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허드슨과 서경애인을 둔 방문자
2022. 2. 1.

“네가 그 이안인가 하는 애구나?”

 

시린 바람이 부는 겨울, 이안은 쇼핑몰 정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 방문자와 마주했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혹은 마음에 든 건지 너 딱 잘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둘의 나이는 비슷했으나 일단은 까마득한 대법전 상사였기에 이안은 존대를 택했다.

 

“네, 맞는데요?”

 

그러나 존대한다고 해서 말이 곱게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안은 이것이 의뢰라는 걸 되새기고는 심호흡을 했다. 상대방은 고객이었고, 자신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을이었다. 기억하자, 이안 허드슨. 상대는 5 계제 원탁이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나 봐, 보통 네가 먼저 나와 있어야 하거든.”

“예정된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나왔는데, 더 서두를 걸 그랬습니다.”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이안은 애초에 이 방문자가 자신에게 뭘 원하고, 왜 그리 고까워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염화로 연락받았을 때는 평범한 것을 넘어서 되려 지나치게 수수한 의뢰 같았는데… 이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뢰는 기억하지? 우리 주연이한테 줄 선물을 고를 거야.”

“애인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아, 외전 출신인데 서경이거든? 곧 설날이니까.”

 

…한국에서는 설에 연인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보편적인가? 이안은 솔직히 그 분야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잠자코 수긍했다.

 

“청.탁.을 드려보자는 거지.”

“네에?”

 

안대를 안 차고 있어서 자신이 엽귀인 걸 잊은 건가? 아니면 5 계제쯤 되면 이렇게 선전포고도 하고 그러는 걸까? 아니다, 딱 봐도 자신을 놀리는 거였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런 마법사에게 걸려서. 질이 안 좋았다.

 

“설에는 보통 어떤 선물을 교환합니까?”

“으음, 스팸 세트, 홍삼, 샤워용품, 과일…이려나.”

 

전혀 연인과 교환할 만한 품목들이 아니었다. 이 중 특정 품목을 교환하는 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면 위의 목록은 전혀 참고가 되지 않았다. 이안이 내적 한숨을 쉬는 동안 두 사람은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연휴를 맞은 한국의 쇼핑몰은 휴일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설 특선이니, 새해맞이 세일이니 하는 매대들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소꿉친구인 에이미를 따라서 쇼핑 간 적이 몇 번 있었고, 이안은 그에게서 쇼핑 파트너로 제법 유능하다는 농담 섞인 평도 들었다. 하린은 에이미 또래니까 보는 물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안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전혀 아니었다. 이안은… 이게 몇 번째야, 일곱 번째 쇼핑백을 매장 내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쇼핑백은 각양각색의 매장의 것이라, 제각각 크고 작은 사이즈를 뽐내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무거웠다. 틀렸다. 하린은 애초에 주연의 선물을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냥 구실이고 자신을 쇼핑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을 작정이었다. 이젠 감출 생각도 없어 보이는지 하린은 여덟 번째 쇼핑백을 이안에게 떠넘겼다.

 

“정말로 이런 게 주연 씨의 선물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됩니까?”

“그럼 내가 놀고만 있다는 소리야? 우리 주연이는 내가 제일 잘 알거든?”

 

아니다. 저건 백 퍼센트 즐기고 있는 거다. 이안은 소파에 널브러져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하린과 눈을 맞부딪쳤다. 하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잠자코 내 뜻에 휘둘리기만 하면 된다는 눈빛이었다. 원탁들을 다 저런가? 하지만 이안은 그 뜻에 따라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먼저 주연 씨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뭘 좋아하십니까?”

“음… 나?”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옷은 어떤 스타일로 입으십니까? 좋아하는 음식은 있으시고요?”

“캐주얼하게 운동화나, 사탕이나 과자 세트도 좋을 것 같아.”

“운동화 좋네요, 그걸로 합시다.”

