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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결
2022. 8. 27.

※CoC 시나리오 《관계의 종언》 스포일러 주의

 

 

이안이 눈을 뜬 것은 늦은 오전이었다. 벽걸이 시계에 눈길을 줄 필요는 없었다. 옆자리의 리콰이드가 느긋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이나 자세로 미루어 판단했을 때 한참은 그러고 있던 모양이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느지막한 아침 햇살이 훤했고,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가 고요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안은 졸음이 가시지 않은 채로 몇 번 뒤척였다. 몸이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어젯밤 뜻밖의 몸고생을 한 탓인 듯했다.


"일어났어?"


그는 제대로 리콰이드를 바라보려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눈부신 탓에 자연스레 눈이 찡그려졌다. 잔뜩 잠긴 목소리는 성대를 살짝 긁는 소리를 냈다. 기억이 슬슬 돌아오자 물어볼 것이 많아, 이안은 목을 한번 더 가다듬었다.


"몸은 좀 괜찮아?"


그 말을 듣는 리콰이드는 평온해 보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식은땀을 흘리며 뒤척이던데.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하고. 리콰이드가 악몽이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덜컥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이안은 밤새 땀을 닦아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랬다. 그러다 어느새 잠든 건지 눈을 떠 보니 지금이다. 그를 간호해야 하는 자신이 되려 늦잠을 자버렸다는 사실에 머슥해하고 있을 때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멀쩡하다."


첫음절에 바람 소리가 들어가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안의 주관적인 의견을 묻자면 그다지 신빙성이 가지 않는 대꾸였다. 일단 일어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앉자 리콰이드가 천천히 물러났다. 이불과 시트가 구겨지면서 빳빳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환한 햇살 덕분에 이안은 한층 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리콰이드가 예의 그 무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안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어제 많이 당황했어. 크게 다친 것 같아서..."
"그래, 싸움이 있었지. 내가 다친 건 아니다. 조금 다친 것도 무사히 치료했고. 심각한 건 아니야."


그런 것 치고는 피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침실이 그가 묻히고 온 피로 흥건했다. 빨갛게 젖어가는 타일과 붉은 손자국이 남은 손잡이. 번쩍번쩍 지나가는 기억에 잠시 머리가 아팠다. 이안은 털어내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부터 실랑이를 할 필요는 없다. 슬슬 리콰이드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기에 그는 화제에서 슥 빠져나갔다.


"임무는 잘 마치고 왔고?"
"꽤 난감했었지... 그래도 잘 마쳤어."
"당신이니까."


의외의 답변이다. 그런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무언가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긴 했지만... 리콰이드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상당한 위기였나 보다. 하긴, 원래부터 쓸데없이 걱정시키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 인물인데 어제 그런 모습이었으니. 그래도 이안은 리콰이드의 말대로 그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자신이고, 숱한 위험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의무와 사명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체험했다. 그렇기에 그제 임무가 있다는 그를 배웅할 때도, 어제 피를 뒤집어쓴 채로 마주했을 때도, 놀랐을지언정 불안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그가 돌아오리라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안은 그가 다녀온 임무 이야기를 들었다. 머나먼 이경에서 이곳과 같은 하늘, 같은 구름을 하고서 아주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세상. 올 하나 풀린 것 없이 모든 것이 같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들. 그런 세계를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스스로도 모르게 흡수될지도 모른다. 리콰이드의 말마따나 무엇이 달라졌는지도 눈치채지 못하는 채 휩쓸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도 리콰이드 던이 있어 그를 따라가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이안은 흥미로운 공상을 내려두었다. 결국 일이 끝난 다음 리콰이드는 그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것만은 불변의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시계를 본 두 사람은 다음 일정으로 장을 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리콰이드가 이안에게는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 이유로 식사를 차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일단은 따라 주는 수밖에. 마침 날이 좋아 외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다. 이안은 주말 오전의 나른함을 개어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장바구니를 하나 들려 주면 리콰이드가 생각을 바꾸려나.


리콰이드가 드레스 룸에서 서랍을 뒤적이는 동안 이안은 침실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욕조에 핏물을 빼려고 물에 담궈 둔 셔츠와 바지가 둥둥 떠 다니고 있었다. 물은 이미 진홍빛이었다. 장을 보고 돌아와서 어떻게든 저것을 해결해야지. 이안은 허물 같은 옷가지를 노려보다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새 옷을 갖춰 입은 것인지 리콰이드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위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겹쳐졌다. 이안은 물을 세게 틀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어젯밤의 예상치 못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인 날이었다. 준비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면 리콰이드가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이고, 고맙다며 입을 맞춘 다음 외출하기 전까지 잠시간 고즈넉한 시간이 이어지겠지. 이안이 좋아하는 주말 오전이었다. 그런 평온 속에서 그는 조금 전 리콰이드가 해 준 세상의 이야기를 상기했다.


무엇 하나 다른 것 없는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이런 것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이상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을까. 이안은 조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설령 그런 유혹을 받는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수락할 이유가 없다. 리콰이드의 진심이 담긴 세계를 버리고 다른 진실을 수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매일 아침 그의 곁에서 눈을 뜨고, 종일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로는 손을 잡기도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는 세계. 이윽고 밤이 오면 나란히 누워 이만 잘까, 하고 눈을 감을 수 있는 소중한 날들. 리콰이드 또한 자신만큼이나 이 시간을 소중히 하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가 떠나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언제 뒤돌아보더라도, 그만큼은 자신 곁에 있을 것을. 이안은 세상의 그 누구라도 부러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사랑을 하고 있구나. 거울 너머로 앞머리에서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얼빠져 보였기에, 이안은 그 모습을 보다가 킥킥 웃었다.

 



두 사람이 마트에 도착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제 받은 전단지에 적힌 대로 대대적인 세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주말이어서 그런 것인지 사람이 북적였다. 인파에 휩쓸릴 각오는 해야겠는걸, 하고 생각하며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끼리, 연인이나 친구끼리, 혹은 혼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행과 떨어지기라도 했다가는 고초를 겪을 것이다. 이안은 카트를 끌고 오는 리콰이드의 손을 냅다 잡았다. 의아하다는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그는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이렇게 하면  헤어지지 않겠지? 손 놓기 없기야."


단단한 손이 얽히는 데서 따스함이 있었다. 리콰이드는 잠시 잡힌 손을 내려다보더니 마주 손가락을 감았다.


"... 그래. 너나 놓지 마."


이안은 그 말에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만나기 시작한 지가 몇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단 둘이 있을 때면 묘한 설렘이 있었다. 비록 배경이 식료품을 담은 선반에, 끝없이 이어질 듯한 창고형 마트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랴. 마냥 좋다는 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주위 사람들이 만년 신혼이라고 말할 때도 이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일 뿐 잡은 손을 놓지 않곤 했다.


안타깝게도 맞잡은 손은 우유 두 팩의 성분을 비교하기 위해 떨어져야 했다. 리콰이드는 '우유가 거기서 거기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무지방을 살지 저지방을 살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안 앞에서 그런 말을 건네지 않을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다음 원래 사던 버터와 세일하는 신제품 앞에서도, 샐러드 드레싱 코너 앞에서도, 제철이라 달다는 과일 매대 앞에서도 두 사람의 손은 번번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손을 맞잡아왔다. 의식하지 않고 되찾아오는 흐름처럼, 이안은 그 손이 좋았다. 엷은 살결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기도 하고 괜히 꼭 힘을 주기도 하며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이 미는 쇼핑 카트 위에 식재료가 차근차근 쌓였다. 달걀, 오렌지, 시리얼, 잼과 스콘, 미트 파이, 소시지, 크림과 베이컨, 칵테일 새우, 샐러리와 적양배추, 큼지막한 오리... 리스트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류 코너 앞에서 서성이는 리콰이드를 보고 이안은 한 술 더 떠서 사과주를 한 병 담기도 했다. 커다란 카트가 꽉 찬 것은 당연지사다. 담을 때 신나게 담고, 물건을 계산할 때까지만 해도 이안은 맛있는 것을 해 먹을 생각에 잔뜩 들떠서 카드를 긁었다. 그가 조금 지나쳤나, 하고 생각한 것은 장바구니에 물건을 옮겨 담으며 선택의 무게를 체감한 후였다.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지? 이웃을 초대해서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 아니야? 생각의 흐름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스마트폰의 벨소리였다. 마침 이안은 우유를 몇 리터까지 동시에 들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재빨리 리콰이드에게 부탁하는 눈짓을 했고, 리콰이드는 손에 들린 설탕 봉지를 내려놓으며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네 ■못은 아무■■ 없■."


