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
스승의 날(5/15) 기념 로그←이게 무슨 로그지
“여기서 뭐해?”
파란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아침,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에 앉아 있던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엇비슷한 얼굴을 한 정처 없는 바다의 연주가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꽃밭 구경이요. 어젯밤 비가 왔나 봐요. 연주가도 구경 나온 거에요?”
“비슷하지. 근데 아침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쌀쌀하다. 안 추워?”
“괜찮아요.”
그 말대로 봄이라고 해도 간밤에 비가 내렸던 탓인지 바람의 온도가 한결 낮았다. 연주가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주위를 바라보듯 하더니 다시 으스스 떨며 팔짱을 꼈다. 찬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조금 독특한 옷을 입고, 다른 사람의 일에도 곧잘 참견한다 해도 연주가는 이 공간에서 가장 대하기 편안한 사람 중 하나였다. 조금 독특한 옷을 입는다고 해도 말이지. 찬란은 연주가가 입고 있는 종달새 무늬 셔츠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연주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번씩 웃어 준 다음 어깨를 으슥하며 찬란의 옆에 털썩 앉았다.
“여기는 빗물이 안 튀어서 다행이다. 아침은 먹고 나온 거야? 당번인 애들도 아직 안 돌아다니던데. 끼니 거르는 건 건강에 안 좋아.”
“알아요, 그런데 오늘은 좀 바쁠 것 같아서…”
연주가는 줄곧 찬란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따라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방금 싹을 틔운 식물이었다.
“저거 구경하고 있는 거야?”
“정확히는 마력으로 생장시키고 있는 거지만요.”
“무슨 식물인데? 새로 필요한 재료라도 있어?”
연주가는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이 반추의 사허의 ‘병증’에 대해 어떻게 관여되어있는지 알았기에 그의 사고는 자연히 그런 쪽으로 흘렀고, 그 말을 알아들은 찬란 또한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약물로 치료해보려는 시도는… 포기한 것 아시잖아요.”
찬란의 대답은 반쯤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연주가 또한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너를 더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연주가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연주가는 선한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지만, 동시에 그는 찬란 자신만을 위해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과 얽혀 있고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 탓이다. 찬란은 그런 사실을 상기하면서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연주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로서는 이곳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옳겠지. 그렇게 타협하게 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면 묘한 감정이 든다. 그런 그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나무라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찬란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다.
“계속 찾다 보면 방법이 있을 거에요. 그전까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요.”
연주가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다. 자신의 입으로 말해도 위화감이 없을 발언. 새삼스럽게 같은 본질에서 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연주가는 더더욱 찬란을 도울 수 없다. 이것은 어찌 보면 반추의 사허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주민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사항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한 찬란이 깨어나도록 만든 첫 번째 이안의 선택이기도 하고. 연주가는 첫 번째 이안이 어떤 심정으로 그것을 선택했을지, 어떤 것을 바라고 자신의 기억을 지웠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리콰이드에게 실연당하는 건 꽤 흔하니까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연주가는 콧등을 가볍게 긁었다. 그랬기에 연주가는 첫 번째 이안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 무구한 얼굴로 자신 옆에 앉은 찬란의 의지에 반할지라도.
“그래, 포기하지 마. 계속 달려 나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걸 얻을 수도 있는 법이잖아.”
결국 연주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 주지 않으면서 응원하는 것처럼 기만도 없지만, 연주가는 마음 한편 진심으로 찬란이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아마 이곳의 모든 이안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의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아, 검은 바다의 인도자 정도는 빼고. 연주가는 머릿속 리스트에서 인도자를 빨간 줄로 찍찍 그었다.
높은 확률로 찬란은 이번 시간에서 사허의 광증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왜 생겨났는지,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지도 모르는데 치료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열쇠를 쥐고 있는 자는 모두 침묵하고 있다. 반추의 사허도, 검은 바다의 인도자도, 정처 없는 바다의 연주가인 자신도. 치료의 가능성이라도 쥐고 있는 첫 번째 이안은 스스로 무의식에 저편에 묻히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애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 한 명.