 

이안은 이제 여덟 개가 된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일어나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린이 잰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뒤에서 뭔가 불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하린이 그것을 공공연하게 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단은 따라 준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은 신발 브랜드가 모여 있는 구역에 도착했다. 하린은 먼저 앞서 나가서 이 운동화가 신상이니, 이건 디자인이 별로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안은 그것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매장을 둘러보았다. 점원은 다른 일을 보느라 바빴는지 매장 안에 보이지 않았다. 재고를 쌓아두는 듯한 뒷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찬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을 기묘하게 생각한 이안은 하린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척 살금살금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자명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거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마법재액. 이안은 주위의 눈길을 크게 끌지 않으면서 하린을 이쪽으로 데려올 궁리를 했다.

 

[매장 뒤 창고에서 마법재액을 감지했어요. 눈치챈 사람은 없어요.]

 

숱한 현장 임무를 겪어 온 5계제 마법사답게 하린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염화를 보냈다.

 

[둘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그쪽으로 갈게. 운이 좋으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단장까지 회수할 수 있을 거야.]

 

벽에 전시된 운동화들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하린이 이쪽으로 태연하게 걸어왔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창고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매서운 서릿발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단장일까요.”

“습격이야, 조심해.”

 

하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펠바운드가 펼쳐졌다. 노을의 도시가 끝없이 펼쳐나가고, 인과를 묶는 리본이 세상에 축복을 내렸다. 스스로를 마법소녀라고 부르는 마법사들이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직접 전투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독특한 아크로바틱과 눈앞에서 빠르게 곡선을 그리는 리본에 이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전의 시작이었다.






마법전은 눈 깜짝할 새에 끝난다. 하린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만한 단장을 홀로 처리했다는 것에 이안은 내심 놀랐지만 구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린도 그만큼 익숙해 보였고, 칭찬하는 것이 오히려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이안은 비슷하게 자존심 센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무사히 회수했다고 생각한 단장에서 시린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두 사람을 빨아들일 기세로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갔다.

 

“어, 하린-!”

 

말을 채 끝 마지치도 전에 이안은 마력의 급류에 끌려 들어갔다. 마도서를 점검하느라 한 발 뒤늦게 하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급류는 두 사람의 비명을 삼킨 채로 어딘가로 데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워터슬라이드가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엇이든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닿는 곳마다 손끝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먹먹한 채로 지르던 비명이 어느 새에 귀에 들리고, 두 사람은 폭신한 눈밭에 내팽겨졌다.

 

“이런 미친!”

 

이안이 가장 먼저 들은 것은 하린의 시원한 욕설이었다. 세상 온갖 고상한 척을 다 하던 것도 마법재액 앞에서는 별 수가 없나 보다. 

 

“주연이가 준 사탕이 깨졌잖아!”

 

욕을 하게 만든 건 마법재액이 아니라 작은 사탕이 겪은 불의의 사고였다. 하린이 뽀갈난 사탕을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고 애쓰는 동안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야 끝부터 끝까지 온통 설원이었다. 눈은 무릎까지 푹푹 빠져 이동하는 데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마법으로 몸을 데울 수 있다는 정도일까. 당장 얼어 죽는 건 면했다. 문제는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느냐였으니…

 

이안은 잠시 리콰이드에게 염화를 시도했다. 그리고는 대법전의 몇 마법사들에게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이 묵음이었다. 아무래도 특수한 이경인 것 같았다.

 

“염화가 안 돼요.”

“알아..! 어떡하지, 이다음에 주연이랑 데이트가 있는데, 걱정할 텐데…”

 

이안은 마력을 뻗어 주위를 조금 더 살펴보았다. 저 멀리 나무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이안이 그렇게 전하자, 하린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 보는 것을 제안했다.

 

“이 얼어 죽을 이경에도 출구는 있겠지.”

 

이안도 속으로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나 신발이 눈에 얼어붙기 전에 그보다 큰 문제가 발생했다. 땅이 우르릉,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동시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기도 힘든 언덕에서 눈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

 

이안은 하린의 손을 낚아채고 무작정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린은 이안이 앞서서 이끈 덕에 간신히 따라올 수 있었다.

 

“웬 산사태야!”

