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허드슨과 ■■■■■
2022. 2. 10.

※주의 소재: 유혈 표현, 부상

 

 

검정. 오직 검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할 어둠. 그는 그저 고요할 뿐인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끝없이 밀려나가는 공간, 동시에 움직이면 부딪칠 듯 단단하기도 하고.

 

움직인다니? 그는 잠시 멈칫했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눈꺼풀 정도는 자신의 의지하에 있다는 의미였다. 깜빡, 깜빡. 아무 빛도 존재하지 않아 아무것에도 닿지 않는 시선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모스 부호 같기도 한 움직임은 잠시 동안 계속되다 곧 멈추었다.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히지 못한 글이 잊히듯 그는  존재하는 것을 잊었다.

 

시간이 흘렀다. 영원일까, 한순간일까. 정확한 시간의 흐름은 가늠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다른 모든 것이 그에게 와 닿지 않았듯 시간 또한 무의미한 개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별을 셀 수 있을까. 불지 않는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

 

시간은 더 흘렀다. 그는 점차 나른해졌다. 신체가 그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다. 어둠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고 푹신한 허공이 안락하게 느껴질 즈음.

 

공간이 치이익, 하며 녹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애초에 여기는 어디지. 내 이름이 뭐더라. 빛이 번지듯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 녹아내린 공간 틈새로 시간이 흘러들어왔다. 그제야 이안은 그동안 일 초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시간과 함께 끌려온 기억이 드문드문 채워졌다. 

 

[들리세요? 이안 허드슨 씨, 들리세요?]

 

이안은 자신의 성이 허드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성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어둠 속 허공에 떠 있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자마자 이안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유난히 세게 부딪친 엉덩이를 문지르며 그는 저 부름에 답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네, 들립니다.]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자 그것은 의지가 되어 상대에게로 흘러갔다. 이안은 미약하게나마 건너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대단히 얄팍하고 불안정한 이어짐이었다. 건너편에서 안도의 탄식이 들려왔다.

 

[다행이다! 저희 쪽에서 최대한 빨리 진입 경로를 찾는 중이에요. 침착하게 기다리시면서 지시에 따라주세요.]

 

이안은 그것이 무척이나 재난 상황의 안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재난에 가깝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저희 쪽이라니요?]

[네? 당연히 대법전… 허드슨 씨, 기억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상대 편에도 혼란이 전달된 것 같았다. 이안은 머리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더듬 언어로 바꾸었다. 이안이 찾으려고 하는 동시에 그 기억들은 이안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저는, 엽귀의 방문자고…어쩌다가 이곳에?]

[허드슨 씨는 임무 중 고립되셨습니다. 금서가 만든 이경에 진입하셨는데 허드슨 씨를 제외한 분과회원들을 거부하고 출입구 자체를 없애버렸어요. 지금은 이경을 억지로 뜯어내어…]

 

건너편의 말, 통신, 그러니까 염화가 심하게 불안정해졌다. 이안은 염화를 듣는 순간 몇 가지 기억이 더 딸려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존재가 말한 대로다. 분명 임무를 받아 분과회와 함께 이경에 진입할 준비를 했는데… 그 뒤로는 이상하게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공백에 좀 먹힌 것 같았다.

 

[곧 염화가 다시 끊길 것 같아요. 허드슨 씨, 그곳에 그대로 계셔야 해요.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잠시만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안이 다급하게 말을 골랐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건너편의 마법사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흔들리는 진실의 여섯 번째 눈동자~식스센스~〉, 이윤서라고 해요. 기억해주세요-]

 

그가 말을 채 다하기 전에 염화는 침묵 속으로 묻혔다. 이안은 또다시 혼자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보다 상황이 좋았다. 비집은 틈으로 얼마간의 시간과 기억이 새어 들어왔기에 그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이안 허드슨으로 인지했기 때문에, 이안은 의지를 되찾았다.

 

그는 먼저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이곳이 금서의 영역인 것은 확실했다. 문제는 이 영역이 어떤 성질을 띠느냐였다. 존재를 세계로부터 격리하여 의지를 상실시키는 것은 이안이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강한 불쾌감을 느끼며 이안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잘 정리되었던 머리가 금세 붕 떴다. 

 

그는 최대한 많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유런을 비롯한 가족들, 에이미, 다른 친구들, 그리고 일반인이었을 때의 삶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하지만 이안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의적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속도는 매우 느렸고, 공백으로 지워진 기억 중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티셔츠 한 장에 흰 바지. 잠시 심부름을 하러 집 밖에 나올 때나 편한 친구들을 만날 때 입곤 했던 옷이었다. 이런 옷을 입고 임무를 하러 왔을 리는 없다. 옷을 당겨 보자 오래 입어 생긴 보풀까지도 그대로였다. 이안은 금서가 뭘 할 수 있는지 슬슬 감이 왔다.

