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은 인정해야 했다. 고작 한 번의 의뢰로 베테랑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 내에서도 상상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켜놓은 모양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예초기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수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허리를 펴서 아래를 바라보니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은 섬이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울릉도에서 이안은 벌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러한 상황에 처했느냐 하면, 이안은 자신밖에 탓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 이안 허드슨의 심부름센터. 분명히 그 글자를 쓴 사람은 자신이었고 동시에 어떤 궂은 의뢰가 들어와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다짐이 필요한 날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파악한 상황에 어이없어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목 뒤에서는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안은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을 다시 한 번 닦았다. 챙겨준 벌초용 밀짚모자가 아니었더라면 이안은 이미 머리에서 달걀 프라이라도 굽고 있었을지 몰랐다. 다시 허리를 숙여 몇 번 더 예초기를 돌리자 금세 정적이 시끄러운 모터 소리에 묻혔다.
“어이!”
아래서 이안을 부르는 소리에 이안은 예초기를 끄고 허리를 폈다.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곧 열여덟이 되지만, 허리가 안쪽으로 굽어 있는 느낌에 이안은 밑의 사람이 언덕을 올라올 때까지 허리를 곧추 펴는 데 열중했다. 올라온 남자는 이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했는데? 어때, 할만 해?”
“할 만 한, 것 같아요.”
단어와 단어 사이 공백은 웃음 섞인 한숨이었다. 타케시는 알만하다는 듯이 이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랫쪽도 거의 다 정리했어. 고생 많았다. 이제 마무리만 하고 점심 먹으러 가자.”
“네!”
이안은 낫을 들고 벌초 모자를 쓴 전 엽귀, 노가와 타케시를 바라보았다. 엽귀 시절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던 터라 이안은 타케시가 심부름센터로 의뢰를 해 왔을 때 그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보호장비를 차고 벌초하는 모습을 본 결과, 그 이미지는 거의 못 쓰게 된 지경이었다.
이안은 낫이 아니라 창을, 편한 옷과 보호장비가 아니라 제복을 입은 타케시를 상상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도무지 불가능했다. 이미 자신 안에서 타케시는 엽귀가 아닌 벌초 선배였다.
“그런데 처음 치고는 꽤 잘 하는데? 해 본 적 있나?”
“용돈벌이로 잔디깎이를 좀 했거든요.”
정말로 가지런히 자란 잔디를 깎는 일이었지 밀림을 초원으로 만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경력으로 인정된다는 건지, 타케시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적임자를 골랐구만.”
“하하, 감사해요.”
정말? 정말 이 인선이 최선인가? 이안은 아방궁 셋과 임무에 배정되었을 때 원탁에게 보냈던 시선을 애꿎은 예초기에게 보냈다. 하지만 타케시의 말대로 완전히 헤매거나, 적어도 다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타케시의 말에 조금은 신뢰를 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이 적당히 수풀과의 싸움을 끝내고 마을로 내려왔을 때, 마을은 이미 점심상을 차리는 데 한창이었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쌀밥과 수육에는 이안도 자신이 얼마나 허기져 있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곧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기를 들었다. 몇몇 인물이 시큼한 흰색 음료를 권했으나 타케시에 의해 적당히 제지되었고, 이안은 궁금했지만 예의에 어긋날까 걱정하여 더 묻지는 않았다.
점심상을 깨끗하게 비우자 타케시는 이안에게 소화를 시킬 겸 섬 외곽을 걷자고 제안했다. 그제야 이안은 노가와 타케시, 전 서경엽귀이자 현 서경학원의 정확한 의뢰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사시는 울릉도의 벌초를 도와달라고 하셨지?’
그러고 보니 타케시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상당히 의외인 의뢰였고, 잔디 깎기 정도로 생각한 자신은 타케시가 온갖 보호장비와 모자를 들어 올렸을 때 무언가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허리도, 팔도, 다리도 내일 무시무시한 근육통을 예고하는 지금은 웃어넘길 일이지만.
두 사람은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마을길을 걸었다. 거세다고 할 정도의 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은 큰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내가 전 엽귀였다는 건 들은 적이 있지?”
이안은 엽귀 내부에서 들었던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십여 년 전 엽귀에 들어와서 착실하게 임무를 하다, 돌연 한 임무 이후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학원으로 이직했다는 마법사. 그와 같이 엽귀는 성실하게 임무를 하다가도 갑자기 떠나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고 들었다.
“〈대의멸친의 눈먼 창〉이셨다고.”
“컥! 콜록! 콜록!”
마침 물을 들이켜던 타케시가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이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지 되짚었다.
“그래, 전에는 그 이름으로 불렸지. 아버지를 모시면서도 참 불효자였어.”