“몰라, 이경의 법칙을 어떻게 알아!”

“시아라면 금방 알아냈단 말이야!”

 

시아라는 사람이 누구인진 몰라도 대단히 유능한 인물인 것 같다는, 지금 상황에서 대단히 쓸데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넣어둔 이안은 눈의 파도가 멈출 때까지 달렸다. 다행히 땅의 울림은 점차 잦아들었고, 두 사람도 온몸이 눈밭에서 굴렀다는 점만 빼면 멀쩡했다. 그러니까, 한 다리가 파묻히거나 한 사람이 여섯 피트 아래 있거나, 하는 문제는 면했다는 뜻이었다.

 

“환영식이 한번 성대하네!”

 

하린은 금방 제 페이스를 되찾고는 눈을 털어내는 데 열중했다. 이안도 같은 행동을 하면서 말을 얹었다.

 

“단장이 독로였던 것 같지.”

“그래… 정식 분과회를 파견할만한 임무인데, 이건. 일단 우리는 탈출을 목표로 하자.”

“그게 좋겠다.”

 

둘은 그렇게 또 한참을 걸었다. 다행히도 이안이 보았던 나무에서 그렇게 멀리 달려오지는 않았다. 침묵을 깬 것은 하린이었다.

 

“.... 그런데 너 왜 반말해?”

“아… 정신없다 보니까 무심코. 존대로 돌아갈까?”

“아냐, 됐어. 다시 존대하기도 좀 그렇고, 어차피 나이도 비슷하잖아?”

 

이안이 처음부터 생각하던 것을 하린은 입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는 다리에 박차를 가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은 푹푹 들어갔다.

 

“나도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 리콰이드 던의 애인이 엽귀의 방문자라길래. 사실 그쪽에 좀 더 집중했으면 그래도 비슷한 이미지라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친구 중에 엽귀의 방문자가 있거든, 세진이라고.”

 

이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하린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너네 애인하고 내가 사이가 진짜 안 좋거든? 허구한 날 서궁에서 의견이 갈리고… 이젠 아마 베일 없어도 서로 알아볼걸? 하도 싸워서.”

 

이건 조금 신선한 이야기다. 다른 원탁에게서 원탁인 리콰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기에 이안은 귀를 쫑긋했다.

 

“근데 어느 날 그 양반이 바뀌었다는 거야. 애인도 생기고, 세상에 애인이 방문자. 오래 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는 거의 공지사항 때렸잖아? 둘이 사귄다고.”

 

이안은 목부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그래 봤자 말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좀 곯려 주고 싶었나 봐. 근데 보니까 너도 고생을 여간 할 상은 아닌 것 같다. 엽귀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 휘어지느니 부러질 거 보면 걔도 좀 생각나고. 넌 또 어쩌다가 엽귀냐.”

 

주절거림과 넋두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이안은 잠자코 듣다가 하린의 말이 끝났다 여겨졌을 때 입을 떼었다.

 

“그럼 넌 또 어쩌다가 원탁의 방문자인데?”

“한 마디를 안 지네.”

 

하린이 픽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설원을 걸었다.

 

“너도 지금 방문자잖아. 그냥 그게 쭉 이어진 것뿐이야. 그리고… 난 내가 방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거든. 사람의 마음이란 거 말이지.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미인지 이안도 알 수 있었다. 분노와 충동, 온갖 날뛰는 감정들은 다스린다고 해서 쉽게 다스려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버릴 수는 더더욱 없었다. 파도가 치듯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그리고 원탁은… 솔직히 말하는 건데, 네 애인처럼 고결한 이유로 들어간 건 아니야. 모두를 지킨다던가, 책임을 짊어진다던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 없었지. 들어가고 나서 달라지긴 했어도.”

 

하린은 잠시 숨을 가다듬듯 말을 쉬었다.

 

“세계 자체를 원망했던 것 같아, 나는. 일그러진 인과라고, 거기에서 발버둥 쳐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가장 효과적으로 발버둥 칠 수 있는 기관에 들어갔어. 영향력이 있는 기관.

