중간에 크게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어서, 모든 시도를 포기한 적이 있었어요. 친구랑도 싸웠고… 그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요.”

“네. 엽귀는 대법전의 감찰기관이잖아요. 우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죠. 아무리 아끼던 사람이어도, 가까운 사람이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면 처벌해야 해요. 그런 책무를 지고 있는 자가 감히 다른 누군가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꼼지락대는 손길에 찻잔의 찻물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한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줘 버리는 자신을 비관했어요. 잃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해버리고, 찢어야 할 걸 알면서도 매듭을 엮으니까요. 그 매듭이 나를 옥죄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죠.”

 

서후는 찻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듯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엽귀이기 전에 마법사에요. 그리고 우리를 인계에 묶어 간섭, 그러니까 교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인연 그 자체이죠.”

 

그 말을 마치고 서후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한쪽 눈이 깊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아마 의안일 것이다.

 

“이안 씨는 연인과 앵커를 맞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까 한참을 우물쭈물거렸던 인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임무가 관련되어 있을 때만큼 진중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단호함이 배어 있는 것은 어김 없는 귀문의 마법사였다. 이안은 드물게 잠시 말을 골랐다.

 

“앵커를 맺는 것은 그와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하지만 분명 운명이 없다고 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에요. 저는 그것 또한 사랑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엽귀의 마법사들은 대법전을 미워하기 때문에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전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시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이들을 처단하죠. 분명 개개인도 그럴 겁니다. 저는 연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운명을 맺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운명을 지웠던 거에요.”

 

서후는 확신에 찬 그 말에 잠시 놀란 듯 보였다. 성정이 섬세한 엽귀는 이안의 말을 한참 고려하다가 대답했다.

 

“이안 씨는 강하시네요. 그 관점 또한,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칼날의 방향의 차이라고 할까요. 저는 양날의 검이기에 검을 쥐면 손에 피가 배어들어옵니다. 이안 씨는 외날검이에요. 안정적이고 내구력이 좋지요. 그 검을 잘만 다룬다면 분명 당신의 앞길을 인도해 줄 겁니다.”

 

서후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기에, 이안은 따라 웃음을 걸었다. 이안은 서후가 사람을 칼날에 비유하는 것에서 그의 성정이 드러난다고 생각했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양날검은 다루기 까다롭지만 알맞은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무엇보다 강력하잖아요. 저는 서후 씨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양날검을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조금 상처를 입었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알아요. 저 또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서후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듯 보였다. 그의 말에는 의심 한 치 없었고, 흐느낌도, 흩뿌려진 피도 없었다. 오직 따스한 생명과 약속의 노래만이 가득했다. 이안은 잠시 그것이 서후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약속이 깨어지고 노래가 끊기기 전의 그.



두 사람은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내고 아이싱을 준비했다. 밀대와 하트 모양의 쿠키커터가 서랍에서 나왔다. 오븐을 예열하고 서후를 열심히 따라해 반죽을 찍어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쿠키의 고소한 냄새가 주방 가득히 퍼졌다.

 

다음은 아이싱을 올릴 차례였다. 서후는 이안을 위해 초심자도 따라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쑤시개로 찍은 붉은색 식용색소는 흰색 아이싱에 나선을 그리며 섞였다. 이안은 그 문양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조심스레 쿠키 단면에 아이싱을 찍었다. 아기자기한 하트들이 금세 붉고 흰 곡선의 설탕옷을 입었고, 그 곡선은 사방으로 부딪치는 이안의 사랑과 조금 비슷하기도 했다.

 

그리 많은 분량을 많든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설탕이 굳은 쿠키를 이안은 신기하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있는 이안에게 서후가 말을 걸었다.

 

“몇 개 상자에 담아드릴까요?”

“네?”

 

이안은 두 사람이 만든 쿠키를 내려다보았다. 몇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말인 걸까?

 

“보수 말이에요. 이것보다 적당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서후의 말대로였다. 분명 이 이상의 보수는 없을 것이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서후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이싱 쿠키를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는 것은 역시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던 걸까.

 

“저희 손님들도 많이들 그러시죠. 마음을 과자로 전달하는 거요. 달콤하고, 섬세한 것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닮았잖아요?”

“... 네, 꼭 그렇네요.”

 

이안은 서후를 마주 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존경하는 선배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그리고 이안 씨에게는, 제가 더 많이 깨달았어요.”

 

서후는 그렇게 말하며 과자를 한 상자에 담았다. 이안 역시 같은 것을 부탁할 참이었기에 서후가 능숙한 손길로 과자를 예쁜 종이 상자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포장을 마친 서후는 상자를 종이봉투에 담아 이안에게 건네며 그의 눈을 마주쳤다. 의안과 의안이 만났다.

 

“당신은 엽귀의 방문자입니다, 이안 허드슨. 그리고 엽귀는 당신과 같은 인재를 가져서 행운이에요.”

 

이안은 대답할까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한낮의 제과점은 조용했다.

 

“그리고 당신은, 훌륭한 제과점의 설탕공예가이자 좋은 사람이에요, 자서후 씨.”

 

서후는 평생 그 말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덴의 숲 속, 어느 날 누군가에게 보여 주었던 미소가 인계의 작은 제과점에서 다시 꽃피웠다.

 

 




네 번째 의뢰인: 엽귀의 서경, 〈흐느끼는 생명과 피의 노래〉 자서후

보수: 이안이 직접 만든 쿠키

한 줄 후기: 쑥스러웠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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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 이안인가 하는 애구나?”

 

시린 바람이 부는 겨울, 이안은 쇼핑몰 정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 방문자와 마주했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혹은 마음에 든 건지 너 딱 잘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둘의 나이는 비슷했으나 일단은 까마득한 대법전 상사였기에 이안은 존대를 택했다.

 

“네, 맞는데요?”

 

그러나 존대한다고 해서 말이 곱게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안은 이것이 의뢰라는 걸 되새기고는 심호흡을 했다. 상대방은 고객이었고, 자신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을이었다. 기억하자, 이안 허드슨. 상대는 5 계제 원탁이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나 봐, 보통 네가 먼저 나와 있어야 하거든.”

“예정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나왔는데, 더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이안은 애초에 이 방문자가 자신에게 뭘 원하고, 왜 그리 고까워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염화로 연락받았을 때는 평범한 것을 넘어서 되려 지나치게 수수한 의뢰 같았는데… 이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뢰는 기억하지? 우리 주연이한테 줄 선물을 고를 거야.”

“애인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아, 외전 출신인데 서경이거든? 곧 설날이니까.”

 

…한국에서는 설에 연인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보편적인가? 이안은 솔직히 그 분야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잠자코 수긍했다.