 

주머니를 뒤지자 그가 가장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나왔다. 낡은 수첩, 고급스러운 재질의 안대와 사과 한 알, 그리고 부서진 하트 모양 쿠키 몇 개. 도무지 어쩌다 주머니에 있는지 모를 물건들이었다.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인데… 적어도 배고플 때 허기를 채울 수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은 그것들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윤서는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었지? 달리 할 것도 없는데 시간만 보내려니 좀이 쑤셨다. 하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 이안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기로 했기에 어둑어둑한 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보다는 밝아졌고, 자신의 신체나 물건 등은 보였지만 여전히 어둠의 장막은 묘하게 두터웠다. 의도적으로 시야를 가리는 것 같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가까이서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희끄무레한 누군가였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이안의 곁을 휙 지나쳤다. 이안이 벌떡 일어섰다.

 

“리콰이드!”

 

겨우 스치듯이 했지만 틀림없이 리콰이드였다. 이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흰색 물체가 사라진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고 달려도 은색 머리칼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고, 결국 이안은 그를 코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결국 이안은 윤서와 염화가 통했던 장소와도 한참 멀어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몸이 후끈했다.

 

그렇게 멈춰 선 지도 오래 지나지 않아 이안은 땅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이안은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불안한 직감이 이안을 강타했다. 생존본능이 머리를 지배했고, 동시에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안은 허공으로 날아올랐지만 이미 늦었다.

 

거대한 해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파도는 이안을 낚아채 깊은 곳으로 처박았다. 강력한 마력의 흐름에 추풍낙엽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는 마력을 쥐어짜내려 안간힘을 썼다. 분명 한 번 살아남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도 가능하다.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분명히 그것은 가능하다. 여기서 죽지 않는다.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범람하는 바닷물을 뚫고 이안은 그 흐름을 정면으로 맞섰다. 동시에 바닷물이 첨예한 마력에 두 갈래로 갈라졌다. 방대한 흐름은 이안을 밀어내려 애썼으나 이안은 바다를 다스릴 줄 알았다. 반으로 갈라져 찢어지는 마력은 거칠었고, 그는 구태여 그것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다. 바다는 그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바다를 대적할 필요는 없었다. 감정 또한 그런 법이었다. 그것은 그저 순수하고 날 것의 힘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안은 그날 이후로 그것을 제법 다룰 줄 알게 되었다.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알지 못했던 이유를 이안은 이제는 알았다. 에이미가 죽는 것도, 그 날의 클래스메이트들이 죽는 것도 정당하지 못했다. 잠자코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부조리가 그를 깨웠고 운명이 그를 찾았다. 그리고 그 답례로 그는 운명을 찾아갔다. 그는 누군가의 가르침 없이도 운명을 찾아가는 자였기 때문에.

 

갈 곳 잃은 힘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내려다본 이안은 해일이 자연스레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막아서려 하면 할수록 무서운 힘을 얻는 것. 분노를 힘으로 사용하는 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차갑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힘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감시하는 것은 이안이 숱하도록 해온 것이었고, 그러자 바다는 그의 편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바다는 그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 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휘두르는 자에게는 의도가 있을지언정 움직임에는 선악이 없다.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이안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바다는 이제 평온을 되찾았다. 아마 이안이 평온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필요한 때가 오면 그는 분노할 것이고, 그 분노가 바다를 깨우리라. 이안은 잠잠해진 바다 끝자락에서 해안선을 찾았고 그를 따라 걸었다. 주위는 아까보다 밝아져 있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해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자신의 마력을 점검하며 이안은 모래사장 위를 밟았다.

 

얼마를 걷자 모래가 아니라 흙이 바닥을 이루기 시작했다. 동시에 야트막한 수풀이 신발에 밟혔다. 더 걷자 아담한 꽃밭이 이안을 반겼다. 꽃들은 노래하듯 산들바람에 흔들렸고, 밤하늘이 비추는 별빛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꽃밭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분명히 이 땅을 밟은 적이 있다. 이 시야를 기억하고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작은 행성의 세계는 분명.

 

이안이 위화감을 느끼자마자 꽃들이 일제히 이안을 바라보았다. 일 초, 이 초, 모든 인과가 그를 주시했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헤아릴 수 없는 증오가 이안을 덮쳤다.

 

너를 증오해. 너를 증오해. 너를 증오해. 수많은 메아리가 이안을 향했다. 비수처럼 날카로운 마력이 된 그것은 이안을 향해 날라왔고 미처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 이안은 그대로 마력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 팔이 깊게 베였고,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사이 그의 상체는 뒤로 기울었다.

 

분명 등 뒤로는 단단한 땅이 있다. 꽃밭 한가운데 서 있던 이안의 그 믿음은 무참히 깨졌다. 순식간에 땅이 입을 벌리고 절벽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 같은 바위가 이안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심을 잡으려 하기도 전에 운동화의 고무가 삐끗하는 소리를 냈다. 이안은 그대로 추락했다.