그런 결과를 짐작하고 있기에 연주가는 차라리 찬란이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면 한다. 아무런 의심이나 근심 걱정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는 이를 위할 수 있는 시간. 그것은 이곳에 머무는 이안들에게는 드물기 짝이 없는 귀중한 순간이다. 사허가 찬란을 바라보는 눈길은 명백한 온기를 담고 있다.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찬란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사허가 찬란이 바라는 방식의 애정을 줄 수 없더라도 그것이 애정임은 명백했다.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고,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연주가는 이 유예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설령 꿈에서 깬 다음이라도 그것이 좋은 꿈이었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찬란은 계속해서 싹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식물은 이제 싹이라는 태를 벗고 줄기와 이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연주가는 차즘 이 식물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이거 혹시…”
“맞아요. 오늘 날이 날이기도 하고요. 소멸하기 전에는 꼬박꼬박 챙겨 드렸거든요.”
“좋은 제자네.”
찬란이 풋 하고 웃었다.
“그거 자화자찬인가요?”
“나는 아니야. 리콰이드에게는 좋은 제자였던 적은 없어서.”
“정말요?”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지.”
그 말에 찬란이 다시 한번 소리 내서 웃는다. 연주가는 읏차, 하는 소리를 내며 계단에서 일어섰다.
“이만 당번 애들 잡으러 가 봐야겠다. 늦잠이라도 자는지 몰라. 아침 먹으러 올 거야?”
“아뇨,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종일 이걸 지켜보려고요.”
“안 먹어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너무 몰두하지는 마. 가끔 스트레칭도 하고.”
일어선 연주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가일 무늬 담요를 찬란의 어깨 위에 두른다. 찬란이 의아한 듯이 돌아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춥잖아. 마법사라도 소홀히 하면 병마라도 걸린다.”
“... 네.”
담요의 끝자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던 찬란 뒤에서 연주가가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닫는다. 결국 자신의 몫은 이 정도라는 거겠지. 연주가 또한 인생은 결국 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지금의 찬란은 명백히 고립되어 있다. 그런 존재를 홀로 두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손을 뻗으려 들다가도 무심코 그의 선택이 떠올라 거리감을 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리콰이드 두 사람의 이야기이니 괜한 참견은 말라는 무언의 경고. 그리하여 연주가는, 첫 번째 이안을 존중하기 위해 찬란에게 부채감을 쌓는다.
연주가가 떠나간 다음 한참 동안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저택의 수많은 문들 중에서도 뒷문에 해당했고, 저택 앞의 정원 쪽에서 사람들이 떠들고 노는 소리가 새들의 지저귐처럼 들려오기는 했어도 발걸음이 닿는 일은 없었다. 찬란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화초를 구경했다. 어느새 줄기가 굵어지고 이파리가 짙은 녹색을 띄웠다. 이대로라면 저녁 즈음에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찬란을 깨운 것은 눈앞에 굴러온 공이었다.
“아, 그거 이쪽으로 밀어줄 수 있어?”
멀지 않은 거리에서 머리가 땀으로 젖은 이안이 이마를 손등으로 닦고 있었다. 찬란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공을 데구루루 굴렸다. 이건 어디의 ‘자신’일까. 연주가처럼 독특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수호자처럼 눈이 특이하지도 않고, 인도자처럼 안대를 한 것도 아니었다. 대공인 리콰이드와 함께 온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루프를 하지 않은 쪽은 자신의 리콰이드와 잘 떨어지려 하지 않을 테니 가능성이 낮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면 루프를 한 쪽의 이안일 텐데, 그거야말로 일이 복잡해진다. 우선 찬란은 가볍게 목례를 해 뒀다.
“아, 신경 쓰지 마. 내 쪽은 워낙 많아서 일일이 구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조금 어색하겠지만 그냥 이안이라고 불러.”
“네…”
‘이안’이 공을 주워 와서는 자신의 옆에 앉을 때까지 찬란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고,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을 몇 번 식사 테이블 너머에서 본 적이 있었기에 그는 그럭저럭 식물 돌보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식사에도 없더니 이런 데서 있던 거야? 아, 이건 분명히 연주가가 주고 간 거지. 이런 옷 가지고 있는 사람 연주가밖에 없다니까.”
말이 물 흐르듯이 나온다. 흥미가 돋았다는 의미다. 영락없는 자신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틔우고 싶어서요. 씨앗을 구하는 게 어려워서, 뒤늦게 심는 바람에…”
“마법사들은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신기하다, 나도 구경하게 해 줘.”
이안은 고개를 뻗어서 생장하고 있는 화초를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력을 머금은 뿌리가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게 물을 빨아들였고, 줄기를 타고 올라 이파리 구석구석까지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왜 키우는 거야? 급하게 쓸 데가 있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던지.”