스피커폰으로 흘러나온 음성은 노이즈가 잔뜩 껴 겨우 음절을 분간할 수 있는 정도였다. 몇 군데를 놓친 탓에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화는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잠시 머물렀던 소강상태의 침묵이 마트의 소란스러운 웅성임으로 뒤덮였다. 그가 고개를 들자 리콰이드도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팸인가?"
"잘못 걸려왔을 수도 있고, 당신 말대로 스팸일 수도 있고... 이상하게 요새 그런 전화가 많이 오더라."
"뭐 이상한 홈페이지라도 가입한 거 아닌가?"


리콰이드의 말에 이안은 최근 개인정보를 기입한 사이트를 되짚어 보았다. 지난번 휴가 때 숙소를 예매하려고 가입한 멤버십, 치즈를 세일하길래 냅다 등록해둔 홈페이지... 곰곰이 생각해도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이안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디선가 새어나갔나 봐. 차단해둬야겠어."


아까 리콰이드에게 대답한 것처럼 확실히 이상한 전화가 많이 오긴 했다. 문자도 몇 번 오나 싶더니 금세 사라져 있고, 개인정보를 소홀히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리콰이드라고 생각해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목소리를 판별하기에는 짧고, 몇 마디 들리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말과 함께 엇박으로 들리는 숨소리에서 무언가를 읽어냈다고 착각해서일까? 그렇지만 리콰이드는 눈앞에 있는걸. 어딘가로 떠나지도 않고, 자신 탓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까이 선 리콰이드 옆에서 이안은 큰 고민 없이 번호를 스팸으로 등록했다.


"가서 마저 하던 거 해야지. 오늘은 누가 점심을 해 준다며. 저녁인가?"
"점심이야."


고개를 들고 바라본 리콰이드는 작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이안은 리콰이드에게도 잘 보이게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시간은 정오에서도 몇 시간 지나 있었다.


"점심이구나."
"점심이라고."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이안은 샐쭉 웃었다. 어제 일로 걱정한 것 치고는 리콰이드도 평소처럼 보였다. 이제는 자신이 지나치게 당황했던 것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렴, 아까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평소의 주말, 평소의 오후라고. 집으로 가는 길은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타서 드라이브를 하자. 이안은 다시 리콰이드의 손을 잡았다.

 



장바구니를 널찍한 주방에 내려놓은 다음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였다. 달걀은 달걀 상자에, 시리얼은 찬장에, 좀 이따 마실 과실주는 저 옆 한편에. 각종 식재료가 작업대 위로 딸려 나왔고 예열을 위해 오븐의 불이 켜졌다. 리콰이드는 스튜라도 만들 요령인지 감자나 브로콜리 따위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안은 커다란 오리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고민했다. 원래라면 이때 즈음 장난스런 농담을 건네거나 뒤에서 와락 안기도 했겠으나 앗차, 리콰이드가 칼을 들고 있었다. 쌍검만큼 무섭지는 않아도 마검이든 식칼이든 칼을 든 리콰이드는 위협적이었으니 이안은 자제하기로 했다. 대신 이안은 자신도 칼을 들어 오리를 손봐 주기 시작했다. 내장과 지방도 버리지 말고 그레이비 소스라도 만들어 볼까. 스터핑으로는 양파와 레몬, 생강을 넣자. 대강 준비가 끝나고 오리를 오븐 안으로 밀어넣으면 한동안 할 일이 없었기에, 이안은 계속해서 리콰이드 곁을 기웃거리면서 다른 메뉴라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파스타를 곁들인 감바스, 찍어 먹을 식전 빵도 잘라 둬야겠지. 아까 제쳐 둔 그레이비도 만들고, 디저트로 먹을 오렌지도 잘라 두자. 리콰이드가 쓰다 남은 감자로는 으깬 감자 샐러드를 하고, 버터도 듬뿍 넣어야 맛있다. 새로 산 샐러드 드레싱에 구운 가지를 같이 먹어 볼까. 한참 움직이다 보면 리콰이드가 만지작거리던 스튜가 다 되었는지 간을 보라며 손짓을 한다.


"맛있는데?"
"잘됐군."


이안은 그 옆에서 당신이 근래 한 요리 중 가장 맛있었다는 둥(사실이다) 몇 마디를 더 얹다가 기어코 주방에서 내쫓긴다. 어차피 오리는 한 시간은 더 구워야 하고, 리콰이드는 간만에 플레이팅에 공들이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까 자리를 비켜 주는 편이 낫다. 이 김에 집안일이라도 할까. 아침에 급하게 나왔으니 화장실 정리라도 할 겸 이안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부산하던 주방과 다르게 위층은 고요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에 빛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복도마다 걸린 두 사람의 사진들. 손님이 오가곤 하는 일층과 다르게 여기는 두 사람만의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된 이후로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었기에 집의 구조도, 가구도 열일곱 살의 이안이 기억하는 그대로. 작은 모퉁이나 문지방 하나라도 그간의 추억으로 빛바래 있다. 이안은 유난히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 결혼사진의 액자를 만지작거리다 지나친다.


화장실의 조명을 켜면 새파란 등이 햇빛과는 사뭇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문을 짚고 들어서는 이안에게 리콰이드가 좋아하는 방향제의 냄새가 훅 끼친다. 칫솔은 몇 시간 전 사용한 그대로 끝이 조금 젖어 있고, 텅 빈 욕조는 며칠 전 청소한 보람이 있는지 반지르르한 윤택을 낸다. 지금 쓰고 있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큰 걸로 바꾸자고 해 볼까. 이안은 막상 화장실에 들어오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욕조에 걸터앉아 블라인드 사이로 창 밖을 내다봤다. 이 동네는 주택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한낮 주말에도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안은 처음 이 부근 집값을 들었을 때 경악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학생이라 사회인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는데,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백 년 하고도 몇십 년을 앞서간 걸 어떻게 따라잡는단 말인가? 지금 와서는 그다지 의미 없는 생각이다.


이안은 일어나 칫솔이나 가지런히 정리해 두었다. 길 잃은 단장이라도 들어와서 세면도구에 빙의하면 큰일 아닌가. 출근 준비라는 전쟁 속에 칫솔에게 습격당하는 이벤트를 추가할 필요는 없다. 얼마 남지 않은 화장지도 그렇고, 반쯤 찬 쓰레기통도 비우면서 괜히 부산스럽게 굴었다. 한참 배스 솔트를 효과적으로 수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즈음 아래층에서 이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 다 되었어?"


쿵쿵 소리를 내며 층계를 내려가자 벌써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이안이 짐작한 것처럼 리콰이드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는지 부엌과 이어진 다이닝 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중앙에는 레몬을 채워 넣고 통째로 구운 오리, 곁에는 크랜베리와 그레이비 소스, 그 주위로 샐러드와 갓 데운 빵, 으깬 감자, 오일 파스타와 감바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크림 스튜에 끝나고 입가심을 할 과일까지. 식탁은 두 사람이 준비한 음식으로 가득 찼고, 조금 남은 공간마저 장식품과 개인 접시, 그리고 각종 식기가 즐비했다.