 

“청.탁.을 드려보자는 거지.”

“네에?”

 

안대를 안 차고 있어서 자신이 엽귀인 걸 잊은 건가? 아니면 5 계제쯤 되면 이렇게 선전포고도 하고 그러는 걸까? 아니다, 딱 봐도 자신을 놀리는 거였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런 마법사에게 걸려서. 질이 안 좋았다.

 

“설에는 보통 어떤 선물을 교환합니까?”

“으음, 스팸 세트, 홍삼, 샤워용품, 과일…이려나.”

 

전혀 연인과 교환할 만한 품목들이 아니었다. 이 중 특정 품목을 교환하는 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면 위의 목록은 전혀 참고가 되지 않았다. 이안이 내적 한숨을 쉬는 동안 두 사람은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연휴를 맞은 한국의 쇼핑몰은 휴일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설 특선이니, 새해맞이 세일이니 하는 매대들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소꿉친구인 에이미를 따라서 쇼핑 간 적이 몇 번 있었고, 이안은 그에게서 쇼핑 파트너로 제법 유능하다는 농담 섞인 평도 들었다. 하린은 에이미 또래니까 보는 물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안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전혀 아니었다. 이안은… 이게 몇 번째야, 일곱 번째 쇼핑백을 매장 내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쇼핑백은 각양각색의 매장의 것이라, 제각각 크고 작은 사이즈를 뽐내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무거웠다. 틀렸다. 하린은 애초에 주연의 선물을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냥 구실이고 자신을 쇼핑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을 작정이었다. 이젠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지 하린은 여덟 번째 쇼핑백을 이안에게 떠넘겼다.

 

“정말로 이런 게 주연 씨의 선물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됩니까?”

“그럼 내가 놀고만 있다는 소리야? 우리 주연이는 내가 제일 잘 알거든?”

 

아니다. 저건 백 퍼센트 즐기고 있는 거다. 이안은 소파에 널브러져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하린과 눈을 맞부딪쳤다. 하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잠자코 내 뜻에 휘둘리기만 하면 된다는 눈빛이었다. 원탁들을 다 저런가? 하지만 이안은 그 뜻에 따라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먼저 주연 씨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뭘 좋아하십니까?”

“음… 나?”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옷은 어떤 스타일로 입으십니까? 좋아하는 음식은 있으시고요?”

“캐주얼하게 운동화나, 사탕이나 과자 세트도 좋을 것 같아.”

“운동화 좋네요, 그걸로 합시다.”

 

이안은 이제 여덟 개가 된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일어나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린이 잰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뒤에서 뭔가 불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하린이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단은 따라 준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은 신발 브랜드가 모여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하린은 먼저 앞서 나가서 이 운동화가 신상이니, 이건 디자인이 별로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안은 그것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매장을 둘러보았다. 점원은 다른 일을 보느라 바빴는지 매장 안에 보이지 않았다. 재고를 쌓아두는 듯한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찬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을 기묘하게 생각한 이안은 하린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척 살금살금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자명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거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마법재액. 이안은 주위의 눈길을 크게 끌지 않으면서 하린을 이쪽으로 데려올 궁리를 했다.

 

[매장 뒤 창고에서 마법재액을 감지했어요. 눈치챈 사람은 없어요.]

 

숱한 현장 임무를 겪어 온 5계제 마법사답게 하린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염화를 보냈다.

 

[둘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그쪽으로 갈게. 운이 좋으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단장까지 회수할 수 있을 거야.]

 

벽에 전시된 운동화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하린이 이쪽으로 태연하게 걸어왔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창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매서운 서릿발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단장일까요.”

“습격이야, 조심해.”

 

하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펠바운드가 펼쳐졌다. 노을의 도시가 끝없이 펼쳐나가고, 인과를 묶는 리본이 세상에 축복을 내렸다. 스스로를 마법소녀라고 부르는 마법사들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직접 전투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독특한 아크로바틱과 눈앞에서 빠르게 곡선을 그리는 리본에 이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전의 시작이었다.






마법전은 눈 깜짝할 새에 끝난다. 하린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만한 단장을 홀로 처리했다는 것에 이안은 내심 놀랐지만 구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린도 그만큼 익숙해 보였고, 칭찬하는 것이 오히려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이안은 비슷하게 자존심 센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무사히 회수했다고 생각한 단장에서 시린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두 사람을 빨아들일 기세로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갔다.

 

“어, 하린-!”

 

말을 채 끝 마지치도 전에 이안은 마력의 급류에 끌려 들어갔다. 마도서를 점검하느라 한 발 뒤늦게 하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급류는 두 사람의 비명을 삼킨 채로 어딘가로 데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워터슬라이드가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엇이든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닿는 곳마다 손끝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먹먹한 채로 지르던 비명이 어느 새에 귀에 들리고, 두 사람은 폭신한 눈밭에 내팽겨졌다.

 

“이런 미친!”

 

이안이 가장 먼저 들은 것은 하린의 시원한 욕설이었다. 세상 온갖 고상한 척을 다 하던 것도 마법재액 앞에서는 별 수가 없나 보다. 

 

“주연이가 준 사탕이 깨졌잖아!”

 

욕을 하게 만든 건 마법재액이 아니라 작은 사탕이 겪은 불의의 사고였다. 하린이 뽀갈난 사탕을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고 애쓰는 동안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 끝부터 끝까지 온통 설원이었다. 눈은 무릎까지 푹푹 빠져 이동하는 데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마법으로 몸을 데울 수 있다는 정도일까. 당장 얼어 죽는 건 면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느냐였으니…

 

이안은 잠시 리콰이드에게 염화를 시도했다. 그리고는 대법전의 몇 마법사들에게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이 묵음이었다. 아무래도 특수한 이경인 것 같았다.

 

“염화가 안 돼요.”

“알아..! 어떡하지, 이다음에 주연이랑 데이트가 있는데, 걱정할 텐데…”

 

이안은 마력을 뻗어 주위를 조금 더 살펴보았다. 저 멀리 나무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이안이 그렇게 전하자, 하린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 보는 것을 제안했다.

 

“이 얼어 죽을 이경에도 출구는 있겠지.”

 

이안도 속으로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나 신발이 눈에 얼어붙기 전에 그보다 큰 문제가 발생했다. 땅이 우르릉,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동시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기도 힘든 언덕에서 눈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

 

이안은 하린의 손을 낚아채고 무작정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린은 이안이 앞서서 이끈 덕에 간신히 따라올 수 있었다.

 

“웬 산사태야!”

“몰라, 이경의 법칙을 어떻게 알아!”