멍하니 식물에 집중하던 찬란은 정곡이 찔린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본 이안이 작게 웃었다.
“맞나 보네. 리콰이드에게라도 주고 싶은 거야? 그러고 보니 사제관계라고 했지.”
“.... 맞아요.”
더 이상 피할 곳도, 피할 이유도 없다고 느낀 찬란이 우물우물 인정했다. 이안은 그 사실에 더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쩐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찬란은 더듬더듬 두어 마디를 더 붙였다.
“단순히 스승이어서 드리는 건 아니에요.”
“그럼 스승 이상으로서 주는 거다?”
대체 이 사람은! 찬란은 귀까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소리를 내서 웃고 있던 이안은 그 뾰족한 시선에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 심하게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 정성이 담긴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에 찬란은 겨우 다시 시선을 화초에게 고정하고는 무릎을 양 팔로 껴안았다. 도움은커녕 놀리려고만 온 걸까? 그런 찬란을 지켜보다가 이안은 말을 이었다.
“스스로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준 거지? 그렇다면 좋은 거라고 생각해. 너에게도, 네 리콰이드에게도.”
이 사람은 자신이 리콰이드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알고 있을까?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어 고개를 돌리려던 찬란의 머리를 이안의 손이 덮었다.
“순간순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해. 그래야 후회가 없거든. 나중에 배신당했다는 걸 깨달아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모두 허사였다는 것을 깨달아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니까 믿어도 돼.”
한 칸 위에 앉아서 살짝 올려다본 이안의 표정은 후련함에 차 있었고, 그의 시선은 멀리 향해 있었다. 손에 눌린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 탓에 찬란은 눈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보아야만 했다.
“전부 거짓이었어도 괜찮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사랑한다고 말해. 결과가 아무리 무서워도 네 마음을 억누르지 마. 그건 무시한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안은 먼 곳에서 시선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찬란과 눈을 마주쳤다.
“진심을 다해. 그는 그것보다 못한 것으로는 모실 수 없는, 네게 귀한 사람이잖아.”
그리고 휘어지는 눈매에는 찬란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안은 그 시선을 깨고 무릎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자, 이제 더 이상 농땡이를 피웠다가는 공을 만들어 왔냐는 소리를 들을 거야. 대화 즐거웠어. 꽃이 피면 나중에 한 번 보여줘.”
다급한 기분이 된 찬란은 발걸음을 떼려는 이안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품 안에서 공을 몇 번 휘리릭 돌리던 이안은 찬란의 눈을 마주치고 여유롭게 웃었다.
“열여섯 번째 애를 찾는다고 말하면 알 거야.”
‘열여섯 번째’ 이안이 지나간 뒤로도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걸렸다가 그림자와 함께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짙은 녹빛의 나뭇잎 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새어 들어와 찬란을 비추었다. 예쁜 풍경이네, 스승님도 같이 봤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는 찬란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찬란은 올려다본 시야 속에서 그가 검은 바다의 인도자라는 것을 분간해낼 수 있었다.
“우리 애물단지가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인도자의 웃음은 다른 이안들의 것과 조금 달랐다. 적어도 찬란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부드러운 온정과 상대를 위하는 시선으로 마무리되곤 하는 이안들의 미소는 인도자의 비틀린 웃음과 궤를 달리 했다. 언제나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차가움은 때때로 타인을 향하거나 인도자 본인에게 향하곤 했고, 찬란은 그의 호의를 받으면서도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인도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다지 괘념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찬란은 그의 앞에서 다른 이안들 앞과는 다른 조심성을 갖추는 법을 익혔다. 그는 예의 바르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띄었다.
“네, 화초를 돌보느라요.”
인도자는 그제야 자신이 가로막고 있던 화초를 눈치챘는지 뒤를 돌아보곤 옆으로 비켰다. 찬란은 꾸준히 마력을 공급하면서 인도자의 눈치를 살폈다. 인도자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오늘이 그날이던가?”
아무렴, 이제 봉오리도 다 맺혀서 제법 태가 났다. 인도자가 한눈에 종류를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5월이니까요. 금방이죠.”