"왔군, 앉아라."
"이건 점심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창하지 않아?"
"흠."


이안은 리콰이드가 와인잔을 두 개 들고 오는 것에 맞추어 의자를 뒤로 뺐다.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입맞춤을 받은 리콰이드가 자리를 잡고, 이안이 빈 잔을 채우기까지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 아까우니까 저녁으로 하자."


쨍,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와인잔이 부딪쳤다. 이안은 와인잔 너머로 자신을 흘기는 리콰이드에게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건넸다. 옅게 탄산이 올라오는 음료는 처음엔 달고 끝 맛은 쌉싸름했다. 분명 사과주 말고 사과주스를 마시자고 했는데,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이안이 오리를 해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무슨 일이야?"
"어제?"
"지쳐서 늦게 들어왔잖아. 임무라도 있었어?"
"어제는 서류 작업밖에 없지 않았나. 그렇게 늦은 기억도 없군."


이안이 스튜를 떠서 한입에 냠 물었다. 리콰이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랬나? 체감상 늦었다고 생각했나 봐. 요즘 해가 일찍 지잖아."
"일찍 들어오라는 네 방식의 잔소리인가?"
"그럴 리가."


대여섯 가지의 식기를 예법에 맞게 사용하는 것은 몇 번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체화된 것처럼 능숙하게 각종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오가는 리콰이드와 달리 자신이 없는 이안은 식기를 집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선택이 정답인지 확인하려 흘끔흘끔 리콰이드 쪽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눈치를 보는 꼴이 되었다. 언뜻 마주친 눈은 즐거운 기색을 띄고 있었기에 이안은 연신 사과주만 들이켰다. 이 정도로 취기가 오를 리도 없는데 얼굴이 홧홧했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로 입가심까지 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물론 이안의 예상대로 두 사람이 먹을 양보다 지나치게 많았기에 음식은 남았고, 차갑게 식은 오리는 먹기 좋게 살이 발린 그대로 냉장고 안에 자리 잡았다. 내일 아침에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남은 스튜와 함께 해치우면 딱 좋겠네, 하는 이야기를 싱크대의 물줄기 소리가 덮었다. 세팅은 당신이 했으니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는 이안의 주장은 순순히 받아들여져, 리콰이드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이안은 켜켜이 그릇을 쌓았다.


젖은 머리를 털면서 내려오는 서경을 맞은 것은 거실에 늘어져 있는 이안이었다. 시간은 아직 초저녁이라 사위가 밝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시간. 리콰이드는 짧게 웃으며 이안 옆에 자리 잡았다.


"그것 조금 했다고 지친 건가?"
"플레이팅 한다고 그릇을 너무 많이 썼어... 냄비도 그때그때 닦았어야 했는데."


옆자리에 무게가 실리자 이안은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채 마르지 않은 리콰이드의 머리카락이 맞닿은 그의 웃옷에 물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그런데,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시 본 이안의 눈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리콰이드는 다시 한번 웃음을 흘렸다.


"아하. 들어나 보지. 무엇을 바라나?"


이안은 한참 딴청을 피우며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러나 새침하려고 애쓰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아 마음을 정한 것은 꽤 이전일 것이다.


"입맞춤이라던가?"


키스를 조르는 그의 시선이 리콰이드의 입술을 짚고 넘어갔다. 그것을 놓칠 리가 없는 리콰이드는 조금 더 가까이 기대는 것으로 이 방자함을 눈감아 주기로 했다.


"당돌한데."
"그래서 싫어?"


눈을 도르륵 굴리는 것은 이안이 부끄러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제는 손바닥 읽듯이 반응을 읽게 된 리콰이드가 마주 미소지었다. 그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기 직전 이안의 시선이 정확하게 리콰이드의 눈으로 향했다. 직감적으로 상을 받을 걸 아는 사람의 태도다.


"그럴 리가."


리콰이드가 기대온만큼의 거리를 이안이 좁혔다. 이안의 속눈썹이 나풀나풀 아래로 향하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가 두 사람의 형상에 남색 음영을 남겼다. 느리고 부드러운 것이 꼭 그들이 나누는 입맞춤 같았다. 방금 양치를 하고 나온 건지 리콰이드의 입에서 시원한 박하향이 나서, 이안은 부스스 웃었다.


"역시 칫솔에 단장이 빙의하면 곤란하겠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중얼거리는 이안의 머리를 리콰이드의 손이 꾹 눌렀다. 검은 머리카락이 잠시 가라앉았다가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한 번 더 하자."
"정에 호소하기로 한 건가?"
"한 번으로 안 될 것 같은 걸."
"끝도 없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콰이드는 이안의 짓궂은 웃음을 어느 정도 되돌려 주고 있었다. 이안이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탓에 두 사람의 입술이 장난치듯 몇 번 부딪치다 겹쳐졌다. 앞선 것보다 길고 다급했기에 멀어질 즈음엔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볼에 떠오른 홍조가 석양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안의 시선이 리콰이드에게로 향한다. 오롯이 리콰이드에게로, 그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굴곡과 그림자로, 물기를 먹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고 떨어지는 형태로. 그의 눈이 담고 있는 섬세한 감정과 욕망들, 그것을 둘러싼 방식과 가치들에.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는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본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자신을 가리키기로 선택한 것을 목격한다. 흘러나오는 것은 여과 없이 진실된 감정. 이안은 그것이 언제나 이어지리라는 확신으로 응한다.


의심할 필요도, 그럴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은 완전한 애정. 그것이 못내 좋았기에 행복했다. 더 이상 손을 놓을 필요는 없다. 만일 이상향이 실존한다면 비로소 이곳이겠지. 가장 익숙하고, 가장 친근하고, 가장 편안할 이곳. 시초부터 이안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으니까. 언제라도, 어디까지라도 바라게 될 것은 단 하나니까. 그것만으로 그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오직 리콰이드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진다. 그의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안의 세계는 완전해진다.


완벽한 사랑을 선보이는 리콰이드 앞에서 이안은 무너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평생 바랄 수 있는 것을 평생에 걸쳐 받았다. 그렇게 완전하고 전능한 것 앞에서 어찌 감히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찌 진심으로 날을 세우고 눈물 흘리게 할 수 있을까. 슬픔 한 점 없는 세계에서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안은 받아들인다. 당신 곁의 깊은 바닷속에서 잠들고 싶어. 부재중 전화나 피 묻은 셔츠나 점점 짧아지는 해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가졌으므로 눈치챌 필요조차 없다. 단 하나, 필요한 것은 당신의 애정이고 이 무결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기에.

 


그렇기에 이안은 행복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렇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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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푸딩
2022. 6. 10.

https://youtu.be/2wT88N2OppY

 

 

그 사건은 어느 평온한 날 오전에 발생했다.

 

수호자는 산책이라도 나간 건지 이른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고, 연주가는 한쪽 테이블에서 열이 올라서 노트북을 신나게 두들기고 있었다. 루프를 하지 않은 쪽 이안이 막 씻고 나서 머리를 말리는 옆에서 루프 중 죽은 이안 중 두어 명이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찬란으로 말하자면, 그는 앞마당의 화분에 물을 주고 나서 목이 말라 뭐라도 마실까 고민하며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내리기에는 번거로우니 주스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찬란은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있던 인도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그것을 인도자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검은 바다의 인도자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쁜 의미로 낯설었다. 인도자는 사방에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검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주방에 나락문이라도 깔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잘못 들어온 척 하고 나갈까?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나가기엔 너무 늦었을지도 몰라. 못 본 척 하자. 제일 가까운 것을 아무거나 집어 들고나가는 거야. 팽팽 돌아가는 찬란의 머리를 멈춘 것은 인도자의 한마디였다.