“시아라면 금방 알아냈단 말이야!”

 

시아라는 사람이 누구인진 몰라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인 것 같다는, 지금 상황에서 대단히 쓸데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둔 이안은 눈의 파도가 멈출 때까지 달렸다. 다행히 땅의 울림은 점차 잦아들었고, 두 사람도 온몸이 눈밭에서 굴렀다는 점만 빼면 멀쩡했다. 그러니까, 한 다리가 파묻히거나 한 사람이 여섯 피트 아래 있거나, 하는 문제는 면했다는 뜻이었다.

 

“환영식이 한번 성대하네!”

 

하린은 금방 제 페이스를 되찾고는 눈을 털어내는 데 열중했다. 이안도 같은 행동을 하면서 말을 얹었다.

 

“단장이 독로였던 것 같지.”

“그래… 정식 분과회를 파견할만한 임무인데, 이건. 일단 우리는 탈출을 목표로 하자.”

“그게 좋겠다.”

 

둘은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다. 다행히도 이안이 보았던 나무에서 그렇게 멀리 달려오지는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하린이었다.

 

“.... 그런데 너 왜 반말해?”

“아… 정신없다 보니까 무심코. 존대로 돌아갈까?”

“아냐, 됐어. 다시 존대하기도 좀 그렇고, 어차피 나이도 비슷하잖아?”

 

이안이 처음부터 생각하던 것을 하린은 입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는 다리에 박차를 가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은 푹푹 들어갔다.

 

“나도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 리콰이드 던의 애인이 엽귀의 방문자라길래. 사실 그쪽에 좀 더 집중했으면 그래도 비슷한 이미지라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친구 중에 엽귀의 방문자가 있거든, 세진이라고.”

 

이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하린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너네 애인하고 내가 사이가 진짜 안 좋거든? 허구한 날 서궁에서 의견이 갈리고… 이젠 아마 베일 없어도 서로 알아볼걸? 하도 싸워서.”

 

이건 조금 신선한 이야기다. 다른 원탁에게서 원탁인 리콰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기에 이안은 귀를 쫑긋했다.

 

“근데 어느 날 그 양반이 바뀌었다는 거야. 애인도 생기고, 세상에 애인이 방문자. 오래 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는 거의 공지사항 때렸잖아? 둘이 사귄다고.”

 

이안은 목부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그래 봤자 말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좀 곯려 주고 싶었나 봐. 근데 보니까 너도 고생을 여간 할 상은 아닌 것 같다. 엽귀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휘어지느니 부러질 거 보면 걔도 좀 생각나고. 넌 또 어쩌다가 엽귀냐.”

 

주절거림과 넋두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이안은 잠자코 듣다가 하린의 말이 끝났다 여겨졌을 때 입을 떼었다.

 

“그럼 넌 또 어쩌다가 원탁의 방문자인데?”

“한 마디를 안 지네.”

 

하린이 픽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설원을 걸었다.

 

“너도 지금 방문자잖아. 그냥 그게 쭉 이어진 것뿐이야. 그리고… 난 내가 방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사람의 마음이란 거 말이지.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미인지 이안도 알 수 있었다. 분노와 충동, 온갖 날뛰는 감정들은 다스린다고 해서 쉽게 다스려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버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파도가 치듯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그리고 원탁은… 솔직히 말하는 건데, 네 애인처럼 고결한 이유로 들어간 건 아니야. 모두를 지킨다던가, 책임을 짊어진다던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 없었지. 들어가고 나서 달라지긴 했어도.”

 

하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듯 말을 쉬었다.

 

“세계 자체를 원망했던 것 같아, 나는. 일그러진 인과라고, 거기에서 발버둥 쳐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가장 효과적으로 발버둥 칠 수 있는 기관에 들어갔어. 영향력이 있는 기관.

 

“그런데 일그러진 건 세계가 아니었어. 나였지. 그걸 깨닫고 나서야 세계가 제대로 보이더라고. 그리고 원탁으로써 해야 할 일도.”

 

하린은 잠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너도 세상을 고통으로 보고 있니? 그렇다면, 그건 네가 고통에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안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이해했다는 것을 부드러운 미소로 대신 전달했다. 

 

“더 이상 고통에 있지 않게 된다면 세상을 고통으로 보지 않게 될까?”

“글쎄, 그다음은 모르지. 여전히 세상을 똑같이 볼 수도 있고, 조금 달리 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잖아? 너지.”

 

그 말에는 이안도 동의했다. 하린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동의했을지는 몰라도, 감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탁의 방문자인 거야?”

“그래. 그리고 서경 애인을 뒀다는 것도 잊지 마라? 내 업적 중에는 주연이랑 사귀는 것도 있거든?”

 

이번의 자랑에는 이안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공통점이네. 서경 애인을 둔 방문자.”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도중 어느새 나무는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사과나무였다. 그것을 본 하린은 잠시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보아하니 이 나무가 인계로 돌아가는 독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하린은 팔을 뻗어 사과 하나를 땄다.

 

“자, 보수야.”

“응? 보수는…”

“보수의 조건은 알고 있어. 이게 보수야. 보수 맞아.”

“....”

 

그렇다면야. 솔직히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을 파고들 수는 없는 법이고, 그렇다고 하린이 빈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안은 사과를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먹으라고 주는 것 아니야. 땅에 심어서 키워,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

“십 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도 오래 못 가겠다는 거야? 설마.”

 

장난스러운 도발에 이안이 씩 웃었다. 

 

“그래, 심어서 키울게. 싹이 트고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독로를 타고 인계로 돌아왔다. 도착한 곳은 바로 단장을 처음 수집한 창고였다. 서둘러 대법전에 연락을 한 뒤 급격히 지친 두 사람은 미적거리며 운동화를 골랐다. 하린은 이안의 센스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조언을 참고했고, 후속 분과회가 수습을 위해 달려오기 전까지 둘은 주연을 위한 운동화를 구입할 수 있었다.

 

“어? 세진아?”

 

분과회원 중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는지 하린이 앞으로 나섰다. 긴 민트색 머리를 하고 노란 의안을 낀, 이안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이안은 옆에서 목례를 했다.

 

“휘말렸다는 마법사가 너였어?”

“주연이 선물 사러 나왔다가 이경에 처박혔다니까. 살아 나와서 다행이지.”

 

세진은 그 뒤에 있는 이안을 눈여겨보듯 짧게 시선을 줬다.

 

“옆에 있는 분은 전에 얘기한?”

“응, 심부름 어쩌고 그거.”

“혼자가 아니었어서 다행이다.”