 

중력에 주도권을 잃은 이안은 마력으로 몸을 감싼 채 다급하게 붙잡을 무언가를 찾았다. 바위들은 날카로웠고, 그는 가까스로 속력을 줄일 수 있었지만 바위에 부딪치고 까지는 대가를 치렀다.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떨어져 몇 번을 구른 이안은 신음했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잠시 바닥에 쓰러져 숨을 고른 이안은 피가 배어 나오는 팔을 붙들고 일어나기 위해 애썼다.

 

 

몇 번을 일어나려다 실패한 그는 바닥에 털썩 누웠다. 헐떡이는 숨 때문에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여기서 바로 일어선다고 해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안은 잠시 누운 채로 시야를 위로 했다. 아까 꽃밭의 별바다는 온데간데없고 검은 하늘에 회색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구름의 실루엣 사이로 해인지 달인지 모를 것의 빛이 새어나왔다. 실버 라이닝이었다.

 

이안은 넋 놓던 것을 멈추고 조금 전 보았던 풍경에 대해 생각했다. 한번 끝났다고 생각한 세계. 끝난 것임을 알고 있어도 다시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걸까. 몸을 칭칭 감은 인과의 실들이 그를 압박해왔다.

 

인과. 세계. 일그러진 세계. 일그러진 인과. 그는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것을 느꼈다. 갑자기 솟아난 힘으로 벌떡 일어나 앉은 이안은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사과 한 알은 고스란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일그러졌던 것은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를 관측하는 자신이다. 동시에 이안은 생각했다. 이 세계가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고 생각해왔지만 공포를 주입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세계를 두렵다고 여겼기 때문에 세계는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세계가 자신을 상처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는 그를 상처입혔다. 마법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감정을 두려움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이안이 땅을 그러쥐자 단단한 땅이 부드러운 흙이 되었다. 흙은 쉽게 파낼 수 있었다. 이안은 주위에 잡히는 돌을 이용해 적당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내었다. 그는 구덩이 안에 사과를 놓고 다시 흙을 덮기 시작했다. 흙을 다 덮기 전부터 이안의 기대가 차올랐고, 흙 속으로 그것이 스미어 땅에서는 부드러운 진동이 일었다.

 

마침내 이안이 일어서 몇 발자국을 떼었을 때 사과씨는 이미 생명을 틔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과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이안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허기를 채운답시고 사과를 먹었다면 하린에게 대차게 깨졌을 것이다. 생명은 자라나 죽고, 죽은 것은 썩고, 썩은 것에서는 다시 생명이 자란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이고 흐름이었다. 그는 이제야 하린이 왜 이것을 보수라고 주었는지 이해했다. 일그러지지 않은 하나의 원, 뒤틀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제 형태를 찾는 끈. 그것은 살아가는 것을 닮아 있었다.

 

새싹은 순식간에 자라나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푸르른 이파리와 굳건한 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안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보폭에 맞추어 줄기 역시 두꺼워졌다. 어느새 나무는 높디높은 절벽까지 마지막 가지를 닿았다. 가장 낮은 나뭇가지는 밟고 올라서기 딱 좋은 위치에 자라나 있었다. 이안은 감탄의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로 이 방법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시련들도 조금은 예측할 수 있다. 아직은 남은 쿠키와 안대, 그리고 수첩을 누가 주었는지,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때가 되면 알 것이다. 이안은 운명을 잡아 보기로 했다. 나가면 하린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 콧대가 이 사과나무보다 높아질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이안은 가장 낮은 나뭇가지를, 그리고 그다음 나뭇가지를, 그런 식으로 사과나무를 타고 올랐다. 거대한 나무는 곳곳에 사과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따지 않았다. 필요한 이가 있다면 필요한 만큼 가져가리라. 이안의 역할은 이 사과나무를 심는 것으로 다 마쳤다. 나무는 그런 이안에게 감사 인사를 하듯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이파리들이 이안의 볼을 간지럽혔다. 그럴 때마다 온몸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그는 금세 나무 꼭대기에 도착했다. 떨어졌던 절벽으로 살짝 떨어지기 좋은 위치였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해안가와 반대 방향의 꽃밭. 하늘은 구름이 개어 밝은 원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는 여전히 암흑이었다. 꽤나 상쾌해진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찬찬히 훑어보던 이안의 표정이 굳었고, 이내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꽃밭 끝자락을 리콰이드가 지나고 있었다. 빠른 보폭에 은빛 머리가 휘날렸고 그는 사정없이 꽃들을 밟아 가며 어둠 쪽으로 사라졌다.

 

“잠깐!”

 

있는 힘껏 소리친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절벽 쪽으로 살짝 떨어졌다. 무사히 착지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응원하듯 사과나무가 우수수 떠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바람이 발에 힘을 실어준다고 느꼈다.

 

별들보다 빠르게 그는 달렸다. 운동화가 잔디를 밟고 꽃밭을 헤쳐 나아갔다. 리콰이드와 그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꽃밭이 끝나고 언젠가부터 거친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었다. 회색의 바닥 위의 회색 벽들이 곳곳에 서서 시야를 막았다. 이안은 벽 하나에 부딪힐 뻔 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리콰이드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회색 벽들이 시야를 메웠다.

