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2021. 2. 21.

youtu.be/yzDCgArwlEk

 

 

새벽별의 옅은 빛이 커튼을 헤치고 들어왔다. 그것은 어슴푸레한 손길로 방의 컴퓨터, 옷장, 책상을 데우다가 금방 사라질 듯 깜빡거렸다. 이안은 가만히 그것을 좇다가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새벽은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비단 그 이름 때문이었을까. 당신의 사소한 모든 것들이 새벽을 떠올리게 하였다. 동이 틀 때면 지평선 저 아래부터 부하게 밝아 오는 햇빛, 시리듯이 파란 새벽하늘과 깜깜해져 가는 별들. 누군가의 눈썹을 닮은 흐릿한 구름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밤새 켜진 컴퓨터 화면에서는 미약한 열기가 느껴졌다. 화려한 LED 키보드가 다시 한 번 물결친다. 웅웅 본체가 돌아가는 소리와 바탕 화면에 가득 깔린 게임 아이콘이 무색하게 그 어느 프로그램도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이안은 다시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를 기울였다.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밤잠을 설친 것이 오늘로 며칠이나 되었던가. 누우면 다른 생각이 나고, 다른 생각을 지우려고 생활을 바삐 해도 대책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이안은 마우스를 몇 번 달깍거리다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답은 하나였다. 정석으로 가는 방법. 이안은 인터넷 브라우저를 두 번 클릭했다.

 

 


 

레스토랑은 이안의 용돈을 탈탈 턴 만큼 경치가 환상적이었다. 미리 음식을 맛보고 데이트를 예비할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지라 이안은 심혈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지나가듯이 리콰이드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음식, 조용한 분위기,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에 프라이버시까지. 이안이 사랑하는 남자는 대단히 까다로웠으므로, 그가 신중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사 주었던 캐주얼한 정장을 다리고, 서랍장 깊숙이 넣어뒀던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한참동안 매만지고. 그러는 와중에도 이안은 초조하게 염화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다는, 혹은 업무가 길어져서 오늘은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에두른 거절. 그러나 그런 염화는 오지 않았고, 심지는 이안 속에서 굳어져만 갔다.

 

30분 일찍 나간 약속장소에서 이안이 맞은 것은 쌩한 찬바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근사하게 차려입은(적어도 이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리콰이드 던이 찾아왔으며, 두 사람은 그대로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분위기나 서비스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런 쪽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이안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안에게 문제되는 것은 음식의 맛이 아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리콰이드는 잠시 이안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이안의 진심을 캐묻는 것 같아, 평소 같은 때였으면 이안은 기분좋은 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안이 긴장을 풀 수 있을 때가 아니었고, 또 풀리지도 않았기에 그는 눈에 빛을 내며 응수했다.

 

한순간이 지나고, 리콰이드가 한숨을 쉬자마자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던 긴장의 끈이 풀어졌다. 묘하게 리콰이드의 분위기가 다정해진 것 같았다.

 

“고맙다. 내가 에스코트 받아야 하는 쪽인 건가?”

 

그 말에 이안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자연스레 올라왔다.

 

“그런 셈이지.”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테이블은 두꺼운 커튼으로 다른 테이블과 나뉘어져 있었다. 촛불이 간간히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흔들리고 연인들이 밀어를 속삭이는 소리가 언뜻 들려온 것 같았다. 리콰이드는 이안보다 한 발자국 먼저 나아가 손을 들어올렸다. 의자를 빼달라는 뜻인 걸까. 이안이 움직여 의자를 빼는 행동을 취하자 그는 푹신한 의자에 바르게 앉았다.

 

음식은 리콰이드의 입에 맞는 것 같았다. 예의상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음식을 먹는 속도가 쳐지지 않았다. 이안은 먹는 도중에도 그를 힐끔힐끔 올려다보았다. 식기를 쥐는 방법, 음식을 써는 방법, 식기의 순서, 음식을 밉지 않게 넘기는 방법 하나하나에 리콰이드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이안은 자연스레 체득한 “필요한 것들”을 실감하며 그릇을 비웠다.

 

디저트가 나오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이안은 타이밍을 골랐다. 대화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는 시점. 방해는 한동안 없을 것이었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도 순조로웠다. 앞으로의 결과는 그 누구도 모르는 법. 그는 잠시 차를 입에 머금다가 입을 떼었다.

 

“그 때로부터 시간도 좀 지났네.”

 

딱히 지칭하지 않아도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양측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작은 행성, 춤추던 환상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꽃밭.

 

“내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리콰이드가 작게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좋아해, 리키.”

 

이윽고 이안은 숨 죽여 대답을 기다린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리콰이드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래. 나도 좋아해.”

 

이안의 눈이 잠시 커진다. 리콰이드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도 내 감정을 쉽게 정의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기만 같아 보이나? 하지만 그러고 싶었어. 네가 말하는 대로 따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게 바로 나의 생각이야. 오해가 있었다면 정정하겠다.”

 

구불구불, 미로 같은 리콰이드의 사랑. 그 속에서 이안은 가까스로 답을 찾아낸다. 열어두었던 것보다 닫아두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어두침침한 미궁 속에서 이안은 소문 속의 괴물을 찾아나선다. 자신의 심장을 쥐고 있는 피의 옥좌에 앉은 그 이를.

 

그 날의 당신을 떠올려, 숱한 밤마다. 피로 얼룩진 옥좌와 나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는 당신을,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괜찮아.”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미궁,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가둔 철장. 그 안으로 실타래가 도르르르 풀어진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실타래에 이안은 불을 붙이고 뛰기 시작한다. 화염 같은 나의 사랑이 당신의 어두운 세계에 조금이라도 빛이 되기를. 당신이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기를.

 

“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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