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은 어느 평온한 날 오전에 발생했다.
수호자는 산책이라도 나간 건지 이른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고, 연주가는 한쪽 테이블에서 열이 올라서 노트북을 신나게 두들기고 있었다. 루프를 하지 않은 쪽 이안이 막 씻고 나서 머리를 말리는 옆에서 루프 중 죽은 이안 중 두어 명이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찬란으로 말하자면, 그는 앞마당의 화분에 물을 주고 나서 목이 말라 뭐라도 마실까 고민하며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내리기에는 번거로우니 주스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찬란은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있던 인도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그것을 인도자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검은 바다의 인도자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쁜 의미로 낯설었다. 인도자는 사방에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검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방에 나락문이라도 깔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잘못 들어온 척 하고 나갈까?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나가기엔 너무 늦었을지도 몰라. 못 본 척 하자. 제일 가까운 것을 아무거나 집어 들고나가는 거야. 팽팽 돌아가는 찬란의 머리를 멈춘 것은 인도자의 한마디였다.
“사라졌어.”
“... 네?”
냉장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인도자의 행동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찬란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어제 리콰이드를 주려고 만들어둔 푸딩, 사라졌다고.”
그제야 찬란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리콰이드에게 대접할 점심 코스를 점검하던 중에 밤새 차갑게 식혀둔 푸딩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도자는 언제나 자신이 맛보는 조금 빼고는 필요 이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사라진 푸딩을 대신할 여분도 없다는 의미다. 그 인도자가 손수 만든 것이니 정성이 조금 들어간 것도 아닐 테고. 지금 와서 뒤늦게 만들어도 재료부터 준비하려면 한참 걸리겠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누군가 인도자의 코스 요리를 성대하게 망친 것이다.
찬란은 우선 인도자를 위로하기 위해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부터 떠올렸다. 당연하지만 몇 없었다. 그래도 찬란은 최선을 다했다.
“만드는 데 오래 걸리셨을 텐데… 다른 음식에 가려서 안 보이는 건 아닐까요? 서랍에 있다던가…”
“전부 찾아봤는데 아무 데도 없어. 애초에 눈에 띄는 곳에 뒀으니까.”
“역시 지금이라도 만드는 건 늦겠죠? 급한 대로 시제품을 구해 오는 건…”
“그딴 물건을 입에 대게 하느니 시간 되감기라도 쓰겠어.”
인도자라면 여기서도 어떻게든 그 사서의 장서를 뜯어올 것 같았다. 찬란은 우선 그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저트 하나쯤은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하고 넘어가 줄 거에요. 안 만든 것도 아니고 누군가 가져간 걸요.”
“그러니까 어떤 자식이 리콰이드의 푸딩을 훔쳐갔단 말이지? 대체 어느 놈이 그랬을까…”
아차, 인도자의 듣고 싶은 대로 곡해해서 듣는 버릇이 발동한 것 같다. 찬란이 어떻게 막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인도자는 시선을 손목시계로 옮겼다.
“오래 걸리는 건 미리 손질해 뒀으니까 아직 여유가 있어. 그 사이 푸딩 도둑을 잡아서 토해내게 하던지 해야겠다.”
“에이, 설마 누군가 일부러…”
“...”
“...”
찬란은 잠시 인도자에게 불만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곳에 사는 인물 전원이 리스트에 오를 때 즈음 찬란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고개를 들자 인도자가 찬란을 알만하다는 눈빛으로 빤히 보고 있었다.
“... 정정할게요. 그렇지만 정말로 잡을 수 있을까요? 푸딩은 먹어버리면 끝이잖아요.”
“완벽 범죄라는 건 없어.”
우와, 그거 정말 탐정이나 이야기할법한 소리다. 찬란은 인도자가 정말로 인계에서 뒷세계 탐정으로 활동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업으로 삼았던 만큼 자신이 있다는 걸까.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찬장을 다시 한번 뒤지던 인도자가 찬란을 뒤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야겠다, 꼬맹아.”
“네? 제가요?”