 

“그런데 일그러진 건 세계가 아니었어. 나였지. 그걸 깨닫고 나서야 세계가 제대로 보이더라고. 그리고 원탁으로써 해야 할 일도.”

 

하린은 잠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너도 세상을 고통으로 보고 있니? 그렇다면, 그건 네가 고통에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안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이해했다는 것을 부드러운 미소로 대신 전달했다. 

 

“더 이상 고통에 있지 않게 된다면 세상을 고통으로 보지 않게 될까?”

“글쎄, 그다음은 모르지. 여전히 세상을 똑같이 볼 수도 있고, 조금 달리 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잖아? 너지.”

 

그 말에는 이안도 동의했다. 하린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동의했을지는 몰라도, 감정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탁의 방문자인 거야?”

“그래. 그리고 서경 애인을 뒀다는 것도 잊지 마라? 내 업적 중에는 주연이랑 사귀는 것도 있거든?”

 

이번의 자랑에는 이안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공통점이네. 서경 애인을 둔 방문자.”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도중 어느새 나무는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사과나무였다. 그것을 본 하린은 잠시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보아하니 이 나무가 인계로 돌아가는 독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하린은 팔을 뻗어 사과 하나를 땄다.

 

“자, 보수야.”

“응? 보수는…”

“보수의 조건은 알고 있어. 이게 보수야. 보수 맞아.”

“....”

 

그렇다면야. 솔직히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을 파고들 수는 없는 법이고, 그렇다고 하린이 빈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안은 사과를 소중히 품속에 넣었다.

 

“먹으라고 주는 것 아니야. 땅에 심어서 키워,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

“십 년은 걸릴 텐데?”

“그 정도도 오래 못 가겠다는 거야? 설마.”

 

장난스러운 도발에 이안이 씩 웃었다. 

 

“그래, 심어서 키울게. 싹이 트고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독로를 타고 인계로 돌아왔다. 도착한 곳은 바로 단장을 처음 수집한 창고였다. 서둘러 대법전에 연락을 한 뒤 급격히 지친 두 사람은 미적거리며 운동화를 골랐다. 하린은 이안의 센스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조언을 참고했고, 후속 분과회가 수습을 위해 달려오기 전까지 둘은 주연을 위한 운동화를 구입할 수 있었다.

 

“어? 세진아?”

 

분과회원 중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는지 하린이 앞으로 나섰다. 긴 민트색 머리를 하고 노란 의안을 낀, 이안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이안은 옆에서 목례를 했다.

 

“휘말렸다는 마법사가 너였어?”

“주연이 선물 사러 나왔다가 이경에 처박혔다니까. 살아 나와서 다행이지.”

 

세진은 그 뒤에 있는 이안을 눈여겨보듯 짧게 시선을 줬다.

 

“옆에 있는 분은 전에 얘기한?”

“응, 심부름 어쩌고 그거.”

“혼자가 아니었어서 다행이다.”

“햇병아리 마법사긴 했어도 도움은 됐지”

 

두 마법사는 잠시 이안에게 시선을 주다가 또 둘만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전 부치느니, 전부치느니, 시아에게 전을 가져다주느니, 상견례를 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이안이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안은 예의 바른 에스코트처럼 리콰이드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있었다.

 

둘은 짧게 작별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아마 세진이 속한 분과회가 이경에 대해 간단한 조사를 맡은 것 같았다. 하린은 뭘 확인하듯이 이안을 보았다.

 

“바로 대법전으로 돌아갈 거야? 갈 거면 같이 가게.”

“아, 봐 둔 게 있어서 그것 좀 사고.”

“그래. 보수 잘 챙기고, 솔직히 의문투성이인 보수일 테니까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한번 도와줄게. 애인이랑 행복해라.”

“너도.”

 

씩 웃어주는 이안을 보며 하린은 제 갈길로 떠났다.  이안도 잠시 그곳에서 머무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리콰이드의 집무실로 가는 길은 익숙하다 못해 편안했다. 창 밖에 군데군데 눈이 긴, 맑은 날이었다. 미리 들르겠다고 연락을 했으니 리콰이드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똑똑, 문을 두드리면 어김없이 ‘들어와’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문을 열면서 이안은 앞머리를 털었다.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전에 얘기했던 DVD, 구했어! 예전 영화라 시간이 좀 걸렸지.”