 

“사라졌어.”

“... 네?”

 

냉장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인도자의 행동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찬란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어제 리콰이드를 주려고 만들어둔 푸딩, 사라졌다고.”

 

그제야 찬란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리콰이드에게 대접할 점심 코스를 점검하던 중에 밤새 차갑게 식혀둔 푸딩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도자는 언제나 자신이 맛보는 조금 빼고는 필요 이상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사라진 푸딩을 대신할 여분도 없다는 의미다. 그 인도자가 손수 만든 것이니 정성이 조금 들어간 것도 아닐 테고. 지금 와서 뒤늦게 만들어도 재료부터 준비하려면 한참 걸리겠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누군가 인도자의 코스 요리를 성대하게 망친 것이다.

 

찬란은 우선 인도자를 위로하기 위해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부터 떠올렸다. 당연하지만 몇 없었다. 그래도 찬란은 최선을 다했다.

 

“만드는 데 오래 걸리셨을 텐데… 다른 음식에 가려서 안 보이는 건 아닐까요? 서랍에 있다던가…”

“전부 찾아봤는데 아무 데도 없어. 애초에 눈에 띄는 곳에 뒀으니까.”

“역시 지금이라도 만드는 건 늦겠죠? 급한 대로 시제품을 구해 오는 건…”

“그딴 물건을 입에 대게 하느니 시간 되감기라도 쓰겠어.”

 

인도자라면 여기서도 어떻게든 그 사서의 장서를 뜯어올 것 같았다. 찬란은 우선 그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저트 하나쯤은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하고 넘어가 줄 거에요. 안 만든 것도 아니고 누군가 가져간 걸요.”

“그러니까 어떤 자식이 리콰이드의 푸딩을 훔쳐갔단 말이지? 대체 어느 놈이 그랬을까…”

 

아차, 인도자의 듣고 싶은 대로 곡해해서 듣는 버릇이 발동한 것 같다. 찬란이 어떻게 막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인도자는 시선을 손목시계로 옮겼다.

 

“오래 걸리는 건 미리 손질해 뒀으니까 아직 여유가 있어. 그 사이 푸딩 도둑을 잡아서 토해내게 하던지 해야겠다.”

“에이, 설마 누군가 일부러…”

“...”

“...”

 

찬란은 잠시 인도자에게 불만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곳에 사는 인물 전원이 리스트에 오를 때 즈음 찬란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고개를 들자 인도자가 찬란을 알만하다는 눈빛으로 빤히 보고 있었다.

 

“... 정정할게요. 그렇지만 정말로 잡을 수 있을까요? 푸딩은 먹어버리면 끝이잖아요.”

“완벽 범죄라는 건 없어.”

 

우와, 그거 정말 탐정이나 이야기할법한 소리다. 찬란은 인도자가 정말로 인계에서 뒷세계 탐정으로 활동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업으로 삼았던 만큼 자신이 있다는 걸까.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찬장을 다시 한번 뒤지던 인도자가 찬란을 뒤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야겠다, 꼬맹아.”

“네? 제가요?”

 

찬란은 금세 어리둥절해졌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단 말인가? 있다고 해도 인도자가 훨씬 더 잘할 것 같은데…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도자가 복도에서 지나치는 사람마다 반쯤 투명인간 취급을 하긴 해도 이런 질 나쁜 장난을 치는 것은 잘못되었다. 도울 수 있다면 범인을 잡는 데 거들고 싶었다. 인도자가 씩 웃을 때까지만 해도 찬란은 인도자의 조수로 임명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요! 문이 잠겨 있잖아요!”

“평소 생활패턴을 생각하면 지금쯤 주방에 있어야 하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잖아, 확실히 수상해.”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찾아요!”

“귀찮게 뭐하러. 금방 열린다니까.”

“인도자가 열리게 만드는 거잖아요!”

 

찬란은 현재 복도 한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인도자는 그를 보고 ‘망을 본다’고 할 것이고, 찬란 본인은 ‘인도자를 막는 중’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쨌거나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인도자를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은 맞았다. 그리고 문제의 인도자는 문고리 앞에 몸을 숙이고 자물쇠를 따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찰칵찰칵 소리가 날 때마다 찬란은 한층 다급해졌다. 정말로 열어버릴 거라고! 그때는 꼼짝없이 무단침입 행이다. 제발 아무라도 와주었으면 하고 찬란은 간절히 바랐지만 복도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지 오래다. 차라리 자물쇠라도 오래 버텨주었으면. 그러나 야속하게도 문고리는 인도자의 손에서 부드러운 찰칵 소리와 함께 스르르 패배했다. 찬란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설득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일이 잠긴 방을 열 수도 없잖아요? 문을 따는 데만 시간이 다 가 버릴 거에요.”

 

그러는 와중에도 인도자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안의 방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찬란은 정신을 다잡았다. 이 정도로 포기했다면 애초에 인도자와 어울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명백한 단서부터 추적하는 게 어떨까요? 가령 푸딩이 사라진 시간대라던가…”

 

마침 방에 푸딩의 흔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인도자가 방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문은 자연스럽게 원래대로 잠긴 채였다. 인도자는 완벽 범죄라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가 저지르는 것이야말로 완벽 범죄가 아닐까.

 

“범인이 증언을 한다고 해도 반드시 모순이 있을 거고… 아, 연주가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어제 저녁을 담당했으니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까. 어차피 그 사람 방을 다음으로 수색하려고 했고.”

“...!”

 

드디어 찬란의 간곡한 설득이 빛을 본 것일까. 인도자는 짧게 반응하고 드디어 개인방이 있는 복도에서 걸음을 옮겼다. 찬란이 그를 놓칠세라 뒤따랐다.






두 사람은 수영장 근처에서 연주가를 발견했다. 연주가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목욕 오리를 수영장에 띄우고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리콰이드를 태울 생각은 아니겠지? 연주가는 로맨틱함에 대해 다소 독특한 해석을 하는 것 같았으니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찬란은 조만간 수영장 근처에서 소란이 일겠거니 생각했다.

 

인도자는 목욕오리를 본체만체하고 연주가에게 다가갔다. 마침 첨벙, 하고 수면이 일렁이며 목욕 오리가 넓은 수영장 위를 부유했다. 연주가는 두 사람을 눈치챘는지 몸을 돌렸다.

 

“어때? 대단히 크지?”

“어제 식사 준비할 때 냉장고에 푸딩 본 적 있어?”

 

인도자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평소라면 한두 마디는 받아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연주가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응, 아마 두 번째 칸이랑 세번째 칸에 있었지? 두번째 칸에 있던 게 고이 모셔져 있길래 네 것인가 했어. 나머지는 루프를 안한 쪽 이안 물건일 걸? 아, 그런데 어제 꺼내야 하는 식재료가 좀 많아서 두번째 칸에 있는 걸 내렸거든. 위치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흐음…”

“그런데 푸딩은 왜?”

 

연주가는 인도자와 찬란이라는 특이한 조합을 신기한 눈으로 훑어봤다. 거대 목욕 오리를  반짝이는 눈으로 곁눈질하고 있던 찬란이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인도자가 준비한 푸딩이 사라져서요, 범인을 찾고 있어요.”

“이야, 그거 열받았겠는데. 찬란은 조수 역할?”

“네… 아마도요?”

 

연주가가 익숙하다는 듯이 대하는 걸 보니 전에도 조수를 끌고 다녔던 걸까. 운이 나쁘게, 혹은 운이 좋게 찬란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찬란은 조금 신이 나서 인도자를 채근했다.

 

“새로 단서가 나왔네요. 루프를 안 한 쪽한테 찾아가 봐요.”