“햇병아리 마법사긴 했어도 도움은 됐지”

 

두 마법사는 잠시 이안에게 시선을 주다가 또 둘만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전 부치느니, 전부치느니, 시아에게 전을 가져다주느니, 상견례를 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안이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안은 예의 바른 에스코트처럼 리콰이드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있었다.

 

둘은 짧게 작별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아마 세진이 속한 분과회가 이경에 대해 간단한 조사를 맡은 것 같았다. 하린은 뭘 확인하듯이 이안을 보았다.

 

“바로 대법전으로 돌아갈 거야? 갈 거면 같이 가게.”

“아, 봐 둔 게 있어서 그것 좀 사고.”

“그래. 보수 잘 챙기고, 솔직히 의문투성이인 보수일 테니까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한번 도와줄게. 애인이랑 행복해라.”

“너도.”

 

씩 웃어주는 이안을 보며 하린은 제 갈길로 떠났다.  이안도 잠시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리콰이드의 집무실로 가는 길은 익숙하다 못해 편안했다. 창 밖에 군데군데 눈이 긴, 맑은 날이었다. 미리 들르겠다고 연락을 했으니 리콰이드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들어와’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문을 열면서 이안은 앞머리를 털었다.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전에 얘기했던 DVD, 구했어! 예전 영화라 시간이 좀 걸렸지.”

 

리콰이드는 집무실에 앉은 채로 허리를 펴 이안 쪽으로 시선을 줬다.

 

“잘도 그런 걸 구해 오는군. 주변에 골동품점이라도 있나?”

“아, 그러고 보니…”

 

하린과 쇼핑을 하는 도중에 눈에 걸렸던 물건이 있다. 이안은 주섬주섬 백팩을 풀어서 그것을 꺼냈다. 한 세트에 만 얼마짜리 하던 실링 왁스 세트였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런 게 있더라고. 당신도 해 본 적이 있어?”

 

리콰이드는 잠시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미간을 지푸리다가 인장이 눈에 들어오자 펜을 내려놓으며 후, 하고 웃었다. 

 

“취미인가? 꽤 고상한데.”

“... 그런 거야? 뭔가, 앤틱 한 걸 구경하고 있으니까 추천받아서…”

“앤틱 한 거긴 하지. 요즘 취미로 맞춰서 개량된 모양이긴 하지만. 흠…”

 

리콰이드는 어느새 이안 근처까지 걸어와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소파에 앉아 성냥을 그었다. 실링 왁스가 데워지면서 녹아 뚝, 뚝 떨어졌다. 그 조금 옆에는 봉투에 고이 담긴 편지까지도.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제가 봐도 어설픈 손동작이었다. 리콰이드는 편지 한 번 보고, 녹아든 왁스를 한 번 보고, 인장까지 한 번 보고,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한 손을 까딱이더니 손때가 묻은 금속의 낡은 인장을 하나 불러왔다. 그것은 책상에서 손으로 슥 날아와 스치더니 곧 이안 옆에 내려앉았다.

 

“...?”

“다 녹였으면, 편지봉투 입구 쪽으로 떨어트려야지.”

 

어리둥절한 이안의 옆에서 리콰이드가 편지봉투 중앙 쪽을 마른 손으로 톡 톡 가리켰다. 

 

“아, 응.”

 

이안이 입구에 왁스를 녹인다고 열중하는 동안 리콰이드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걸 써라.”

 

자신 옆에 있는 금속의 인장을 본 이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당신이 쓰던 것 아니야?”

“내가 썼던 거지. 실링을 할 거라면, 이제 그걸 써라.”

 

이안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도 도장을 공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심조심 물었다.

 

“내가… 써도 되는 거야?”

“그래.”

 

끝이 떨린 이안의 목소리에 리콰이드가 답했다. 그는 옆에 앉아서 소파에 팔을 올리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부드러웠다. 이안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 조심스레 인장을 찍었다.

 

꾸욱, 누르고 난 뒤 입김을 몇 번 불어 식힌 다음, 이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편지를 리콰이드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는 최대한 진중한 눈빛을 쥐어짰다.

 

“나 없을 때 읽어.”

 

리콰이드는 먼 옛날 옛적, 자신의 가문 인장이 찍힌, 러브레터일 게 분명한 편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안 되고?”

“안 돼.”

 

이안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목 부근이 아직 홧홧했다.

 

“집에 돌아가서 읽어.”

“단호한데.”

 

리콰이드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마른 손으로 편지를 받았다. 이안은 품 속에 넣어둔, 하린이 건네준 사과를 생각했다. 사과가 싹을 틔워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는 아마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 파도가 바위를 부술 때까지의 시간 또한.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되겠지.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이안은 하린에게 들은 그의 서경 애인과, 원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이안은 자신의 연인에게 부끄러울 만큼 마음이 담긴 러브레터를 전하고 있었다.

 


세 번째 의뢰인: 원탁의 방문자, 〈침잠하는 우리의 비상〉 이하린

보수: 설원의 사과 한 알.

한 줄 후기: 생각보다 괜찮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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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자망자(好者亡者)
2022. 1. 29.

https://youtu.be/RqDBtn-1VqY

 

“하아아아….”

“넌 내 사무실 바닥 꺼트리려고 들어왔냐?”

 

츠요시가 삼백십육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은 옆에서 혀를 쯧쯧 차면서도 츠요시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츠요시는 드러누워 있던 사무실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하다가 다시 철푸덕 엎어졌다.

 

“흐어어어….”

“계속 방해하면 애들 불러서 내쫓는다.”

“너무해요! 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몇 시간째 내 소파에 앉아서는 세상이 끝난 마냥 음침하게 앉아 있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거냐? 하루이틀도 아니고.”

“저 원래 이런 거 아시잖아요. 알고 팀에 데려온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쇼파 좀 빌릴게요오…”

“에휴, 내 팔자야.”

 

다시 대장이 타자를 치는 속도가 빨라졌다. 츠요시는 볼을 누르는 싸구려 가죽의 감촉에 얼굴을 꾹 꾹 문대다가 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왜, 육개장 해 준다고 말했잖아.”

“육개장이 문제가 아니라고요…”

“얼씨구, 그럼 또 뭐가 문제야.”

 

어느새 대장이 자판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껸 채로 츠요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판이 깔리자 츠요시는 되려 쿠션 뒤로 머리를 숨기며 한숨을 쉬었다.

 

“저 아시잖아요, 맨날 하는 그거…”

“....”

“또…”

“... 죽었냐?”

“네에에….”

“너도 참 기구하다.”

 

대장의 한숨이 쿠션을 비집고 들렸다. 츠요시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요! 제가 웃기시죠 지금! 전 진심이었단 말이에요!”