 

이안은 짙게 한숨을 쉬며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단단한 것이 마력으로도 쉽게 깨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몇몇 벽은 서로 붙어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이 걸음을 옮길수록 그 벽들은 빽빽하게 밀집되어 갔다. 그는 곧 이것이 미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리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가고자 하면 꽃밭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 방향으로나 향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리콰이드는 분명히 이 앞으로 향했다. 미로의 출구로 간 걸까. 미로는 비정형적인 온갖 각도의 통로로 나뉘었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만 간다는 편법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하면 금세 미로의 외곽을 돌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안은 잠시 선택지를 고려하며 근처에 있던 벽에 기대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자 무언가가 잡혔다. 쿠키가 담긴 주머니였다. 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을 확인한 이안은 부서진 쿠키의 가루가 은은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헨젤과 그레텔을 하면 된다. 

 

누구에게 쿠키를 받은 것인지는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안은 그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주머니 속 과자를 분질렀다. 주머니의 입구를 열자 페어리 더스트처럼 가루가 허공으로 천천히 흩날렸다. 시험 삼아 조금을 뿌리자 가루는 금세 가라앉아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났다. 이거라면 할 수 있다.

 

이안은 조심스레 가루를 흩날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로는 세 갈래 길에도, 때로는 커다란 광장 같은 곳에도, 때로는 막다른 벽에 도달하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가루는 동나지 않았다. 사과 한 알이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가 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일까. 동시에 이안은 그가 조금씩이지만 중심부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점차 가루의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었을 때 그는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코너를 돌아 마주한 벽에는 처음으로 검은 문이 달려 있었다. 이안은 그 문이 무척이나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어두운 방을 드러냈다. 이안은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몸이 문을 통과하자마자 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그는 이 장소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 정사각형의 작은 방은 인계의 집에 있는 그의 방이었다. 정확히는 몇 달 전 등교거부 중이었던 그의 방의 풍경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방은 이렇게 어둡지 않았다.

 

빈틈없이 쳐진 무거운 커튼. 불이 꺼진 방과 네온으로 빛나며 위이잉 소리를 내는 컴퓨터.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와 쓰레기통에 처박힌 연애편지들. 앵커였던 소꿉친구가 희생당하고 의도적으로 세계를 고립시켰던 시간. 그때의 원망과 치기 어린 분노가 방 구석구석에 눌러붙었다. 방에는 누군가 방금까지 있었던 것처럼 묘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안은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등 뒤로 손을 더듬어서 문고리를 돌리려고 했지만, 문은 굳게 잠기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안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아들, 식사가 아직이지 않니?”

 

유런이었다. 이안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그제야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 이 연극을 끝내야 한다. 이안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유런의 목소리는 무어라 덧붙였다.

 

“뭐라도 챙기지 않으련…?”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 이안은 다음 대사를 알고 있었다. 아냐,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에 새겨질 정도로 외우고 있었다. 장단에 맞춰줘야 한다. 이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뱉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죄송해요, 오늘은 넘길게요.”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랍게도 평온했고 약간의 권태마저 묻어났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경악을 넘은 공포에 가까웠다.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네가 몸 상할까 봐 걱정이야.”

 

그러는 사이 건너편의 상대역은 열심히도 연기를 이어갔다. 이안은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당장 문을 부수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으며 그가 적대하는 대상에게 닿지도 못할 것이다. 참아야 한다. 등 뒤의 문고리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라도 해주렴.”

“....”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정된 일을 막는다는 것은 기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안은 기적을 보여줄 수 없었다. 기적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으킬 수 없는 법이다. 당신이 필요해. 기적을 목격할 당신이 간절히.

 

그는 문고리를 강하게 쥐고는 마력을 때려 부어 문 채로 뜯어냈다. 기적이 되지 못한 의지는 분노에 그칠 뿐이다. 강대한 마력의 일격이 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휘몰아쳤다. 이안의 예상대로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가 입구부터 뿌려놓은 과자 가루가 전부 마력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안은 망연하게 허공에서 반짝이는 가루를 응시했다.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서자 그는 곧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미로가 아니었다. 미궁이었다. 죄인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을 중앙에 두고, 입구도 출구도 오직 하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만든 미궁에 그는 제 발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아무것도 닿을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유배지였다. 분명 한때 그것을 바란 적도 있었지. 들어가서도 나가서도 안 되는 그곳에 영원히 갇혀 있기를.

 

그런데 누가 누구를 구한다는 말인가. 자신조차 미궁에 가둔 사람이 어찌 횃불을 들고 실타래를 푼단 말인가. 이안은 가만히 외벽에 기대듯 주저앉았다. 과자를 준 사람은 이 연극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째서인지 그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비관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이 감옥에서 어떻게 나간담. 방에 있는 물건이라도 다시 확인해야 할까.

 

이안은 잠시 상황을 고려했다. 기적은 가장 간절할 때야 비로소 형태를 가지곤 한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어두컴컴한 미궁. 그는 리콰이드를 미궁에서 구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구불구불하고 빠져나올 수조차 없는 그의 마음, 그의 사랑에서 반드시 그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었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한 손에는 실타래를. 미궁에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타래가 아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를 찾아주는 사람이기에. 그를 미궁 밖으로 인도하는 것은 바깥과의 매듭이다.