찬란은 스스로가 제법 처량하게 느껴졌고, 기분을 감추기 위해 태연한 척 어깨를 으슥였다. 인도자는 그런 것도 다 꿰뚫어 본다는 듯이 팔짱을 껴고 찬란과 화초를 느긋하게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입에 알 만하다는 웃음이 걸렸다.
“좋은 제자네.”
“그런 거 아니에요.”
바로 몇 시간 전 연주가가 똑같은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은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자는 날 선 대답에서 체념을 발견하고는 작게 웃으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거 아니야?”
“.....”
은근하게 묻는 질문에 찬란은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인도자가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도리어 호의에 가까운 것을 알지만 때때로 거북한 것은 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스승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해도…
찬란은 인도자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몇백 년동안 감추어오던 비밀을 태연하게 꺼내서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조언을 건네줬지. 절대, 절대로 스승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말라고. 찬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똑바로 뜨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
한 방 먹은 건지, 인도자의 눈에 유쾌함이 어렸다. 그는 몇 번 확인하듯이 찬란을 훑어보고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야 내가 걱정할 일은 없겠네. 꽃이 예쁘게 피겠어. 줄곧 정성 들였으니 말이야.”
그 말 대로 꽃망울은 이제 터지기 직전이었다. 만개한다면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찬란은 일어서려는 인도자를 잡아 세웠다.
“꽃, 보고 가실래요?”
인도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꽃들이 하나둘씩 개화하기 시작했다.
파란, 새파란 카네이션들이 툭 툭 피어났다. 겹겹이 흐드러진 섬세한 꽃잎을 푸르름이 가득 메웠고, 꽃잎이 접힌 곳으로 짙은 파랑이 번져나갔다. 진녹색의 꽃망울에서 태어난 파란 꽃송이들이 연이어 만개했다. 그 오랜 시간,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꽃망울이 터질 때마다 줄기가 흔들렸고, 그것은 바람 없는 곳에서 파도 같은 춤사위를 자아냈다.
찬란이 마지막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동안 인도자는 화려하게 핀 꽃무리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인도자에게서 말이 없자 찬란은 뿌듯한 기분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예쁘죠? 제가 가꾼 거에요.”
인도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찬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찬란은 온 힘을 다해 증명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손목에 묶인 검은 리본이 저녁 바람에 휘날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이것은 그의 증명이었으므로, 이것은 그의…
“행복이래요, 꽃말이.”
“... 그렇구나.”
찬란의 눈은 잎맥을 따라 흘러내리는 이슬과 연약한 꽃잎 사이사이로 배어드는 반짝임을 비추고 있었다. 인도자는 대양처럼 푸르른 그 두 눈에 햇살이 깃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저는 제 행복을 찾아낼 거에요.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가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낼 거에요. 그리고 스승님의 행복은 곧 제 행복이니까,”
찬란이 잠시 숨을 골랐다.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이라고 했지. 검은 바다의 인도자는 문득 그 이름이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는 스승님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에요.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달려 나갈 거에요. 이만하면 되었지, 하고 타협하지도 않고 자기만족으로 선행을 베풀고 혼자 두지도 않을 거에요. 같이 행복해질 거에요. 언젠가, 꼭 스승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어요.”
황혼의 햇빛이 찬란의 검은 머리카락을 빛으로 머금고 그림자가 무성한 수풀에는 주홍빛 온기만을 남겼다. 인도자는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찬란의 머리에 손을 얹고는 가볍게 흔들어 줬다.
“그래,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멀리서는 두 사람을 찾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눈앞에는 끝없는 정원만이 펼쳐진 가운데 찬란한 것은 고작 풀 한 포기. 숨결이란 말은 이런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어, 사허. 지나치게 짧고, 따뜻하고, 그렇기에 눈이 부신 것이다. 불쌍하기도 하지, 너는 이런 존재를 사랑했구나.
빛을 머금은 문이 열리고 반추의 사허가 아스트라이아의 찬란한 숨결에게 무언가를 고하고 있을 때, 검은 바다의 인도자는 문득 문 안에서 어떤 것이 흩날리는 것을 눈치챘다. 길 잃은 바람에 문 틈 사이로 무언가가 날라들어왔고, 그것을 지나쳐 찬란한 숨결은 빛 속으로 화했다. 허공을 떠도는 것을 잡아든 인도자는 반추의 사허가 찬란의 뒤를 따르는 것을 시선에 담았다. 잡아챈 푸른 카네이션은 품 안에 소중히 담아둔 채였다.