“그래, 그래. 내가 너 진심인 거 모르겠냐. 넌 지난 연인들한테 다 진심이라고 하잖아.”

“그게 아니라, 진짜 좋아했다고요…”

“얼굴을?”

“그 사람을요!”

 

대장은 등받이에 쭉 기대서 츠요시를 멀찍이 가늠했다.

 

“너 그때 좀 이상한데 싶긴 했다. 같이 술 마셔줘?”

“안 마셔요…”

 

그 말에 대장의 표정이 조금 더 진지해졌다. 평소의 츠요시라면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하는 비명을 질렀겠지만 지금은 등을 보이고 있는 데다가 추레하게 소파에 엎어져 있었다.

 

“술 안 마실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건데…”

“....”

“괜찮냐?”

“몰라요… 시체라도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츠요시는 소파와 쿠션 사이 급조된 어둠 속에서 그날의 충격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화살이 심장을 꿰뚫을 때 그는 화살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살해한 토요코를 원망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충격만이 눈앞을 덮었고 다리에 힘을 풀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했다. 리더 자리 간의 분쟁. 죽지 않더라도 험한 꼴을 보았을 것이며, H.E.A. 에게 체포되었더라도 사형에 처해질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한 번쯤 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투가 끝나고 부축한 다음에 번호를 주면서 밥 한 번 먹자던가, 영화 한 번 보자던가… 그런 볼품없는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그가 그 진심에 응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몇십 번이고 되풀이한 장면.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보았으면서도 츠요시는 자신을 의심했고, 또 의심하고 싶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신을 좋아하는 나에게 기대해보고 싶다고 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이미 전했을지도 몰라. 얼이 빠져 있는 나머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를 잊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잠시 만난 사람에게 누가 관심을 두겠는가? 그리고 리베리온즈의 내부 알력 다툼에 죽은 그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미련한 자신이나 여기서 이러고 앉았지.

 

…한 달? 두 달이면 잊을까? 츠요시는 멍하니 생각했다. 대장의 말대로 술을 마시면 잊기 조금 더 쉬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제정신의 츠요시는 제정신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랑의 후폭풍을 맞고 있었다.

 

아무렴 어때.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다. 마지막도 아닐 것 같고… 입안이 씁쓸했다. 다음 동창회 전까지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겠지. 그는 온 세상의 고난을 다 끌어모아 삼백이십 번째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아아……”

“시체 찾는 거 도와줘?”

“아니에요….”

 

제법 호의가 담긴 대장의 제안에도 츠요시는 머리를 쿠션에 쿵 쿵하고 두드렸다. 대장은 혀를 쯧 하고 찬 다음 다시 컴퓨터로 돌아갔다. 자판 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잔잔히 울렸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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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허드슨과 대의멸친의으아악
2022. 1. 28.

이안은 인정해야 했다. 고작 한 번의 의뢰로 베테랑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 내에서도 상상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켜놓은 모양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예초기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수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허리를 펴서 아래를 바라보니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은 섬이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울릉도에서 이안은 벌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상황에 처했느냐 하면, 이안은 자신밖에 탓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이안 허드슨의 심부름센터.  분명히 그 글자를 쓴 사람은 자신이었고 동시에 어떤 궂은 의뢰가 들어와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다짐이 필요한 날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파악한 상황에 어이없어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목 뒤에서는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안은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다시 한 번 닦았다. 챙겨준 벌초용 밀짚모자가 아니었더라면 이안은 이미 머리에서 달걀 프라이라도 굽고 있었을지 몰랐다. 다시 허리를 숙여 몇 번 더 예초기를 돌리자 금세 정적이 시끄러운 모터 소리에 묻혔다.

 

“어이!”

 

아래서 이안을 부르는 소리에 이안은 예초기를 끄고 허리를 폈다.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곧 열여덟이 되지만, 허리가 안쪽으로 굽어 있는 느낌에 이안은 밑의 사람이 언덕을 올라올 때까지 허리를 곧추 펴는 데 열중했다. 올라온 남자는 이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했는데? 어때, 할만 해?”

“할 만 한, 것 같아요.”

 

단어와 단어 사이 공백은 웃음 섞인 한숨이었다. 타케시는 알만하다는 듯이 이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랫쪽도 거의 다 정리했어. 고생 많았다. 이제 마무리만 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네!”

 

이안은 낫을 들고 벌초 모자를 쓴 전 엽귀, 노가와 타케시를 바라보았다. 엽귀 시절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던 터라 이안은 타케시가 심부름센터로 의뢰를 해 왔을 때 그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보호장비를 차고 벌초하는 모습을 본 결과, 그 이미지는 거의 못 쓰게 된 지경이었다.

 

이안은 낫이 아니라 창을, 편한 옷과 보호장비가 아니라 제복을 입은 타케시를 상상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도무지 불가능했다. 이미 자신 안에서 타케시는 엽귀가 아닌 벌초 선배였다.

 

“그런데 처음 치고는 꽤 잘 하는데? 해 본 적 있나?”

“용돈벌이로 잔디깎이를 좀 했거든요.”

 

정말로 가지런히 자란 잔디를 깎는 일이었지 밀림을 초원으로 만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경력으로 인정된다는 건지, 타케시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적임자를 골랐구만.”

“하하, 감사해요.”

 

정말? 정말 이 인선이 최선인가? 이안은 아방궁 셋과 임무에 배정되었을 때 원탁에게 보냈던 시선을 애꿎은 예초기에게 보냈다. 하지만 타케시의 말대로 완전히 헤매거나, 적어도 다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타케시의 말에 조금은 신뢰를 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이 적당히 수풀과의 싸움을 끝내고 마을로 내려왔을 때, 마을은 이미 점심상을 차리는 데 한창이었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쌀밥과 수육에는 이안도 자신이 얼마나 허기져 있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곧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기를 들었다. 몇몇 인물이 시큼한 흰색 음료를 권했으나 타케시에 의해 적당히 제지되었고, 이안은 궁금했지만 예의에 어긋날까 걱정하여 더 묻지는 않았다.

 

점심상을 깨끗하게 비우자 타케시는 이안에게 소화를 시킬 겸 섬 외곽을 걷자고 제안했다. 그제야 이안은 노가와 타케시, 전 서경엽귀이자 현 서경학원의 정확한 의뢰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사시는 울릉도의 벌초를 도와달라고 하셨지?’

 

그러고 보니 타케시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상당히 의외인 의뢰였고, 잔디 깎기 정도로 생각한 자신은 타케시가 온갖 보호장비와 모자를 들어 올렸을 때 무언가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리도, 팔도, 다리도 내일 무시무시한 근육통을 예고하는 지금은 웃어넘길 일이지만.