“... 그래. 섣불리 확신하는 건 좋지 않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도자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연주가가 바삐 걸어가는 둘을 향해 손을 흔들어줄 때도, 찾고자 하는 이안이 바닥에 누워 소파에 다리만 얹은 채로 뜨개질을 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도 찬란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인도자는 연주가를 의심하고 있는 걸까? 눈앞의 이안은 시야 한편에 거꾸로 된 인도자와 찬란을 발견했는지 금세 똑바로 앉았다. 바닥에 누워 부스스해진 머리가 붕 떴다.

 

“미안, 뜨개질할 때는 이 자세가 습관이 되어서. 무슨 일이야?”

 

찬란의 시선이 한 가닥 한 가닥 선명한 머리카락으로 향하는 와중 인도자는 본래의 용건을 잊지 않았다.

 

“어제 냉장고에 네 푸딩을 넣어 뒀다면서?”

“맞아, 그랬지. 네가 만드는 거 보니까 나도 하나 먹고 싶어져서. 그런데 어제 밤늦게 수호자가 배고파하길래 먹으라고 했거든. 오늘 아침에 보니까 녀석이 안 먹은 건지 그대로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냥 먹었지.”

“아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갑자기 웬 취조야?”

 

그 말에는 찬란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인도자의 푸딩이 도둑맞았거든요!”

“그거 큰일이네. 얼마나 맛있을지 짐작도 안 가는데, 군침 흘리는 사람들이 많겠어.”

“쓸데없는 관심이지.”

“그런데 뭘 만드시는 거에요?”

“이거? 뜨개인형인데, 봐봐. 리콰이드 닮았지.”

 

찬란은 리콰이드가 흰 오목눈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짚어 주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옆에서 인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네.”

“그렇지? 다 만들면 선물해주려고. 좋아할 것 같아.”

 

찬란은 여기에 머무는 대부분의 리콰이드와 이안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심지어 자주 망각하지만 옆에 있는 인도자조차 생전에는 부부관계라고 했었다. 그렇구나. 귀여운 거구나. 찬란은 무례하지 않도록 두 사람에 동조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뜨개인형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다음으로 찾아가야 할 사람은 수호자다. 오늘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는데 멀리 산책이라도 나간 걸까?

 

“그럼 범인을 잡으러 가 볼까.”

 

인도자는 어쩐지 한층 스산해진 분위기였다. 찬란은 길가면서 부딪치는 사람이라도 없기를 조용히 바라며 수색에 나섰다.

 


 

두 사람이 수호자가 저택 안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즈음 때마침 수호자가 긴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다. 한바탕 뛰고 난 건지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에 맺힌 땀을 수건으로 연신 닦느라 바빠 보였다. 인도자와 찬란은 곧장 주방으로 향하는 수호자를 붙잡았다.

 

“푸딩, 네가 먹었지.”

“으엥? 어젯밤에 먹긴 했는데… 그거 진짜 맛있었지. 갑자기 왜?”

“그때 냉장고에 푸딩은 두 개였어. 하나는 내가 만든 것, 다른 하나는 네가 허락을 받은 녀석 것.”

“응, 그래서 말하고 먹었는데 설마…

 

인도자는 수호자를 지긋이 바라봤다. 순식간에 수호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먹은 거야? 어쩐지 기가 막히더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니만……”

“...”

“정말 맛있었는데… 입에서 사르르 녹았는데…”

“...”

“생크림이 잘 어울렸는데… 커스터드의 노른자도 진했고… 바닐라빈 향이 환상적이었어…”

“......”

“... 미안, 어떻게 사죄하는 게 좋을까.”

“지금 당장 토해 내고 시간되감기를 쓸 거야.”

“인도자! 사람을 공격하면 안 돼요!”

 

그렇게 냉장고 둘째 칸 푸딩실종사건이 정리되는 것은 범인을 찾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찬란은 수호자의 배를 가르려는 인도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고, 오랜 실랑이 끝에 둘은 수호자가 요리를 돕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그것만 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좋은 마무리다. 찬란은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가 정말로 원했던 시원한 주스 한잔을 들이켰을 때, 거실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리콰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님이 나오셨나 보다. 오늘은 오전에 있었던 이 작은 소동을 전해줘야지. 뒤돌아 나서는 찬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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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5. 19.

“이안! 네 이름 앞으로 택배 왔다!”

“지금 가요!”

 

평일 이른 아침. 어느 집마다 분주한 풍경은 비슷하겠지. 유런은 다시 한번 아들을 재촉하고는 반쯤 빈 잔에 다시 커피를 따랐다. 더 지체하다가는 음식이 식는 건 고사하고 학교에 지각할 텐데, 허둥지둥하는 건 본래 이안답지 않다. 아침에 운동을 나갔다 온 건 확실한데… 그 사이에 어디다 정신이 팔린 건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덮을 만한 소음이 위층에서 들려오자 유런은 아예 혀를 찼다. 유난히 큰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이안이 계단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 즈음이었다.

 

“지금 몇 시에요?”

“일곱 시 반. 택배는 내가 방으로 올려 둘 테니까 아침부터 먹고 가.”

“앗, 아니에요! 제가 지금..!”

 

유런은 교복 블레이저를 반쯤 입은 아들이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내려와서는 손바닥만 한 택배 상자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조심스레 방으로 가져가는 것을 커피잔 너머로 지켜봤다. 이안은 잠시 택배를 뜯는 건지 조용해지더니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로 책가방을 달고 내려왔다. 또 뭐가 그렇게 뿌듯한 건지. 이안은 들뜬 기색으로 아침상 앞에 앉았다. 아슬아슬하게 온기를 잃지 않은 토스트가 바삭했다.

 

“중요한 물건인가 봐?”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부정할 거라면 토스트를 베어 물 때마다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떻게라도 해 보지, 표정관리도 안 되는 통에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유런은 속으로 혀를 차며 이안 쪽으로 오렌지 주스를 밀어줬다.

 

“어제 늦게 들어왔던데.”

“그건 일…이 아니라, 친구네 집에서 과제를 하다가…”

“그래? 내가 아는 친구야?”

“음… 아마 모를 거에요. 새로 사귄 애라서.”

“흐음…”

 

이안은 유런의 눈초리를 열심히 모른 척하며 야무지게도 잼을 발랐다. 그 레퍼토리만 몇 번째 쓰는 거지. 몰래 놀러 나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유런은 이안이 들었으면 강력하게 항의할 생각을 속으로만 숨겨두었다. 그 와중에 이안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운을 뗐다.

 

“오늘,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어서 늦을 것 같은데...”

“저녁 늦게?”

“네, 대회가 곧이잖아요. 강호는 아니어도 다들 열심이에요.”

“얼마나 늦는데?”

“... 열한 시?”

“.....”

 

유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세상 어느 학교 오케스트라가 밤 열한 시까지 연습을 하느냔 말이다. 아무렴, 여섯 시까지는 하겠지. 저녁을 먹고 그 뒤로 어디로 빠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열 시 까지 데이트를 하고 바래다 주면 분명 집에 돌아오는 건 열한시 내외 즈음이 될 거고. 딱 맞아떨어지는 계산이 낯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들을 양육하는 도중 이런 어려움에 봉착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차라리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정식으로 이야기라도 해 주면 좋을 것을, 언제까지 숨길 생각인 건지. 얼빠진 얼굴을 하느라 이미 온 사방에 소문났다는 걸 아는지는 모르겠다. 유런은 제 앞에서 아직도 눈치를 보고 있는 이안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저녁 먹고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 둘게. 저녁 부실하게 먹지 말고 더 늦으면 연락해.”

“그럴게요!”