 

완전히 단절된 세계에서 그가 돌아가는 데 필요했던 것은 수복된 앵커였다. 다른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 그들을 바꾸고 그들에 의해 바뀌는 경험들. 그리고 서후에게 제과제빵은 바로 소통의 통로였다. 마음을 담아 전할 수 있는 물건, 그리고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어져 있다는 증거. 그렇기에 과자 가루가 매듭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가 그것을 깨닫자마자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흩어져 있던 가루는 제 자신을 재생하듯 긴 선으로 모여들었고, 빛을 발하면서 비단 매듭이 되었다. 이안은 비단을 손으로 한번 튕기며 생각했다. 이것 또한 허기를 채우는 데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서후는 실망한 티를 내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실망하겠지. 애초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옛 방을 돌아본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쓰레기통을 뒤졌다. 구겨진 편지 몇 개가 금방 보였다. 씩 웃은 이안은 그것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 때의 자신이 알았다면 뒤집어질 만큼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이것들을 리콰이드에게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이안은 이제는 문이 없어진 감옥을 나왔다. 바닥에 놓여 있는 끈 한쪽을 책상다리에 묶고 이안은 끈을 손으로 짚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이 빠진 붉은 비단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돌아갈 때는 갈림길에서 고민할 일도 없다 보니 들어올 때보다 몇 배는 시간이 덜 들었다. 그는 금세 미궁이라 하기도 어려운, 시멘트벽들이 드문드문 놓인 곳까지 나올 수 있었다.

 

기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으킬 수 없었다. 그가 리콰이드에게 기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리콰이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 누구도 혼자 살아가고 기적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의뢰인들이 준 보수가 기적의 매체로 작용한 것은 그가 의뢰인들과 진심으로 이어진 관계를 쌓아서겠지. 그리고 아마 비단 끈은 서후와 자신 간의 매듭이리라. 

 

이안은 끈을 회수할까 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이곳까지 헤메게 된다면 이 끈이 안내자 역할을 할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서후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거진 모든 것을 사랑했으니까.

 

시멘트 바닥에서 벗어나 흙길로 접어든 이안은 또다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하늘에 뜬 것은 달이었다. 월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안은 달이 붉은빛으로 물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달이 있는 곳으로 가면 무언가 나올지도 몰랐다.

 

붉은 달빛을 따라서 한참 걸었을까. 이안은 주위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 건물 안이라도 들어온 것 같은 묘한 감각에 이안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암석 타일이었다. 그 문양은 묘하게 익숙했는데, 마치 대단히 자주 보는 것이었지만 한번도 집중해서 본 적이 없는 듯한…

 

이안은 문양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짙은 심홍의 액체가 바닥을 타고 유유히 번져나갔다. 이안은 그것을 밟을 뻔하다가 자신이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을 뻗어 보자 빳빳한 천의 질감이 느껴졌다. 엽귀의 제복이었다. 동시에 주머니에 있던 안대가 그의 의안 위에 씌워져 있었다.

 

무엇을 보게 되던지 그리 유쾌한 광경은 아닐 것이다. 제복으로 바뀐 옷과 흥건한 피가 충분한 경고였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피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찰박 찰박, 구두가 액체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손을 밟을 뻔했기 때문이다. 경악한 이안은 재빨리 물러나서 누구의 손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이 파견된 분과회의 사서, 블랑케였다. 그는 부활을 시도 중인지 애타게 운명을 잡았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마지막에 이안과 마주친 그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가 소멸하기 직전 이안은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너를 감싸지 말걸 그랬어.

 

곧 이안의 눈앞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려고 피로 젖은 바닥을 짚었다. 장갑에 피가 흥건하게 묻었다. 손을 대충 바지 무릎에 문지르고 난 뒤에 그는 어지러운 머리로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임무를 같이 받은 분과회원들은 그저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언젠가 임무를 같이 한 마법사들, 엽귀의 동료, 선배들. 다이스가 애처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공허로 화할 즈음에 이안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타케시는 안타까워했고, 하린은 주연을 찾았다. 서후는 언젠가 이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그저 편안하게 웃었다.

 

서후의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본 이안은 한쪽 무릎을 꿇었던 것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차마 걸음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다음에 뭐가 올지 다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에서 솔직히 그는 그 모습을 침착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지키지 못한 거다. 돌이켜보면 학교 친구들을 구했던 각성의 순간에서조차 이안은 불의에 맞서고자 했지, 그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힘을 각성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킨다는 것은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안은 무언가를 보관하는 데 그렇게 뛰어난 재주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게 뭐지? 가졌다면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운명조차 가지지 못한 내가 정말로 무언가를 주장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움에 이안은 몇 걸음을 헛디뎠고, 그 때문에 앞으로 나아갔다. 리콰이드는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이안이 몸을 숙이자 그는 눈을 뜨고 이안의 볼을 만지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이안은 잠자코 가까이 다가갔다. 놀랍게도 리콰이드는 손을 더 멀리 뻗어 이안의 머리 뒤에 있는 안대의 매듭을 풀었다. 안대가 리콰이드 위에 떨어지기 직전에 그는 완전히 소멸했다.