 

두 사람은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마을길을 걸었다. 거세다고 할 정도의 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은 큰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내가 전 엽귀였다는 건 들은 적이 있지?”

 

이안은 엽귀 내부에서 들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십여 년 전 엽귀에 들어와서 착실하게 임무를 하다, 돌연 한 임무 이후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학원으로 이직했다는 마법사. 그와 같이 엽귀는 성실하게 임무를 하다가도 갑자기 떠나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고 들었다.

 

“〈대의멸친의 눈먼 창〉이셨다고.”

“컥! 콜록! 콜록!”

 

마침 물을 들이켜던 타케시가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이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지 되짚었다.

 

“그래, 전에는 그 이름으로 불렸지. 아버지를 모시면서도 참 불효자였어.”

 

마법명의 뜻은 알고 있었기에 이안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엽귀를 나온 건 내 신념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마법을 악용하는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내 의지가 꺾인 것도 아니고.”

 

타케시는 한 곳에 멈춰 서서 시야 아래애 펼쳐진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은 파도가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쳐 희게 부서졌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고 나서야 타케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하나뿐인 아버지를 더 늦기 전에 모시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용종이신 아버지는 친아들도 아니었던 우리 형제를 거두어 주셨어. 그리고 동생이 죽고, 그 일이 있고 나서도…”

 

타케시는 바다의 끝을 가늠하듯이 눈가를 좁혔다.

 

“언제나 나를 한결같이 대해 주셨지. 철이 들 때가 된 거야, 나도. 그래서 엽귀를 떠난 거다.”

 

그 말을 마치고 난 다음 타케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다른 소중한 것이 생겨서 엽귀를 나오는 것은 절대 비겁한 행동이 아니야. 나는 내가 엽귀로 도망쳤음을 깨닫고 내 눈을 돌려받았다. 그러니 잘 들어둬라, 이안. 너는 아직 가능성이 많아. 내 이야기를 기억해 두도록 해.”

 

이안은 타케시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케시가 한 말은 자신을 향한 것임에 동시에 스스로에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안은 수긍했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한 말을 수용했다. 이안의 눈빛을 읽은 타케시가 가볍게 씩 웃었다.

 

“어린 방문자가 엽귀에 들어왔다고 해서 걱정했더니, 걱정할 게 하나 없었구만. 그러니 너무 남의 이야기를 담아 듣지 말거라. 내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일 뿐이니까.”

 

타케시는 손을 뻗어 이안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머리를 흩트려놓았다. 이안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곧 그가 품 안에서 안대 하나를 꺼내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안대를 쓰지 않는구나. 하지만 나는 아니었지. 이 안대는 내가 엽귀였을 적 사용하던 것이다.”

“... 소중한 물건이겠습니다.”

“응, 그렇지.”

 

이안은 조심스레 타케시에게서 안대를 받아 들었다. 부드러운 검은 천은 좋은 재질이었고, 피부에 까슬하지 않았다. 이안은 조심스레 안대로 의안을 감쌌다. 타케시는 끈의 위치를 두어 번 조정해 주고는 물러나서 모습을 관찰했다.

 

“감사합니다. 보관해 두고 싶으실 물건일 텐데…”

“괜찮아. 이제는 과거가 된 일이기도 하고, 그것보다 소중한 건 충분히 많이 있어. 게다가 네 보수에 대해 듣자마자 딱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타케시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씩 웃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건 생각보다 어색했다. 그래서 리키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손길도 평소처럼 확신에 찬, 혹은 성급한 것이 아니라 여백에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언제나처럼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이안은 쭈뼛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책상 앞에서 리콰이드가 서류의 산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안은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하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리콰이드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생각한 순간, 이안은 고개를 든 리콰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른쪽 안경알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에 안대를 차고 있었다. 이안은 입 안에 미처 사라지지 못한 남은 단어들을 우물거렸다.

 

"아… 아직 일 많이 남았어?"

"거의 다 끝냈다. 오겠다고 한 시간보다 조금 이른데."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이안은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릴 궁리를 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입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안대를 했군."

 

그러나 리콰이드가 조금 더 빨랐다. 이안은 지나치게 가까운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리콰이드는 팔을 들어 이안의 한쪽 볼을 손에 담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검은 안대의 끝자락을 매만졌다.

 

"무슨 일이 있나?"

"그냥, 선물 받아서… 별로야?"

“선물?”

 

어색한 건지… 설레는 건지. 속이 울렁거릴 듯 천천히 식었다. 감추기 위해 이안은 평소 자신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눈알을 도로록 굴려 아직 닿아있던 리콰이드의 손길을 보았다.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삐죽이는 투로 나왔다. 이래서는 칭찬을 듣고 싶어 안달 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안은 감정에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리콰이드는 조금 우습다는 듯이 눈을 휘었다. 픽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하며 내리는 리콰이드의 손을 이안이 잡아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두 손이 맞닿아 온기가 느껴졌다. 이안은 리콰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번째 손가락의 금속이 체온으로 미지근했다. 그 복잡한 음각을 이안의 손가락이 한번 훑었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리콰이드가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하며, 이안은 그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반지는 차갑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두려우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불안은 용기의 색을 띄었고, 이안은 신중하게 보라색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안대를 쓴 눈이 답답하지 않았다.

 

 

느슨한 햇살이 들어오던 날, 엽귀는 원탁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번째 의뢰인: 학원의 서경, 〈송양지인의 곧은 창〉 노가와 타케시.

보수: 타케시가 엽귀일 적 사용하던 안대.

한 줄 후기: 다음번에도 부탁하고 싶을 정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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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이안은 자신이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크레도의 탑 입구에서 열세 살쯤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칼에 노란 눈을 한 소녀가 튀어나왔을 때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소녀는 탐색하듯 이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샛노란 눈이 마주치자 이안은 그 눈의 동공이 세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연락하신 분 맞으시죠?”

 

기묘한 탐색을 끝내기 위해 이안은 먼저 입을 열었다. 때마침 이안의 바로 앞에 서 있던 소녀는 입꼬리를 올려 히죽, 하고 웃었다. 눈가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번뜩였다.

 

“네, 제가 맞아요. 다이스라고 말했었죠?”

 

이제 정상인처럼 굴기로 마음먹었는지 다이스는 무릎 위까지 오는 붉은 원피스를 툭툭 털었다. 이안은 그 몸눌림이 몸에 밴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본래의 움직임은 그것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깨어 놓는 것은 다이스의 다음 말이었다.

 

“그럼 저 이제 돌아가도 돼요?”