 

대답이나 못하면. 이안은 금세 얼굴이 밝아져서는 주섬주섬 책가방이며 겉옷을 챙긴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들려오는 인사와 함께 대답도 듣지 않고 뛰어나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유런은 드디어 소리 내서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수상한 외출은 애당초 작년부터 이어지고 있었지만, 근래 와서 늦은 밤까지 외출에, 갑작스러운 외박에… 사생활에 참견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부모로서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본래 성격 탓에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금방 소개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지. 그래도 학교도 안 가겠다며 방안에 꽁꽁 틀어박히던 작년보다는 훨씬 나으니 말을 얹지는 않겠지만… 부모인 자신이 나서서 캐묻는다면 대답이야 듣더라도 해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 일일이 단속한다고 해도 저 나이대 애들은, 특히 이안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아이라는 걸 유런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련히 잘 알아서 하려니 믿고 존중해줄 수밖에 없나. 정말, 쟤가 언제 저렇게 커버렸담. 유런은 가볍게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해?”

“아!”

 

이안은 재빨리 들여다보고 있던 가방을 덮고 뒤를 돌았다. 벌써 수업이 끝났는지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수롭지도 않게 이안의 어깨를 툭 친 에이미는 팔짱을 껴고 이안을 내려다봤다.

 

“수업 끝났어?”

“한참 전에. 그래서 뭐 보고 있었어? 한참 전부터 불렀는데 대답이 없던데.”

“아, 이건… 별 거 아니야.”

“별 게 아닌데 이름 부르는 것도 못 들을 정도로 빠져 있던 거야?”

“미안… 지금 점심시간이지? 오늘 뭐 나온대?”

 

에이미는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는 이안의 태도에 슬쩍 눈을 굴렸다.

 

“무슨 파스타였나… 특별한 건 없는데. 애들이 자리 잡아뒀을 거야.”

“기다리고 있겠네. 빨리 가야겠다.”

 

이안은 그 말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벌떡 일어섰다. 에이미가 무어라 말을 얹기도 전에 재빠른 태도로 가방 지퍼를 닫은 것은 덤이었다. 티가 안 나려고 해도 날 수밖에 없는걸. 에이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카페테리아에 자리 잡았는지 복도는 한산했지만 가끔 둘을 지나쳐 바삐 움직이는 몇몇이 보였다.

 

“요새 점심시간에 공부하는 애들도 많네.”

“그러게, 슬슬 A레벨 시험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너는 준비 잘 되어가?”

“나는 뭐…”

 

어색하게 웃어넘기는 이안을 보고 에이미가 눈을 가늘였다.

 

“튜터도 붙이고선 한참 바쁘다더니, 공부도 아니면 도통 뭘로 바쁜 거야?”

“그건 한참 전에 잠깐이었잖아! 그냥 스터디 좀 하는 거야. 클럽 활동도 있고”

“대회가 요 앞이었던가… 그런데 스터디는 누구랑 하는 거야?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 말하는 걸 잊어버렸나 봐. 아, 저기 올리버 지나간다.”

 

갑자기 얼굴이 밝아져서 지나가던 학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안을 에이미가 못 말린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말하는 걸 잊어버린다고, 천하의 이안 허드슨이? 말하면 안 될 이유가 있어서 말을 삼갔으면 삼갔지, 새로 시작할 정도로 관심이 있으면서 주위 친구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다니. 적어도 에이미가 이안을 지켜본 10년 남짓한 역사에 비추어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다. 안 그래도 몇 달 새 들어서 갑자기 방과 후에 바쁘다면서 쌩하니 사라진다던가, 놀자고 하는 제안에도 선약이 있다고 거절하는 일이 부쩍 늘었더니만… 평소처럼 무언가를 열띠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야기를 뚝 끊고 입을 닫아버리는 것도 그렇고. 마치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극비라도 있는 것처럼 구는 모양새다.  에이미는 인사를 마치고 무해한 얼굴로 돌아서는 이안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그래서 저번에 추천해줬던 가게는 잘 갔어?”

“응, 딸기 트라이플이 정말 맛있더라고. 같이 간 동행인도 맛있다고 했어. 알려줘서 고마워.”

 

동행인이란 말이지. 에이미는 그래서 동행인이 누군데, 하는 질문을 꾹 눌러 담고는 별말씀을, 하고 웃었다. 이안이 이유 없이 비밀로 할 사람도 아닐뿐더러 단순히 물어봤다고 알려줄 정도였으면 애초에 비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중요한 소식을 노골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 눈감아 주는 걸로 할까. 십 년 동안 봐왔으니 그 정도로 심하게 서운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말해도 된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이골이 날 때까지 이야기를 해댈 테니, 지금은 천천히 기다려줘야겠다. 카페테리아의 소음이 또 다른 가게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덮으며 에이미는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했다.

 


 

“해서, 생각나서 사 봤는데…”

 

눈썹을 올리는 리콰이드 옆에 앉은 이안이 쭈뼛거렸다. 저물어가는 해가 창 밖에서 하늘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와중 콧날이며 뺨의 튀어나온 부분에 선홍빛이 비쳤고, 그런 빛을 받아 이안의 푸른 눈에도 묘한 자주색이 감돌았다. 이안은 교복 타이를 만지작거렸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이리로 온 탓에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는데 괜히 신경 쓰인다. 소파에 앉은 둘 앞에 놓인 탁자에는 이안이 하루 내내 애지중지 하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만년필?”

“이런 것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당신이 본래 쓰는 것에는 못 미치겠지만…”

 

평가를 받는 아이처럼 숨 죽이고 기다렸다가 리콰이드의 얼굴에 슬쩍 닿는 눈길이 한 번, 이안은 잠자코 있기보다는 언제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아이였기에 눈길 하나에도 자연스레 의미가 담긴다.

 

“지난번에 당신이 반지를 선물해 줬잖아. 그러니까 답례는 아니더라도 나도 뭔가 선물하고 싶었어.”

 

입에 올리려니 공연히 낯이 뜨거워진다. 진심을 전달하는 건 몇 번이고 한다고 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지도, 능숙하게 전할 수 있는 요령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이 마음이 방향계의 침처럼 첨예하게 당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이 감춰졌다가 다시 당신에게로 향하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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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jLnvXpkq68

스승의 날(5/15) 기념 로그←이게 무슨 로그지

 

 

“여기서 뭐해?”

 

파란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아침,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에 앉아 있던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엇비슷한 얼굴을 한 정처 없는 바다의 연주가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꽃밭 구경이요. 어젯밤 비가 왔나 봐요. 연주가도 구경 나온 거에요?”

“비슷하지. 근데 아침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쌀쌀하다. 안 추워?”

“괜찮아요.”

 

그 말대로 봄이라고 해도 간밤에 비가 내렸던 탓인지 바람의 온도가 한결 낮았다. 연주가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주위를 바라보듯 하더니 다시 으스스 떨며 팔짱을 꼈다. 찬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조금 독특한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의 일에도 곧잘 참견한다 해도 연주가는 이 공간에서 가장 대하기 편안한 사람 중 하나였다. 조금 독특한 옷을 입는다고 해도 말이지. 찬란은 연주가가 입고 있는 종달새 무늬 셔츠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연주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번씩 웃어 준 다음 어깨를 으슥하며 찬란의 옆에 털썩 앉았다.

 

“여기는 빗물이 안 튀어서 다행이다. 아침은 먹고 나온 거야? 당번인 애들도 아직 안 돌아다니던데. 끼니 거르는 건 건강에 안 좋아.”

“알아요, 그런데 오늘은 좀 바쁠 것 같아서…”

 

연주가는 줄곧 찬란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따라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방금 싹을 틔운 식물이었다.

 

“저거 구경하고 있는 거야?”

“정확히는 마력으로 생장시키고 있는 거지만요.”

“무슨 식물인데? 새로 필요한 재료라도 있어?”