 

이안은 피웅덩이 위에 둥둥 떠 있는 안대를 바라보았다. 현실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멍하니 생각했다. 뜬 눈이 감기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로 무언가가 윤서의 모습으로 화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이안은 피웅덩이에 비친 모습으로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개척자라고 부르다니 빛 좋은 개살구네요.”

 

영락없는 윤서의 목소리인 그것은 조금은 조롱하듯이, 조금은 지루하다는 듯이 자신의 손톱을 구경했다. 

 

“겨우 이런 것을 두려워하는 건가요? 시시한 마법사였군요.”

 

그 말에 이안이 고개만 돌려 뒤돌아보자 그것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였다.

 

“설마 몰랐다고 하지 마세요. 알고 계셨잖아요? 와, 그렇게 노려보니까 좀 무섭다.”

 

그것은 까르르 소리를 냈다. 이안은 안대를 주워 들고 일어섰다.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친족도 멸하는 마법사와 그의 눈 먼 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엽귀를 떠났지만 이안은 그가 훌륭한 엽귀였다고 생각했다. 그가 엽귀를 도피처로 사용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엽귀를 떠났다. 외부적인 위협이 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가치와 의미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그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그 부름에 응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안 또한 부조리가 소중한 이들을 옥죄었을 때 그것을 끊어내기 위해 검을 뽑았다.

 

이제 이안은 자신이 조금 전 지키는 법을 모르겠다고 한 이유를 알았다. 그는 자신이 지켜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의 소유여야 비로소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러나 틀렸다.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부름에 응하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면, 이안은 지키는 방법을 숱하게 알았다.

 

개척자는 단순히 원하던 것을 손에 넣으면 다음 것을 찾아 나서는 자가 아니었다. 그만이 아는 새로운 가치를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존재였다. 길을 찾아 나서고 뒤따르는 이들을 위해 그것을 닦는다. 언젠가 올 이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는 자. 그가 자기 자신을 그리 정의했으므로, 그 자신을 다시 찾아냈다. 

 

손 안에서 타케시가 건넨 엽귀의 안대가 흔들렸다. 리콰이드는 그것을 풀었다. 환상 속의 리콰이드는 두 눈으로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으로, 하나는 사이클롭스의 마음으로. 그리고 윤서의 모습을 한 그것과 두 눈이 마주쳤을 때, 안대는 마검으로 화했다.

 

일격에 칼날이 쇄도하고 마력이 맞부딪쳤다. 그것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이안은 반 바퀴 돌듯이 몸을 움직이면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검이 먼저 진동했고, 이안은 그것이 무언가를 전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주문이 쇄도해왔기에 때마침 저항에 성공한 그는 마검으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마검이 진동할 때마다 이안은 그것이 춤을 추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케시의 검무가 조금씩 흘러들어왔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한 이안은 공격을 조금 맞는 대신 유리한 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무수히 많은 마검이 허공에 떠올랐고, 검무를 추듯 우아한 동작으로 모여든 그것들은 소용돌이치며 군단으로 변화했다. 귀가 멎을 듯한 함성이었다.

 

“시시한 마법사라고 했었지? 그 손에 좀 죽어줘야겠어.”

 

상대에게 달려든 군단이 폭발하며 거대한 굉음을 자아냈다. 소멸의 비통한 상실이 주권 전체를 덮었고, 마침내 이안은 자신의 슬픔을 그대로 돌려줄 수 있었다. 한순간에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은 눈 깜짝할 새에 닫혔다. 이안은 남은 것을 주머니에 넣으며 손을 털었다. 

 

타케시의 안대는 사라져 있었다. 군단이 소멸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피웅덩이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고, 주위도 한결 밝아졌다. 월식은 끝난 지 한참이라 달이 흰 얼굴을 한 채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이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수첩 하나였다. 잠시 숨을 고르던 이안은 방금 전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것.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지만 또 비현실적인 두려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파괴를 겪어 본 자는 아니었지만 그 끔찍함에 대해 숱하게 들어 본 적이 있었기에. 이안은 잠시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초조함이 앞섰다. 결국 그는 주의를 돌리기 위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첩은 오래되어 끝 부분이 닳아 있었고 거의 사용되어 있었다. 글이 적혀 있는 부분을 살펴본 이안은 그것이 신문 기사의 아이템들을 적어 놓은 내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날짜는 백 년도 전이었지만. 이안은 한숨을 쉬며 수첩을 닫았다.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걸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를 깨운 것은 구두 발굽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익숙했다. 그는 고개를 홱 들었다.