“네? 그럼 의뢰는…”

 

이안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펑! 소리와 함께 작은 연기가 일었다. 몇 번 기침하는 사이 시야가 돌아왔고, 눈앞에는 노란 눈을 한 검은 고양이 한 마리만이 서 있었다.

 

“역시 이게 편하다니까요! 초면부터 이 모습이면 못 알아볼 게 뻔하니까 신경써준 거라구요.”

“원래 고양이셨군요. 이제 한눈에 알아보겠어요.”

 

다이스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검은 꼬리로 이안의 다리를 가볍게 스쳤다.

 

“저도 멀리서부터 누가 그 유명한 이안 허드슨인지 알아보겠던데요?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길 줄이야!”

 

이안이 머쓱한 기분에 뒷목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다이스는 재빨리 명함을 꺼냈다.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이안 허드슨 심부름센터. 단, 마법을 악용한다고 판단한 것은 거절할 수… 아무튼. 시키는 건 다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쩐지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이죠! 그건 걱정 말라구요. 그럼 첫 번째 의뢰!”

“죄송하지만 한 분당 한 의뢰만 받고 있습니다.”

“떼잉쯧… 그럼 이건 그냥 아이스브레이킹으로 쳐요. 천애로써, 저도 소문이 파다한 당신의 연애담을 듣고 싶은데요?”

 

이안은 목부터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떠 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이는 그다지 없었을뿐더러 자주 겪는다고 해서 덜 부끄러워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길고 상세한 버전을 듣고 싶으세요, 아니면 짧은 버전을 듣고 싶으세요?”

“꺄아아!”

 

고민이 무색하게 다이스에게는 그 대답만으로 충분한 건지 작고 귀여운 앞발로 이안의 다리를 마구 응징했다. 장난스럽게 때리는 것을 알면서도 슬슬 아프기 시작한 이안은 다이스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다이스는 얌전히 안기다가 이안이 안정감 있게 몸을 받치자 어깨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왜 때리시는 건가요?”

“이건 엄청 좋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 대가예요! 세상에, 대법전은 아직 살아있었군요!”

 

라투나 님께서 들으셨다면 주무시다가도 깨어났을 발언이기에 이안은 그가 환몽전 깊은 곳에 잠들어 계심에 짧게 감사했다.

 

“연애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물론이죠! 저는 사랑을 사랑하는 천애, 〈단잠을 지키는 나이트워커〉니까요.”

 

남의 사랑에 푹 빠져 사는 천애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하여간 천애들은 별난 사람이 많다는 이안의 선입견을 한 번 더 강화해주는 계기만 되었다. 품에 안긴 다이스를 내려다보자 다이스는 뭔가 궁금한 게 있어요? 란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까만 밤이 팔 안에 들려서 동그란 별 두 개만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물렁물렁하고 뜨뜻한 밤이었지만.

 

“그래서 의뢰하고 싶으신 건 뭔가요?”

 

두 사람은 다이스의 지시에 따라 크레도의 탑 안쪽으로 들어갔다. 로비는 한산했고, 이따금 천애를 안은 엽귀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곧 자신의 바쁜 일로 돌아갔다. 이안의 구두 소리만 넓은 홀에 울렸다. 다이스가 꼬리나 앞발, 말, 혹은 정말 귀찮을 때는 앩, 앵. 하는 방향으로 도착한 곳은 한 천애가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다이스는 여기서 멈추라는 듯 꼬리를 한번 살랑이고는 이안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온기에 이안은 조금 허전해졌다.

 

“바로 여기에요, 여기.” 

 

다이스가 사납게 속삭였지만 이안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이스가 목소리를 낮추기 원하는 것 같았기에 자신도 속삭였다. 이런 것은 그냥 염화로 하면 안 되는 걸까?

 

“여기에서 뭘 하면 될까요?”

“여기에서 일하시는 천애분, 최근 예언 적중률이 어마어마하게 떨어지고 있거든요!”

 

그 말에 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예언을 업으로 삼는 천애의 예언 적중률이 떨어진다면 큰일 아닌가.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다이스는 엄청나게 즐거운 남의 비밀을 이야기하듯 히죽히죽 댔다.

 

“그럼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요? 예언 적중률이 떨어진다면 천애로써 일하기 힘들 텐데요.”

 

이 작은 고양이는 뭘 의뢰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 내려다보던 이안에게 다이스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오늘의 의뢰는, 두 사람을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작은 몸에서 나온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이안은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가 말인가요? 그런 문제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요.”

“대법전을 휩쓴 연애담의 주인공답군요! 정론이에요! 하지만 이래로 두다가는 천애에서 잘리고 말 뿐이에요. 그러기 전에 ‘나, 당신을 사랑해서라면 백수라도 될 수 있어!’ 하고 아름답게 맺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대단히 극화된 시나리오였지만 이안도 다이스가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짐작하건대 이번 연애담의 두 주인공은 각자의 위치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았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의뢰를 수긍하기로 했다. 대법전에서도 예언 적중률이 지속적으로 떨어질 마법사가 천애에 눌러 붙어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 전문가 천애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추천하시나요?”

 

다이스는 그 말에 기분 좋아진 것인지 이안 발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고전 중의 고전, 러브레터죠!”.

 

이안은 잠시 후에 입을 떼었다.

 

“그건 본인이 적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가 대필한다면 금방 들킬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천애분, 사랑하는 상대분한테 너무너무 보내고 싶었지만 보내지 못했던 연애편지를 몇 통이나 써 두셨거든요! 우리는 그 사랑의 메신저가 되는 거예요!”

 

다이스의 목소리가 신이 나 새된 소리가 들어갔다. 이제 두 발로 폴짝폴짝 뛰며 이안의 바지를 긁는 고양이를 이안은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럼… 그 편지를 훔쳐서, 상대분께 전달하는 것이 의뢰인 가요?”

“빙고!”

 

아쉽게도 다이스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도리어 이안의 바지를 손톱으로 틑어 그를 끌고 가려고 애썼으나, 얼마 전에 깎은 것인지 손톱은 뭉툭했다. 성이 난 다이스는 애꿎은 이안을 앞발로 한 대 치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안에 아무도 없으신 것 맞죠?”

“스케줄 다 확인했어요. 마침 다들 임무에 나가 있거든요! 예언은 맞을지 몰라, 후후후!”

 

한숨을 쉬며 이안이 문을 열자 다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안이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건가.

 

이안이 이국적인 양식으로 꾸며진 실내를 둘러보는 동안 다이스는 예상 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는 듯이 재빨리 몇 곳을 뒤졌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찾은 곳에 잠금이 걸려 있자 이안에게 재촉했다.