 

연주가는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이 반추의 사허의 ‘병증’에 대해 어떻게 관여되어있는지 알았기에 그의 사고는 자연히 그런 쪽으로 흘렀고, 그 말을 알아들은 찬란 또한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약물로 치료해보려는 시도는… 포기한 것 아시잖아요.”

 

찬란의 대답은 반쯤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연주가 또한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너를 더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연주가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연주가는 선한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지만, 동시에 그는 찬란 자신만을 위해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과 얽혀 있고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 탓이다. 찬란은 그런 사실을 상기하면서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연주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로서는 이곳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옳겠지. 그렇게 타협하게 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면 묘한 감정이 든다. 그런 그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나무라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찬란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다.

 

“계속 찾다 보면 방법이 있을 거에요. 그전까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요.”

 

연주가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다. 자신의 입으로 말해도 위화감이 없을 발언. 새삼스럽게 같은 본질에서 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연주가는 더더욱 찬란을 도울 수 없다. 이것은 어찌 보면 반추의 사허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주민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사항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찬란이 깨어나도록 만든 첫 번째 이안의 선택이기도 하고. 연주가는 첫 번째 이안이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선택했을지, 어떤 것을 바라고 자신의 기억을 지웠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리콰이드에게 실연당하는 건 꽤 흔하니까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연주가는 콧등을 가볍게 긁었다. 그랬기에 연주가는 첫 번째 이안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무구한 얼굴로 자신 옆에 앉은 찬란의 의지에 반할지라도.

 

“그래, 포기하지 마. 계속 달려 나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걸 얻을 수도 있는 법이잖아.”

 

결국 연주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 주지 않으면서 응원하는 것처럼 기만도 없지만, 연주가는 마음 한편 진심으로 찬란이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아마 이곳의 모든 이안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의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아, 검은 바다의 인도자 정도는 빼고. 연주가는 머릿속 리스트에서 인도자를 빨간 줄로 찍찍 그었다.

 

높은 확률로 찬란은 이번 시간에서 사허의 광증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왜 생겨났는지,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지도 모르는데 치료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열쇠를 쥐고 있는 자는 모두 침묵하고 있다. 반추의 사허도, 검은 바다의 인도자도, 정처 없는 바다의 연주가인 자신도. 치료의 가능성이라도 쥐고 있는 첫 번째 이안은 스스로 무의식에 저편에 묻히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애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 한 명.

 

그런 결과를 짐작하고 있기에 연주가는 차라리 찬란이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 아무런 의심이나 근심 걱정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를 위할 수 있는 시간. 그것은 이곳에 머무는 이안들에게는 드물기 짝이 없는 귀중한 순간이다. 사허가 찬란을 바라보는 눈길은 명백한 온기를 담고 있다.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찬란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사허가 찬란이 바라는 방식의 애정을 줄 수 없더라도 그것이 애정임은 명백했다.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고,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연주가는 이 유예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설령 꿈에서 깬 다음이라도 그것이 좋은 꿈이었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란은 계속해서 싹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식물은 이제 싹이라는 태를 벗고 줄기와 이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연주가는 차즘 이 식물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거 혹시…”

“맞아요. 오늘 날이 날이기도 하고요. 소멸하기 전에는 꼬박꼬박 챙겨 드렸거든요.”

“좋은 제자네.”

 

찬란이 풋 하고 웃었다.

 

“그거 자화자찬인가요?”

“나는 아니야. 리콰이드에게는 좋은 제자였던 적은 없어서.”

“정말요?”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지.”

 

그 말에 찬란이 다시 한번 소리 내서 웃는다. 연주가는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계단에서 일어섰다.

 

“이만 당번 애들 잡으러 가 봐야겠다. 늦잠이라도 자는지 몰라. 아침 먹으러 올 거야?”

“아뇨,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종일 이걸 지켜보려고요.”

“안 먹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너무 몰두하지는 마. 가끔 스트레칭도 하고.”

 

일어선 연주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가일 무늬 담요를 찬란의 어깨 위에 두른다. 찬란이 의아한 듯이 돌아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춥잖아. 마법사라도 소홀히 하면 병마라도 걸린다.”

“... 네.”

 

담요의 끝자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찬란 뒤에서 연주가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닫는다. 결국 자신의 몫은 이 정도라는 거겠지. 연주가 또한 인생은 결국 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지금의 찬란은 명백히 고립되어 있다. 그런 존재를 홀로 두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손을 뻗으려 들다가도 무심코 그의 선택이 떠올라 거리감을 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리콰이드 두 사람의 이야기이니 괜한 참견은 말라는 무언의 경고. 그리하여 연주가는, 첫 번째 이안을 존중하기 위해 찬란에게 부채감을 쌓는다.


연주가가 떠나간 다음 한참 동안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저택의 수많은 문들 중에서도 뒷문에 해당했고, 저택 앞의 정원 쪽에서 사람들이 떠들고 노는 소리가 새들의 지저귐처럼 들려오기는 했어도 발걸음이 닿는 일은 없었다. 찬란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화초를 구경했다. 어느새 줄기가 굵어지고 이파리가 짙은 녹색을 띄웠다. 이대로라면 저녁 즈음에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찬란을 깨운 것은 눈앞에 굴러온 공이었다.

 

“아, 그거 이쪽으로 밀어줄 수 있어?”

 

멀지 않은 거리에서 머리가 땀으로 젖은 이안이 이마를 손등으로 닦고 있었다. 찬란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공을 데구루루 굴렸다. 이건 어디의 ‘자신’일까. 연주가처럼 독특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수호자처럼 눈이 특이하지도 않고, 인도자처럼 안대를 한 것도 아니었다. 대공인 리콰이드와 함께 온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루프를 하지 않은 쪽은 자신의 리콰이드와 잘 떨어지려 하지 않을 테니 가능성이 낮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루프를 한 쪽의 이안일 텐데, 그거야말로 일이 복잡해진다. 우선 찬란은 가볍게 목례를 해 뒀다.

 

“아, 신경 쓰지 마. 내 쪽은 워낙 많아서 일일이 구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조금 어색하겠지만 그냥 이안이라고 불러.”

“네…”

 

‘이안’이 공을 주워 와서는 자신의 옆에 앉을 때까지 찬란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고,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을 몇 번 식사 테이블 너머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그는 그럭저럭 식물 돌보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식사에도 없더니 이런 데서 있던 거야? 아, 이건 분명히 연주가가 주고 간 거지. 이런 옷 가지고 있는 사람 연주가밖에 없다니까.”

 

말이 물 흐르듯이 나온다. 흥미가 돋았다는 의미다. 영락없는 자신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틔우고 싶어서요. 씨앗을 구하는 게 어려워서, 뒤늦게 심는 바람에…”

“마법사들은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신기하다, 나도 구경하게 해 줘.”

 

이안은 고개를 뻗어서 생장하고 있는 화초를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력을 머금은 뿌리가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게 물을 빨아들였고, 줄기를 타고 올라 이파리 구석구석까지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왜 키우는 거야? 급하게 쓸 데가 있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던지.”

 

멍하니 식물에 집중하던 찬란은 정곡이 찔린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본 이안이 작게 웃었다.

 

“맞나 보네. 리콰이드에게라도 주고 싶은 거야? 그러고 보니 사제관계라고 했지.”

“.... 맞아요.”

 

더 이상 피할 곳도, 피할 이유도 없다고 느낀 찬란이 우물우물 인정했다. 이안은 그 사실에 더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쩐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찬란은 더듬더듬 두어 마디를 더 붙였다.

 

“단순히 스승이어서 드리는 건 아니에요.”

“그럼 스승 이상으로서 주는 거다?”