찬란은 금세 어리둥절해졌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단 말인가? 있다고 해도 인도자가 훨씬 더 잘할 것 같은데…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도자가 복도에서 지나치는 사람마다 반쯤 투명인간 취급을 하긴 해도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것은 잘못되었다. 도울 수 있다면 범인을 잡는 데 거들고 싶었다. 인도자가 씩 웃을 때까지만 해도 찬란은 인도자의 조수로 임명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요! 문이 잠겨 있잖아요!”
“평소 생활패턴을 생각하면 지금쯤 주방에 있어야 하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확실히 수상해.”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찾아요!”
“귀찮게 뭐하러. 금방 열린다니까.”
“인도자가 열리게 만드는 거잖아요!”
찬란은 현재 복도 한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인도자는 그를 보고 ‘망을 본다’고 할 것이고, 찬란 본인은 ‘인도자를 막는 중’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쨌거나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인도자를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은 맞았다. 그리고 문제의 인도자는 문고리 앞에 몸을 숙이고 자물쇠를 따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찰칵찰칵 소리가 날 때마다 찬란은 한층 다급해졌다. 정말로 열어버릴 거라고! 그때는 꼼짝없이 무단침입 행이다. 제발 아무라도 와주었으면 하고 찬란은 간절히 바랐지만 복도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지 오래다. 차라리 자물쇠라도 오래 버텨주었으면. 그러나 야속하게도 문고리는 인도자의 손에서 부드러운 찰칵 소리와 함께 스르르 패배했다. 찬란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설득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일이 잠긴 방을 열 수도 없잖아요? 문을 따는 데만 시간이 다 가 버릴 거에요.”
그러는 와중에도 인도자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안의 방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찬란은 정신을 다잡았다. 이 정도로 포기했다면 애초에 인도자와 어울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명백한 단서부터 추적하는 게 어떨까요? 가령 푸딩이 사라진 시간대라던가…”
마침 방에 푸딩의 흔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인도자가 방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문은 자연스럽게 원래대로 잠긴 채였다. 인도자는 완벽 범죄라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가 저지르는 것이야말로 완벽 범죄가 아닐까.
“범인이 증언을 한다고 해도 반드시 모순이 있을 거고… 아, 연주가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어제 저녁을 담당했으니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까. 어차피 그 사람 방을 다음으로 수색하려고 했고.”
“...!”
드디어 찬란의 간곡한 설득이 빛을 본 것일까. 인도자는 짧게 반응하고 드디어 개인방이 있는 복도에서 걸음을 옮겼다. 찬란이 그를 놓칠세라 뒤따랐다.
두 사람은 수영장 근처에서 연주가를 발견했다. 연주가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목욕 오리를 수영장에 띄우고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리콰이드를 태울 생각은 아니겠지? 연주가는 로맨틱함에 대해 다소 독특한 해석을 하는 것 같았으니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찬란은 조만간 수영장 근처에서 소란이 일겠거니 생각했다.
인도자는 목욕오리를 본체만체하고 연주가에게 다가갔다. 마침 첨벙, 하고 수면이 일렁이며 목욕 오리가 넓은 수영장 위를 부유했다. 연주가는 두 사람을 눈치챘는지 몸을 돌렸다.
“어때? 대단히 크지?”
“어제 식사 준비할 때 냉장고에 푸딩 본 적 있어?”
인도자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는 받아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연주가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응, 아마 두 번째 칸이랑 세번째 칸에 있었지? 두번째 칸에 있던 게 고이 모셔져 있길래 네 것인가 했어. 나머지는 루프를 안한 쪽 이안 물건일 걸? 아, 그런데 어제 꺼내야 하는 식재료가 좀 많아서 두번째 칸에 있는 걸 내렸거든.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흐음…”
“그런데 푸딩은 왜?”
연주가는 인도자와 찬란이라는 특이한 조합을 신기한 눈으로 훑어봤다. 거대 목욕 오리를 반짝이는 눈으로 곁눈질하고 있던 찬란이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인도자가 준비한 푸딩이 사라져서요, 범인을 찾고 있어요.”
“이야, 그거 열받았겠는데. 찬란은 조수 역할?”
“네… 아마도요?”
연주가가 익숙하다는 듯이 대하는 걸 보니 전에도 조수를 끌고 다녔던 걸까. 운이 나쁘게, 혹은 운이 좋게 찬란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찬란은 조금 신이 나서 인도자를 채근했다.
