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언어
2020. 5. 19.

생각해본 적이 있다.

 

너를 만나면 가장 먼저 어떤 감정이 떠오를지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미안해, 이건 너무 두서없으니 탈락. 잘 지냈어, 너무 식상하게 들릴지도 몰라. 고마워, 뻔뻔하기도 하지.

 

결국 명쾌한 답은 아득한 구름 저 어딘가에 놓쳐 버린 채로 미적지근하게 식어 버린 라떼를 휘적휘적 저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일상이다. 또래 친구들이 이름을 부르면 금세 웃으며 답한다. 찰랑거리는 스마트폰의 키링, 마시멜로 같은 몽상들. 언제까지나 두루뭉술한 상념으로 남을 거로 생각했는데.

 

언젠가 너를 마주하라던 친구들의 타박, 소원을 빙자한 조언. 도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 한 다짐. 살짝 수줍게 웃던 그들의 미소가 너와 닮아있었다. 너무나 싫어했던 너의 미소, 한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꿈을 꾸었다. 마성시의 그리운 고등학교의 텅 빈 교실 안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책상에 엎드려 낮아진 시야 속 창밖을 은하수가 수놓는다. 눈을 치켜뜨지 않아도 나른히 흐르는 네 샴푸 향으로 네가 거기 있음을 알 수 있다. 엎드린 내 앞에 앉아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필시 나를 미워하고 있을 테야, 날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겹쳐지고 입안에서 달큰한 사탕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제라도 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것만 같고, 혹은 얼마든지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 초조해진 나는 애꿎은 손톱을 까득거린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모른다. 긴장에 소용돌이치는 위장이 무색하게 나는 언제나 그곳에서 잠이 들었으니까. 우습게도, 나를 가장 미워해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모든 방어를 내려놓는다.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운 밤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학원에 초빙된 어느 날. 너를 만나게 해 준 짓궂고도 놀라운 운명에 그토록 애매하던 나의 머릿속 페이지가 넘어간다. 크고 새까만 글씨로 내게 기적을 선고한다. 네가 나를 입에 담는다.

 

꿈보다도 꿈 같은 풍경에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네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진다. 주위의 소음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는 한 치도 변한 것 같지 않아 보여, 꿈에서 보던 그 얼굴과는 조금 다르네, 나를 미워해? 내가 네게 애원했던 것처럼, 나를 미워해?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만큼 네가 거리를 좁혀온다. 나는 엉겁결에 네 이름을 부른다.

 

너를 가장 처음 부르는 그 장소에서, 나는 네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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