 

“...”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이안의 등에 잠시 식은땀이 흘렀다. 이안은 철사를 몇 번 움직여 쉽게 잠금을 땄다. 안에는 다이스의 예상대로 편지 몇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편지통이 온통 분홍색이며 하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내용은 그렇게 의심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느 분께 전달드려야 하는지 아시나요?”

“물론이죠! 저는 준비된 사랑꾼이랍니다?”

 

그 단어의 조합, 그렇게 쓰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은 이 천애에게 익숙해지기로 했다. 아직 반나절이 남았다. 아주 긴 반나절이 될 것 같았지만 말이다. 

 

우선 두 사람은 다이스가 알아온 주소를 편지에 쓰기로 했다. 다이스가 소녀의 외형으로 변해 펜으로 휘갈긴 글씨체는 답지 않게 고풍스러워 이안도 놀랄 정도였다. 펜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봉투 전체에 글씨를 덮었다.

 

“자, 이제 이걸 우체통에 넣으면 돼요! 그럼 시간이 전달해 줄 거예요.”

“인계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물론이죠! 본래 모습이 고양이긴 해도, 방문자라구요.”

 

두 사람은 한 도서관을 통해 인계로 나갔다. 도서관 옆 우체국으로 가는 길이 금방이었다. 걷던 도중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떼었다.

 

“연애담에 대해 물어보셨으니 저도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하세요, 하세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이안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 본모습이 고양이신데 어째서 방문자로 각성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다이스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이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 무례한 질문이었죠? 죄송해요. 아무래도 방문자 분들은 대개 사람의 모습을 하고 계셔서 저도 모르게 궁금해졌네요. 그래도 여쭙는 게 아니었는데.. ”

 

이안은 몸체가 살짝 차도 쪽으로 밀려나는 것으로 다이스가 자신을 홱 밀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라 돌아간 몸이 다이스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안은 눈을 껌뻑거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다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저는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요!”

 

차도 뒤에서 자동차 몇 대가 쌩하니 지나갈 때까지 이안은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곧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다이스는 우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네요, 제가 당연한 걸 잊었어요. 다이스 씨가 방문자가 아니라면, 누가 방문자겠어요?”

“그렇죠? 한번 더 말해봐요! 제가 뭘 가지고 있다고요?”

 

두 사람은 제법 화기애애해진 채로 편지들에 우표를 붙이고는 우체통에 넣었다. 다이스는 이안의 반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 이야기를 하느라 둘은 한참을 보냈다. 어느 정도 의뢰가 마무리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보수로 생각해두신 건 있으신가요?”

“아, 상당히 독특한 요구였죠? 그게…”

 

다이스는 곰곰 떠올리듯이 검지를 턱 끝에 짚었다 노란 눈의 동공이 낮보다 풀어져 있었다.

 

“음, 그거라면 보수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는 제 손에서 떠나보내고 싶은 물건이기도 하고요.”

 

고양이의 모습으로 방향을 지시한 아까와는 다르게 다이스는 앞장서 걸었다. 이안은 그를 따르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림자가 짙게 깔렸고, 붉은 햇빛이 모든 것을 물들일 때 그들이 멈춰 선 장소는 공동묘지였다. 다이스는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꽃다발을 들고 어느 묘 앞에 멈춰 섰다. 이안은 반 발짜국 뒤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여기거든요, 마리아의 묘가.”

 

딱히 이안에게 말을 거는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이안은 잠자코 뒤에서 서 있었다. 누가 보았더라면 기묘한 풍경이라고 했을 것이다. 묘 앞에 선 붉은 원피스의 소녀, 그리고 그 뒤에 선 청소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잠시 흘렀다.

 

“제가 각성할 때 같이 있어준 사람이에요. 각성하기 전에도, 길고양이였던 저를 주워서 키워줬구요.”

 

다이스는 여전히 묘지만을 바라본 채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제게 사람의 마음을 알려줬어요. 손해를 봐도 불의를 참지 못하고, 손을 탄 것은 전부 사랑해버리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전 일부러 집에 많이 안 있었어요. 언젠가 이 사람이 날 버리면 난 정말로 갈 곳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잠시 이야기를 멈춘 다이스는 몸을 숙여 쭈그려 앉으면서 묘 옆에 흰 꽃다발을 두었다.

 

“조금 더 같이 있을 걸 그랬어요. 언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을 텐데…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해줄 걸 그랬어요.”

 

다이스는 잠시 그를 상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게 너무 다행이에요. 그래서 마리아가 잊혀지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렇게 기억되어서 다행이에요. 지금도 그 집에는 마리아의 사진이 있어요. 난롯가 옆에 잘 보이는 곳에요. 늙어서 쭈글쭈글한 사진이지만.”

 

다이스는 폴짝 뛰듯 일어나서 마침내 이안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 지금은 죽었거든요.”

 

이안은 잠시 다이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이안이 겪어본 적 없는 슬픔이었고, 조금의 시간이 더 흘러야 알게 될 슬픔이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눈길로 다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분도 당신을 만나 다행이라고 여기셨을 거에요.”

 

“... 그랬을까요?”

 

다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레도의 탑에서 본 근질근질한 미소도 아니었고, 우체통 앞의 후련한 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이의 미소였다.

 

“자, 여기요. 이걸 가져가요. 보수예요.”

 

다이스는 품에서 수첩 한 권을 꺼냈다. 집중하고 나서야 이안은 그것이 마도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는 이 마도서 때문에 각성했어요. 마리아의 다락방에 있었거든요. 이제는 보내줄래요. 이제는 내 손에 들고 있지 않을래요.”

 

이안은 말과 말 사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다이스가 건네는 수첩은 그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의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돌려받기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다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 물건이 또 어딘가에서 사랑의 상징으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에게는 이미 마리아를 추억할 물건이 많이 있으니까요.”

 

잠시 다이스를 바라보던 이안은 그 말에 수긍했다. 그도 그 나름의 장고가 있었을 것이다. 위로의 말을 고민하던 이안에게 다이스가 어깨를 툭 쳤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죽상을 하지 마요. 사랑을 하고 있다면서요! 전력으로 달려요, 이안!”

 

내려다본 다이스는 씩 웃고 있었다. 그 말에는 이안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리아라는 사람이 다이스에게 져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면서 이안도 환하게 웃었다.

 

“네!”

 

 

 




첫 번째 의뢰인: 천애의 방문자, 〈단잠을 지키는 나이트워커~야간경비원~〉 다이스.

보수: 다이스를 각성시킨 마도서.

한 줄 후기: 직접 발로 걷지 않아도 안아서 옮겨준다는 점이 편안했어요!

 

이안 허드슨과 수상한 우체부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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