“새로 단서가 나왔네요. 루프를 안 한 쪽한테 찾아가 봐요.”
“... 그래. 섣불리 확신하는 건 좋지 않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도자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연주가가 바삐 걸어가는 둘을 향해 손을 흔들어줄 때도, 찾고자 하는 이안이 바닥에 누워 소파에 다리만 얹은 채로 뜨개질을 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도 찬란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인도자는 연주가를 의심하고 있는 걸까? 눈앞의 이안은 시야 한편에 거꾸로 된 인도자와 찬란을 발견했는지 금세 똑바로 앉았다. 바닥에 누워 부스스해진 머리가 붕 떴다.
“미안, 뜨개질할 때는 이 자세가 습관이 되어서. 무슨 일이야?”
찬란의 시선이 한 가닥 한 가닥 선명한 머리카락으로 향하는 와중 인도자는 본래의 용건을 잊지 않았다.
“어제 냉장고에 네 푸딩을 넣어 뒀다면서?”
“맞아, 그랬지. 네가 만드는 거 보니까 나도 하나 먹고 싶어져서. 그런데 어제 밤늦게 수호자가 배고파하길래 먹으라고 했거든. 오늘 아침에 보니까 녀석이 안 먹은 건지 그대로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먹었지.”
“아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갑자기 웬 취조야?”
그 말에는 찬란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인도자의 푸딩이 도둑맞았거든요!”
“그거 큰일이네. 얼마나 맛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데, 군침 흘리는 사람들이 많겠어.”
“쓸데없는 관심이지.”
“그런데 뭘 만드시는 거에요?”
“이거? 뜨개인형인데, 봐봐. 리콰이드 닮았지.”
찬란은 리콰이드가 흰 오목눈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짚어 주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옆에서 인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
“그렇지? 다 만들면 선물해주려고. 좋아할 것 같아.”
찬란은 여기에 머무는 대부분의 리콰이드와 이안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심지어 자주 망각하지만 옆에 있는 인도자조차 생전에는 부부관계라고 했었다. 그렇구나. 귀여운 거구나. 찬란은 무례하지 않도록 두 사람에 동조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뜨개인형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다음으로 찾아가야 할 사람은 수호자다. 오늘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는데 멀리 산책이라도 나간 걸까?
“그럼 범인을 잡으러 가 볼까.”
인도자는 어쩐지 한층 스산해진 분위기였다. 찬란은 길가면서 부딪치는 사람이라도 없기를 조용히 바라며 수색에 나섰다.
두 사람이 수호자가 저택 안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즈음 때마침 수호자가 긴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다. 한바탕 뛰고 난 건지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에 맺힌 땀을 수건으로 연신 닦느라 바빠 보였다. 인도자와 찬란은 곧장 주방으로 향하는 수호자를 붙잡았다.
“푸딩, 네가 먹었지.”
“으엥? 어젯밤에 먹긴 했는데… 그거 진짜 맛있었지. 갑자기 왜?”
“그때 냉장고에 푸딩은 두 개였어. 하나는 내가 만든 것, 다른 하나는 네가 허락을 받은 녀석 것.”
“응, 그래서 말하고 먹었는데… 설마……”
인도자는 수호자를 지긋이 바라봤다. 순식간에 수호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먹은 거야? 어쩐지 기가 막히더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니만……”
“...”
“정말 맛있었는데… 입에서 사르르 녹았는데…”
“...”
“생크림이 잘 어울렸는데… 커스터드의 노른자도 진했고… 바닐라빈 향이 환상적이었어…”
“......”
“... 미안, 어떻게 사죄하는 게 좋을까.”
“지금 당장 토해 내고 시간되감기를 쓸 거야.”
“인도자! 사람을 공격하면 안 돼요!”
그렇게 냉장고 둘째 칸 푸딩실종사건이 정리되는 것은 범인을 찾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찬란은 수호자의 배를 가르려는 인도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고, 오랜 실랑이 끝에 둘은 수호자가 요리를 돕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그것만 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좋은 마무리다. 찬란은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시원한 주스 한잔을 들이켰을 때, 거실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리콰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님이 나오셨나 보다. 오늘은 오전에 있었던 이 작은 소동을 전해줘야지. 뒤돌아 나서는 찬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