 

홀 저편에서 리콰이드가 어딘가 바쁘게 향하고 있었다. 이안이 그를 불러세우기도 전에 그는 복도로 사라졌다. 이안은 급하게 수첩을 쑤셔 넣고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코너를 돌자 익숙한 복도였다. 이안이 뻔질나게 들락날락 거리는 리콰이드의 집무실 앞. 리콰이드는 이미 집무실로 들어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환한 햇살이 눈 부실 정도로 복도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빛에 이안은 눈을 조금 찡그렸다. 햇빛이 그의 옷에 스며들어 검붉은 피를 지웠다. 금세 이안의 제복이 말끔해졌다. 그는 신경쓰지도 않고 발걸음을 바삐 했다. 노크조차 없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벌컥 열고 들어간 리콰이드의 집무실은 허탈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여기에도 오후의 햇살이 책상을 비추었고, 빛먼지가 고요히 떠다녔다. 묘한 것은 보통 서류로 가득 찬 집무실이 낱장 한 장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장식이나 잉크펜은 놓여 있었지만 서류파일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집무실을 돌아보면서 기억과 변한 점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찻잔이나 주전자, 군것질거리, 빔프로젝터 등 다른 것들은 이안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종이 한 장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수상한 점이었다.

 

그 때, 이안은 집무실 책상 한구석에 굴러다니는 실링 스탬프를 발견했다. 실링왁스 세트와 함께 꺼내져 있는 것은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다. 이안은 슬슬 다음 해야 하는 행동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마음을 받아 적는 것은 수없이도 해 왔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편지의 상대가 읽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적은 적도,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적은 적도 있었던가. 수십 통의 연애편지는 처음부터 단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흘러넘치는 마음을 잉크 삼아 종이 위에 사랑을 그려나간다. 부끄러울 만큼 묻어나는 애정과 확신. 이안은 이렇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수첩의 주인은 수첩이 사랑의 상징으로 쓰였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사랑을 전하는 연애편지보다 노골적인 상징이 있을까. 그는 부디 그 점을 감안하여 자신이 앞으로 할 짓을 다이스가 용서해주기를 바랐다.

 

평온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중에 이안이 슥슥 깃펜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수첩은 본래 한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기에 쓸 수 있는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래서 금세 종이가 동난 이안은 남은 종이를 접어 봉투를 만들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언젠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해야 한다. 그는 다이스가 마리아에게 완전히 이별을 고할 때 곁에 있었다. 아마도 수도 없이 그 무덤 앞을 홀로 방문했겠지.  다이스는 그에게 수첩을 건네는 것으로 마지막 미련을 떠나보냈다. 그렇다면 그도 그의 방식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마땅히 그의 이별로 예우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리콰이드가 보는 앞에서 했던 것처럼 실링왁스를 녹여 뚝, 뚝 떨어트린다. 그것이 식기 전에 스탬프를 꾹 누르면 그의 가문이 사용했던 문양이 그려진다. 몇 번 후후 분 다음에 이안은 엉성한 편지를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중앙을 북, 찢었다.

 

“나와.”

 

세상이 무너지듯이 일렁였다. 기만이 가득한 햇빛의 창이 군청색 그림자에 적셔 사라졌다. 환상이 사라지자 그는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화려한 색색의 창문과 깔끔한 대리석 타일로 이루어진 압도적인 크기의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단상 위에 놓인 황금의 옥좌는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고 있었다. 리콰이드는 그곳에 앉아 홀의 입구에 선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기억하는 것과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콘셉트는 같았다. 리콰이드의 스펠바운드였다.

 

이안은 조소를 흘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래, 당신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테마 파크 투어를 하면서도 계속 줄 듯 말듯 구는 거 있지.”

 

그는 거대한 홀을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구두가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리콰이드의 모습을 한 그것은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었어? 이런 피날레를 준비해 뒀으니 말이야.”

“글쎄.”

 

이안은 대충 팔을 휘둘러 마검 하나를 소환했다. 이미 피가 흥건한 그것은 척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그것을 몇 번 끌다가 보란 듯이 멀리 던져버렸다.

 

이안의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큰일 났네. 바칠 것도 없고 기적을 일으킬 행운의 아이템도 없다. 이안은 오랜만에 정말로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선물이라 함은 전부 타인에게서 받은 가치뿐이다. 타인의 가치를 제 것인 양 으스대며 건넬 생각은 없었다. 온전히 이안의 소유인 것만이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은 텅 비었다.

 

단 하나, 이안이 태어날 때부터 가졌고 죽을 때까지 소유하고 있을 물건. 그것은 현재 이안의 가슴 안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매 순간 붉은 피를 뿜어내는 그것은 또한 이안의 목구멍에도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심장이라고도 부르고 마음이라고도 부르곤 하더라. 펄떡거리는 것이 목에서 흘러넘칠 듯이 위협했다. 당신을 눈앞에 두면 언어는 언제나 중심을 잃고 당신에게로 흘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용암이 땅 위로 부글부글 끓듯이 막으려고 한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이치였다.