마법명의 뜻은 알고 있었기에 이안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엽귀를 나온 건 내 신념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마법을 악용하는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내 의지가 꺾인 것도 아니고.”
타케시는 한 곳에 멈춰 서서 시야 아래애 펼쳐진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은 파도가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쳐 희게 부서졌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고 나서야 타케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하나뿐인 아버지를 더 늦기 전에 모시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용종이신 아버지는 친아들도 아니었던 우리 형제를 거두어 주셨어. 그리고 동생이 죽고, 그 일이 있고 나서도…”
타케시는 바다의 끝을 가늠하듯이 눈가를 좁혔다.
“언제나 나를 한결같이 대해 주셨지. 철이 들 때가 된 거야, 나도. 그래서 엽귀를 떠난 거다.”
그 말을 마치고 난 다음 타케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다른 소중한 것이 생겨서 엽귀를 나오는 것은 절대 비겁한 행동이 아니야. 나는 내가 엽귀로 도망쳤음을 깨닫고 내 눈을 돌려받았다. 그러니 잘 들어둬라, 이안. 너는 아직 가능성이 많아. 내 이야기를 기억해 두도록 해.”
이안은 타케시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케시가 한 말은 자신을 향한 것임에 동시에 스스로에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안은 수긍했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그가 한 말을 수용했다. 이안의 눈빛을 읽은 타케시가 가볍게 씩 웃었다.
“어린 방문자가 엽귀에 들어왔다고 해서 걱정했더니, 걱정할 게 하나 없었구만. 그러니 너무 남의 이야기를 담아 듣지 말거라. 내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일 뿐이니까.”
타케시는 손을 뻗어 이안의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머리를 흩트려놓았다. 이안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곧 그가 품 안에서 안대 하나를 꺼내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안대를 쓰지 않는구나. 하지만 나는 아니었지. 이 안대는 내가 엽귀였을 적 사용하던 것이다.”
“... 소중한 물건이겠습니다.”
“응, 그렇지.”
이안은 조심스레 타케시에게서 안대를 받아 들었다. 부드러운 검은 천은 좋은 재질이었고, 피부에 까슬하지 않았다. 이안은 조심스레 안대로 의안을 감쌌다. 타케시는 끈의 위치를 두어 번 조정해 주고는 물러나서 모습을 관찰했다.
“감사합니다. 보관해 두고 싶으실 물건일 텐데…”
“괜찮아. 이제는 과거가 된 일이기도 하고, 그것보다 소중한 건 충분히 많이 있어. 게다가 네 보수에 대해 듣자마자 딱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타케시는 마음에 든다는 듯이 씩 웃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건 생각보다 어색했다. 그래서 리키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손길도 평소처럼 확신에 찬, 혹은 성급한 것이 아니라 여백에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언제나처럼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이안은 쭈뼛거리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책상 앞에서 리콰이드가 서류의 산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안은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하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리콰이드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생각한 순간, 이안은 고개를 든 리콰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른쪽 안경알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에 안대를 차고 있었다. 이안은 입 안에 미처 사라지지 못한 남은 단어들을 우물거렸다.
"아… 아직 일 많이 남았어?"
"거의 다 끝냈다. 오겠다고 한 시간보다 조금 이른데."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이안은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릴 궁리를 했다. 그는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입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안대를 했군."
그러나 리콰이드가 조금 더 빨랐다. 이안은 지나치게 가까운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리콰이드는 팔을 들어 이안의 한쪽 볼을 손에 담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검은 안대의 끝자락을 매만졌다.
"무슨 일이 있나?"
"그냥, 선물 받아서… 별로야?"
“선물?”
어색한 건지… 설레는 건지. 속이 울렁거릴 듯 천천히 식었다. 감추기 위해 이안은 평소 자신이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눈알을 도로록 굴려 아직 닿아있던 리콰이드의 손길을 보았다.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 삐죽이는 투로 나왔다. 이래서는 칭찬을 듣고 싶어 안달 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안은 감정에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리콰이드는 조금 우습다는 듯이 눈을 휘었다. 픽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하며 내리는 리콰이드의 손을 이안이 잡아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두 손이 맞닿아 온기가 느껴졌다. 이안은 리콰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번째 손가락의 금속이 체온으로 미지근했다. 그 복잡한 음각을 이안의 손가락이 한번 훑었다.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창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리콰이드가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하며, 이안은 그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반지는 차갑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두려우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불안은 용기의 색을 띄었고, 이안은 신중하게 보라색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안대를 쓴 눈이 답답하지 않았다.
느슨한 햇살이 들어오던 날, 엽귀는 원탁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번째 의뢰인: 학원의 서경, 〈송양지인의 곧은 창〉 노가와 타케시.
보수: 타케시가 엽귀일 적 사용하던 안대.
한 줄 후기: 다음번에도 부탁하고 싶을 정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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