 

대체 이 사람은! 찬란은 귀까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소리를 내서 웃고 있던 이안은 그 뾰족한 시선에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 심하게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 정성이 담긴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에 찬란은 겨우 다시 시선을 화초에게 고정하고는 무릎을 양 팔로 껴안았다. 도움은커녕 놀리려고만 온 걸까? 그런 찬란을 지켜보다가 이안은 말을 이었다.

 

“스스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준 거지? 그렇다면 좋은 거라고 생각해. 너에게도, 네 리콰이드에게도.”

 

이 사람은 자신이 리콰이드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알고 있을까?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어 고개를 돌리려던 찬란의 머리를 이안의 손이 덮었다.

 

“순간순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해. 그래야 후회가 없거든. 나중에 배신당했다는 걸 깨달아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모두 허사였다는 것을 깨달아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니까 믿어도 돼.”

 

한 칸 위에 앉아서 살짝 올려다본 이안의 표정은 후련함에 차 있었고, 그의 시선은 멀리 향해 있었다. 손에 눌린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탓에 찬란은 눈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보아야만 했다.

 

“전부 거짓이었어도 괜찮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사랑한다고 말해. 결과가 아무리 무서워도 네 마음을 억누르지 마. 그건 무시한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안은 먼 곳에서 시선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찬란과 눈을 마주쳤다.

 

“진심을 다해. 그는 그것보다 못한 것으로는 모실 수 없는, 네게 귀한 사람이잖아.”

 

그리고 휘어지는 눈매에는 찬란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안은 그 시선을 깨고 무릎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자, 이제 더 이상 농땡이를 피웠다가는 공을 만들어 왔냐는 소리를 들을 거야. 대화 즐거웠어. 꽃이 피면 나중에 한 번 보여줘.”

 

다급한 기분이 된 찬란은 발걸음을 떼려는 이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품 안에서 공을 몇 번 휘리릭 돌리던 이안은 찬란의 눈을 마주치고 여유롭게 웃었다.

 

“열여섯 번째 애를 찾는다고 말하면 알 거야.”


‘열여섯 번째’ 이안이 지나간 뒤로도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걸렸다가 그림자와 함께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짙은 녹빛의 나뭇잎 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새어 들어와 찬란을 비추었다. 예쁜 풍경이네, 스승님도 같이 봤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는 찬란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찬란은 올려다본 시야 속에서 그가 검은 바다의 인도자라는 것을 분간해낼 수 있었다.

 

“우리 애물단지가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인도자의 웃음은 다른 이안들의 것과 조금 달랐다. 적어도 찬란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부드러운 온정과 상대를 위하는 시선으로 마무리되곤 하는 이안들의 미소는 인도자의 비틀린 웃음과 궤를 달리 했다. 언제나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차가움은 때때로 타인을 향하거나 인도자 본인에게 향하곤 했고, 찬란은 그의 호의를 받으면서도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인도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다지 괘념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찬란은 그의 앞에서 다른 이안들 앞과는 다른 조심성을 갖추는 법을 익혔다. 그는 예의 바르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띄었다.

 

“네, 화초를 돌보느라요.”

 

인도자는 그제야 자신이 가로막고 있던 화초를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보곤 옆으로 비켰다. 찬란은 꾸준히 마력을 공급하면서 인도자의 눈치를 살폈다. 인도자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오늘이 그날이던가?”

 

아무렴, 이제 봉오리도 다 맺혀서 제법 태가 났다. 인도자가 한눈에 종류를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5월이니까요. 금방이죠.”

 

찬란은 스스로가 제법 처량하게 느껴졌고, 기분을 감추기 위해 태연한 척 어깨를 으슥였다. 인도자는 그런 것도 다 꿰뚫어 본다는 듯이 팔짱을 껴고 찬란과 화초를 느긋하게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입에 알 만하다는 웃음이 걸렸다.

 

“좋은 제자네.”

“그런 거 아니에요.”

 

바로 몇 시간 전 연주가가 똑같은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은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자는 날 선 대답에서 체념을 발견하고는 작게 웃으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거 아니야?”

“.....”

 

은근하게 묻는 질문에 찬란은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인도자가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도리어 호의에 가까운 것을 알지만 때때로 거북한 것은 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스승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해도…

 

찬란은 인도자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몇백 년동안 감추어오던 비밀을 태연하게 꺼내서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조언을 건네줬지. 절대, 절대로 스승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말라고. 찬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똑바로 뜨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

 

한 방 먹은 건지, 인도자의 눈에 유쾌함이 어렸다. 그는 몇 번 확인하듯이 찬란을 훑어보고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야 내가 걱정할 일은 없겠네. 꽃이 예쁘게 피겠어. 줄곧 정성 들였으니 말이야.”

 

그 말 대로 꽃망울은 이제 터지기 직전이었다. 만개한다면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찬란은 일어서려는 인도자를 잡아 세웠다.

 

“꽃, 보고 가실래요?”

 

인도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꽃들이 하나둘씩 개화하기 시작했다.

 

파란, 새파란 카네이션들이 툭 툭 피어났다. 겹겹이 흐드러진 섬세한 꽃잎을 푸르름이 가득 메웠고, 꽃잎이 접힌 곳으로 짙은 파랑이 번져나갔다. 진녹색의 꽃망울에서 태어난 파란 꽃송이들이 연이어 만개했다. 그 오랜 시간,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꽃망울이 터질 때마다 줄기가 흔들렸고, 그것은 바람 없는 곳에서 파도 같은 춤사위를 자아냈다.

 

찬란이 마지막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동안 인도자는 화려하게 핀 꽃무리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인도자에게서 말이 없자 찬란은 뿌듯한 기분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예쁘죠? 제가 가꾼 거에요.”

 

인도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찬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찬란은 온 힘을 다해 증명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손목에 묶인 검은 리본이 저녁 바람에 휘날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이것은 그의 증명이었으므로, 이것은 그의…

 

“행복이래요, 꽃말이.”

“... 그렇구나.”

 

찬란의 눈은 잎맥을 따라 흘러내리는 이슬과 연약한 꽃잎 사이사이로 배어드는 반짝임을 비추고 있었다. 인도자는 대양처럼 푸르른 그 두 눈에 햇살이 깃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저는 제 행복을 찾아낼 거에요.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가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낼 거에요. 그리고 스승님의 행복은 곧 제 행복이니까,”

 

찬란이 잠시 숨을 골랐다.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이라고 했지. 검은 바다의 인도자는 문득 그 이름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는 스승님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에요.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달려 나갈 거에요. 이만하면 되었지, 하고 타협하지도 않고 자기만족으로 선행을 베풀고 혼자 두지도 않을 거에요. 같이 행복해질 거에요. 언젠가, 꼭 스승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어요.”

 

황혼의 햇빛이 찬란의 검은 머리카락을 빛으로 머금고 그림자가 무성한 수풀에는 주홍빛 온기만을 남겼다. 인도자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찬란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가볍게 흔들어 줬다.

 

“그래,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멀리서는 두 사람을 찾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눈앞에는 끝없는 정원만이 펼쳐진 가운데 찬란한 것은 고작 풀 한 포기. 숨결이란 말은 이런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어, 사허. 지나치게 짧고, 따뜻하고, 그렇기에 눈이 부신 것이다. 불쌍하기도 하지, 너는 이런 존재를 사랑했구나.


빛을 머금은 문이 열리고 반추의 사허가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에게 무언가를 고하고 있을 때, 검은 바다의 인도자는 문득 문 안에서 어떤 것이 흩날리는 것을 눈치챘다. 길 잃은 바람에 문 틈 사이로 무언가가 날라들어왔고, 그것을 지나쳐 찬란한 숨결은 빛 속으로 화했다. 허공을 떠도는 것을 잡아든 인도자는 반추의 사허가 찬란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시선에 담았다. 잡아챈 푸른 카네이션은 품 안에 소중히 담아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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