 

내가 가진 것 중 당신에게 걸맞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을 당신에게 바칠 것이다. 내가 가진 것 전부가 당신에게 걸맞다면 나는 망설임조차 않고 전부를 당신에게 바칠 것이다. 이안은 그에게 마음이 끌리듯 왕좌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 사랑은 칼날과 같고 내 마음은 정의와 같은 것. 이 목숨이라도 가지겠다면 당신을 위해 살고 당신을 위해 죽을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생명을 지닌 것처럼 흘러내렸다. 마법사인 자신조차 어떻게 언어로 정제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감정들. 이안은 최대한 날 것 그대로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내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가슴 벅차게도 나에게 당신은 최선도 차선도, 최악도 차악도 없는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에. 나는 그 이치에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당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입 맞추기도 하겠지.”

 

이안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는 왕좌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리콰이드의 모습을 한 그것은 흥미롭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바라건대 원한다면 나의 죽음조차 가져, 나는 평생 당신를 섬길 테니. 이것이 바로 나의 사랑, 나의 신념이자 열정. 당신에게 기적을 보여 주겠다고, 기적을 보여 줄 때까지 도전하고 또 실패하겠다고 말했지만 진실을 고백하건대 내게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항상 기적이었어.”

 

그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이렇게까지 푹 빠져서 대체 어쩌자는 거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지. 바다가 해안에 끌리고 흰색 포말을 남기는 것처럼, 결국 절벽을 깎고 바위를 부수어 모래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언제나 당신에게 끌리고 당신을 바라겠지. 햇빛이 해수면에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반짝임만으로도 내게는 평생 충분할 것이다. 평생 당신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나의 존재는 충분해질 것이다.

 

햇빛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조심스럽게 왕좌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베일처럼 그들을 감쌌다. 리콰이드는 자연스럽게 그의 왼쪽 손을 내밀었고,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마주며 이안은 그의 목숨에 두고 평생 마음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다음 순간, 이안은 팔을 뻗어 던져 놓은 마검을 불렀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미쳐 대응하지 못했고, 깨달은 후에는 이미 이안이 씩 웃으며 그것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은 후였다. 흰색 옷이 검붉게 물들어갔고, 그 뒤에는 푸른 왕좌가 붉게 물들었다. 선홍의 액체가 뚝, 뚝 떨어져 옥좌 주위로 피웅덩이가 고였다. 이제 좀 리콰이드의 스펠바운드 같네. 이안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칼을 꽂은 채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창가의 빛이 그의 얼굴 주위를 감쌌다.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야. 내 사랑이 원래 좀 이렇거든?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다면 내가 끝까지 찾아가서 그를 대적할 거야.”

 

이안은 씩 웃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그의 모습을 한다고 해서 내가 죽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나는 다른 사람 전부를 놓치더라도 그는 끝까지 책임지기로 마음먹었거든.”

 

그것의 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이안은 조금 더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상황이라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다른 상황과는 다르게, 나는 그의 부고를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느니 내가 직접 그를 처단하겠어. 말했잖아? 이것이 나의 사랑이고 정의라고. 그를 사랑하면서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가 어디 보통 사람이야?”

 

그가 마검을 찔러넣은 상대는 리콰이드가 아니었다. 오직 그의 얼굴을 하고 이안의 기억을 모방해 말할 뿐. 하지만 상대가 리콰이드라고 했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선 그를 살해했겠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고 스러지는 그를 품에 안는 것은 최후의 욕심일까.

 

하지만 이안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결말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상실은 소중했기에 의미가 있고 아픔은 행복했기에 진정으로 쓰라린 것이다. 반대로 아픈 것은 행복했기 때문이고 잃는 것은 소중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악하고 어느 한 쪽이 선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 그리고 당신을 사랑했기에 겪는 괴로움이라면 나는 수만, 수억 번이라도 더 사랑하고 괴로울 것이다.

 

생의 끝에도 후회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는 그날까지 나는 언제라도 당신의 목숨을 거두어 갈 각오를.

 

그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붉게 물든 왕좌가 텅 비어가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내 지나치게 넓은 홀에 혼자였다. 이안은 왕좌 옆에 털썩 주저앉아 기댔다. 이렇게 쓸쓸한 곳에서 리콰이드는 어떻게 홀로 있었던 걸까. 차갑고, 외롭고, 당신조차 없는 곳에서.

 

“보고 싶네…”

 

그 말과 함께 이경이 천장부터 부서지기 시작했다. 대법전에서 마침내 이경에 진입할 방법을 찾은 것인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이경을 연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부서져 가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파편이 색색의 꽃잎처럼 팔랑거리며 날아갔고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윤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착각인 것 같지만 리콰이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밖으로 나가면 의뢰인들에게 보수를 사용해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다. 그런 다음에는 당신의 집무실에 들려서 이번에야말로…

 

마침내 이안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꽃잎 몇 장이 그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가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이안의 눈꺼풀 위로 빛이 아른거렸다. 멀리서 파도가 모래에 부딪히는 소리도,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단잠이었다.




이안 허드슨의 심부름센터 完.



 

삽화: @daradora_53, @dotheart_cmsn

표지: @CM_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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