 

리콰이드는 집무실에 앉은 채로 허리를 펴 이안 쪽으로 시선을 줬다.

 

“잘도 그런 걸 구해 오는군. 주변에 골동품점이라도 있나?”

“아, 그러고 보니…”

 

하린과 쇼핑을 하는 도중에 눈에 걸렸던 물건이 있다. 이안은 주섬주섬 백팩을 풀어서 그것을 꺼냈다. 한 세트에 만 얼마짜리 하던 실링 왁스 세트였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런 게 있더라고. 당신도 해 본 적이 있어?”

 

리콰이드는 잠시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 미간을 지푸리다가 인장이 눈에 들어오자 펜을 내려놓으며 후, 하고 웃었다. 

 

“취미인가? 꽤 고상한데.”

“... 그런 거야? 뭔가, 앤틱 한 걸 구경하고 있으니까 추천받아서…”

“앤틱 한 거긴 하지. 요즘 취미로 맞춰서 개량된 모양이긴 하지만. 흠…”

 

리콰이드는 어느새 이안 근처까지 걸어와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소파에 앉아 성냥을 그었다. 실링 왁스가 데워지면서 녹아 뚝, 뚝 떨어졌다. 그 조금 옆에는 봉투에 고이 담긴 편지까지도.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제가 봐도 어설픈 손동작이었다. 리콰이드는 편지 한 번 보고, 녹아든 왁스를 한 번 보고, 인장까지 한 번 보고,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한 손을 까딱이더니 손때가 묻은 금속의 낡은 인장을 하나 불러왔다. 그것은 책상에서 손으로 슥 날아와 스치더니 곧 이안 옆에 내려앉았다.

 

“...?”

“다 녹였으면, 편지봉투 입구 쪽으로 떨어트려야지.”

 

어리둥절한 이안의 옆에서 리콰이드가 편지봉투 중앙 쪽을 마른 손으로 톡 톡 가리켰다. 

 

“아, 응.”

 

이안이 입구에 왁스를 녹인다고 열중하는 동안 리콰이드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걸 써라.”

 

자신 옆에 있는 금속의 인장을 본 이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당신이 쓰던 것 아니야?”

“내가 썼던 거지. 실링을 할 거라면, 이제 그걸 써라.”

 

이안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도 도장을 공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심조심 물었다.

 

“내가… 써도 되는 거야?”

“그래.”

 

끝이 떨린 이안의 목소리에 리콰이드가 답했다. 그는 옆에 앉아서 소파에 팔을 올리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부드러웠다. 이안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 조심스레 인장을 찍었다.

 

꾸욱, 누르고 난 뒤 입김을 몇 번 불어 식힌 다음, 이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편지를 리콰이드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는 최대한 진중한 눈빛을 쥐어짰다.

 

“나 없을 때 읽어.”

 

리콰이드는 먼 옛날 옛적, 자신의 가문 인장이 찍힌, 러브레터일 게 분명한 편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안 되고?”

“안 돼.”

 

이안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목 부근이 아직 홧홧했다.

 

“집에 돌아가서 읽어.”

“단호한데.”

 

리콰이드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마른 손으로 편지를 받았다. 이안은 품 속에 넣어둔, 하린이 건네준 사과를 생각했다. 사과가 싹을 틔워 사과나무가 될 때까지는 아마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 파도가 바위를 부술 때까지의 시간 또한.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되겠지.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이안은 하린에게 들은 그의 서경 애인과, 원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이안은 자신의 연인에게 부끄러울 만큼 마음이 담긴 러브레터를 전하고 있었다.

 


세 번째 의뢰인: 원탁의 방문자, 〈침잠하는 우리의 비상〉 이하린

보수: 설원의 사과 한 알.

한 줄 후기: 생각보다 괜찮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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